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190화 (1,18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90화

노을빛의 마왕성 (10)

한 걸음 더 앞으로.

한 걸음 더 앞으로.

도저히 뚫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벽, 하지만 문제는 없었다. 난이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과 내가 단편적으로나마 연결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쉬운 것이 있었다면 이 연결이 너무나 불완전했다는 것 하나.

‘너무 대충 연결된 건 아닌가.’

구태여 예를 들자면 데모 버전 같은 느낌이었다.

김현성의 것과 비교하자면 명백하게 다운그레이드된 버전,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전과는 다르게 우효열의 것은 실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차이가 넘 넘 심한데… 이 정도면 짭사설인데….’

전장의 열기나 피부에 닿는 감촉, 후각을 비롯한 오감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전과는 다르다.

알 수 있었던 것은 시각 하나가 전부였다. 녀석이 볼 수 있는 것을 내가 볼 수 있었고, 내가 볼 수 있었던 걸 녀석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다운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김현성은 내가 시야에 담고 있었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김현성 개인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수백 개가 넘는 시야가 한꺼번에 뇌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했었는데….

내가 망원경을 가지고 있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지금 녀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생각도 공유가 안 되네.’

소년만화 감성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완벽하게 연결이 되지 않은 상황, 그러니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제대로 된 성능을 보여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혹여나 내가 진짜가 아니라 기능이 다운그레이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기보다는 녀석과 내 유대감이 아직 덜 쌓였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현성이랑은 몇 년 동안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글케 된 거고.’

얘는 그냥 잠깐 쓰다가 버릴 생각으로 만난 거니까.

어떻게 생각해도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마냥 불만만 내뱉을 수도 없다.

‘그래도 된 게 어디야.’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단편적으로나마 연결된 것만으로도 성과라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런 불만을 입 밖으로 내뱉기에는 우효열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성능은 확실하자너.’

눈 앞에 펼쳐진 수집품 스킬들을 홀로 뚫고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알고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담하고 결단력이 있어야 했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신체 능력도 필요했다.

우효열의 현재 신체 능력은 아슬아슬하게 기준점을 통과하는 셈.

무엇보다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이 녀석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있을 법한 망설임이 녀석에게는 없다.

당장에라도 몸을 찢어발길 것만 같은 수백 개의 쇠사슬이 눈앞에서 쏟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시선은 오롯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에 고정되어 있다.

‘왼쪽.’

오른쪽.

우효열의 뺨을 쇠사슬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순식간에 머리통을 부숴 버릴 수 있는 기물을 앞에 두고도 녀석은 눈도 깜빡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눈을 더욱더 부릅뜨고 있었다.

한계까지 집중한 것인지, 동공은 축소되었고 이것이 시작된 이래로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올라가.’

쇠사슬을 밟고 올라선 녀석의 눈앞에 있는 것은 커다란 화염 불덩이들, 우효열이라면 충분히 쳐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자 곧바로 검을 휘두르는 녀석이 눈에 비쳤다.

콰앙!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사방으로 불덩이들이 튕겨 나가자 아까 봤던 거대한 해일이 들이닥친다.

‘말만 랜덤 마법박스지. 저거 해일밖에 안 나가는 거 아닌가?’

문제는 지옥마력골렘을 포함한 많은 것들이 해일에 휩쓸려 오고 있다는 것.

불길은 파도에 꺼져 있었지만 헤엄을 치려는 건지, 발버둥 치려는 건지, 거대한 골렘을 떠밀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고일 석상이나 다른 소환형 수집품들 역시 마찬가지.

다른 속성의 마법들까지 모조리 먹힌 채로 지옥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 할 만했다.

거울 호수의 안쪽으로 들어간 느낌이었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 없을 것이다. 사실상 그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쉬워.’

우효열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파도에 떠밀린 채로 발버둥 치고 있는 지옥마력골렘의 손을 피하고 녀석의 머리 위에 올라타 발 디딜 곳을 살핀다.

물론 그것은 녀석의 역할이 아니다. 내 역할이지.

녀석에게 쏟아지는 모든 것들을 시야에 담아 확인한 이후에는 길을 알린다.

어떤 곳이 취약한지, 어디를 밟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어워어어어어어어!”

쿠우우우웅!

거미형 마수가 파도에 휩쓸리며 다리를 뻗은 것은 바로 그때.

“시작.”

마수의 다리를 피하며 움직이는 것이 신호탄.

우효열은 고개를 숙이며 그 다리를 잘라낸다. 커다란 창이 녀석을 향해 날아가지만 그것 역시 몸을 젖혀 피해낸다.

당연히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으니까.

창에 가려진 채로 다가오는 거인의 발도, 우습지도 않은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전투 가방도 우효열의 뒤에서 다시 팔을 뻗는 지옥마력골렘도.

녀석은 전부 알고 있고 보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당연히 다리는 멈추지 않는다.

검으로 쳐내거나, 아예 멀리 떨어지거나, 서로 부딪치게 놔두거나 하면서 수집품들의 영향권에서 멀어진다.

멈춰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녀석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기대에 보답하듯 계속해서 녀석이 이동해야 하는 길을 안내한다.

마치 쓰레기더미가 해일과 함께 몰려들어 오는 것만 같았지만 길은 존재했다.

‘어때… 보여?’

어쩌면 녀석의 눈에는 가야 할 길이 붉은색 화살표로 표시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효열의 걸음걸이는 단호하고 정확했다.

움직임에 작은 군더더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든 행동과 움직임이 작은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한 것만 같다.

녀석이 이렇게 쉽게 주도권을 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 때문에 약간은 의아하기는 했지만….

‘말 잘 들을 수밖에 없자너.’

신세계를 경험시켜주고 있는데. 이 기회를 고집부리겠다고 꺾겠어?

평소에 자신이 했었던 무지성 돌격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 전장의 상황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저런 종류의 전사들에게는 꿈 같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니 나 역시 괜스레 자신감이 붙는다.

“루텐의 커다란 시계 때문에. 조금 느려질 거예요.”

수집품 2번 루텐의 커다란 시계, 해당 공간 안에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아티팩트.

녀석이 한 걸음을 내뻗자 해당 공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육각면체의 주사위가 굴러다니고, 전격으로 이루어진 뱀이 공중에서 헤엄친다.

그 외에도 쓰레기 더미들과 여기저기에서 나돌아다니는 파편들이 마치 무중력상태에 있는 것마냥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녀석을 향해 쏘아진다. 마치 시간을 빨리 감기 한 것처럼 모든 물체들이 우효열에게 쏟아져 내렸다.

물론 그것 역시 전부 계산되어 있다.

우효열은 전격으로 이루어진 뱀을 갈라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다.

이윽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주사위가 주변 공간을 삼키며 소멸된 이후, 나는 다시금 위치를 재조정했다.

‘틈.’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수집품들끼리의 충돌로 인해 우연히 만들어진 지름길.

계속해서,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놈은 나아간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워워아아아아!!”

쿠우우우우우우우웅!!

콰지지직!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녀석은 틀림없이 웃고 있다.

“하… 하하.”

하는 우효답지 않은 덜떨어진 웃음소리를 내보이며 녀석은 수집품의 산을 오른다.

마침내 녀석이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을 향해 몸을 들이밀었을 때. 멍한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는 황정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우효열이 황정연을 지나친 순간,

푸확 하는 소리와 함께 황정연의 몸에서 붉은색 물감이 터져 나왔다.

직후,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장내가 눈에 들어왔다.

해일에 쓸려 다니던 플레이어들도, 먼발치에서 전투를 구경하고 있었던 쓸모없는 놈들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녀석들 역시 멍하니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파악할 시간이 부족했겠지만….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마왕성의 수집품 관리인이 침묵합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이 터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하찮은 벌레 놈들….”

‘아직 침묵 안 했자너.’

흐릿하게 사라지는 수집품 관리인, 역소환을 당한 건지,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전형적인 악당 대사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우효녀석도 포효를 내지르고….

윌리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새끼 씁쓸한 것 같자너.’

마지막에 어째서 자신이 망설였는가를 떠올리고 있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게 천성이라는 건데.

“이겼다… 으아아! 이겼다고!! 해냈다고!! 제기랄!!!”

“우리가 결국 해냈다! 이 말이야! 흐하하하하핫!”

‘니네가 해낸 거 아니야. 내가 해낸 거지. 그리고 너희들 지금 텐션 너무 올라왔어. 뭐 노을빛의 마왕이라도 잡은 줄 알겠어. 정연이 하나 물리쳐 놓고….’

만약 황정연이 제대로 로헨의 플레이어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으면 결코 이렇게 많은 생존자를 끌고 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간에 로헨의 별들을 성장시켜 마왕성 위로 올려보내야 했으니 쟤들 입장에서도 적당히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도 기분 낼 만하기는 하지…’

버림받은 성녀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 얼싸안고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는 놈들이 눈에 띈다.

물론 나도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고 싶은 상황.

전투로 인해 몇몇 수집품들이 파손된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마동력 위치 전환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성과라 단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공간 안의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수집품 2번, 루텐의 커다란 시계. 일정 공간에 한파를 불어닥치게 할 수 있는 수집품 11번, 얼음가루시계.

하나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수집품 7번 클란다스의 가고일도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10번대 넘버링들은 전부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고, 우리 대륙에 가져가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것들, 심지어 황정연이 이것에 대해 전부 파악하고 있으니 이미 담당관도 있는 셈이었다.

‘좋아 죽겠자너. 진짜. 행복해 죽겠자너.’

“…….”

‘저것도 좋아 보이고, 요것도 좋아 보이고.’

“이기영. 네놈….”

“이기영 님….”

“부파티장님?”

물론 그 행복을 당장 표현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23살 꽃기영은 지금부터.

“제기랄! 사제! 이기영 님! 괜찮으십니까!”

“꺄아아악! 부파티장님!”

죽어갈 예정이었으니까.

‘멋있게 쓰러지자.’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기품을 잃지 않는 것이 바로 꽃기영의 아이덴티티였으니까.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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