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92화
노을빛의 마왕성 (12)
윌리엄의 판단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이기영의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이었다면 병력을 돌리는 게 더 합리적이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작은 희생이 있기야 하겠지만, 큰 관점에서 바라보면 언제든지 채워 넣을 수 있는 자원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기영을 대체할 수 없자너.’
조금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곳에 있는 병력의 반 이상을 갈아 넣는다고 하더라고 이기영 하나와 비교할 수 없다.
말마따나 저 정도의 전투 인원들은 언제든지 키울 수 있는 자원들, 훈련 커리큘럼을 만들고 아이템 좀 지원하면 3년, 혹은 4년 안에 키울 수 있는… 간단히 말해 언제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소모품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빌어먹을 천재는 그렇지 않다.
하늘에서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진 천재. 애초 이 답 없는 로헨의 원시인들을 노을빛의 마왕성으로 끌고 온 것이 모두 이기영의 저력이었다.
구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는 체계를 완전히 뒤바꾼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투 지휘관이라는 보직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몸소 증명하기까지 했다.
우리 쪽을 기준으로도 충격적인 것들을 많이 경험했을 텐데, 원시종족 로헨의 인간들에게는 꽃기영의 업적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23살의 꽃기영이 로헨을 바꾸고, 구하며,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래서 어디까지 부려 먹으려고 그러세요?’
문제는 꽃기영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꽃기영이 가져다줄 황금빛 찬란한 로헨을 떠올리고 있었던 녀석에게는 무척 아쉬운 소식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망연자실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네? 저… 잘…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
“정말로… 지금 이기영 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지… 이해가….”
“…….”
‘받아들여.’
“하… 하하… 농담도… 지나치십니다.”
아무 말도 없이 바라보는 것이 옳다. 윌리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듯한 꽃기영의 모습.
농담도 아니고 장난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일단 내가 직접 설명해 줄 테니까.
“농담이 아니에요.”
“뭔가… 이기영 님께서 잘못 알고 계시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
“혹시 이기영 님의 안에 있다는 어떤 것 때문이라면… 분명히 해결책이 있을 겁니다. 이대로 단정 짓기에는 너무나… 여기서 이러시지 마시고 일단 검사를 받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
“알고 계시겠지만 로헨은 넓고 방대합니다. 저희들이 알지 못하는 이능이나 이기영 님을 치료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무조건 존재할 겁니다. 여기는….”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제 생명력은 지금 이 순간에도 타들어 가고 있어요. 그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병력을 물리실 필요도, 이 원정을 포기할 이유도 없어요. 아니, 포기해서는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도대체… 아까부터 이해하지 못할 말씀을 하시고… 이기영 님께서는 아직….”
“믿어주셔야 해요.”
“…….”
“흐릿하지만 어째서 제가 이곳에 왔는지, 저들이 어째서 저를 원하는 건지, 제 안에 있는 어떤 존재가 무엇인지, 제가 왜 이것을 품고 있는지.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어요.”
“말도 안 되는….”
“떠올리기 싫어도… 이해하기 싫어도 이해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제 생명력은 지금도 타들어 가고 있어요. 정말로 끝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을 성자를 연기하는 것은 밥 먹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었다.
자꾸만 말도 안 된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윌리엄의 모습은 내 말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 꿋꿋하고도 담담한 표정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사실 너무 지나치기는 해.’
세상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무언가가 안에 있는데… 이제는 갑자기 시한부란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과하기도 하지만 주장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기다렸다는 듯이 우효열이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
언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것마냥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녀석이 시야에 비쳐왔다.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윌리엄과 이쪽을 바라보던 녀석이 한마디를 툭 던지는 것이 들려왔다.
“얼마나 남았지?”
라고.
‘쐐기 골이죠?’
그 어떠한 의문도 담기지 않았던 질문, 윌리엄이 바로 질문을 던진 것도 너무나 당연했다.
“당신… 알고 있었던 겁니까?”
윌리엄의 질문에 우효열은 대답하지 않는다.
“얼마나 남았냐고 내가 물었다. 이기영.”
“…….”
“…….”
“저도 확실히 알 수는 없어요.”
“…….”
“그래도. 이번 원정이 끝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예요.”
“…….”
“우효열 당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
‘혼돈이자너.’
“그렇다고 한다면?”
“그걸 알고서도…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기영 님을 이번 원정에 참가시키는 것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겁니까!”
‘지랄 났자너.’
“네놈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어째서 그런 겁니까? 도대체 어째서.”
“이유가 필요한가?”
“당신.”
“녀석이 원했을 뿐이다.”
“…….”
“이번 원정을 기획한 것도 참가하겠다고 말한 것도 전부 녀석이었다. 너나 네가, 아니, 그 어떤 누구도 녀석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입장이 아니야.”
이 집 드라마 재미있네.
“녀석이 원래 시한부라는 것은 알고 있었나?”
“그건….”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나?”
“…….”
“본인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일진대 존중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우효열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대사였다.
‘역시 이 새끼가 냉정하기는 해. 아무리 그래도 지 살리려고 생명력을 조금 태웠다는 설정이었는데.’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물론 이유 따위는 나도 모른다. 녀석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지, 자신이 살아 있었다는 걸 로헨에 남기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니면 이곳에 있는 멍청이들을 위하고 싶은 건지, 마지막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은 건지… 워낙 속에 감춰놓은 게 많으니… 알 수 없지만….”
“…….”
“그게 놈을 막을 이유가 되지는 않아.”
분한지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윌리엄의 무빙마저 어딘가의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너무 태연한 것 같은 우효열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녀석 역시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불안한 얼굴이 보이고 있는 상황, 이기영의 마지막을 존중한다고 말한 주제에 누구보다도 분한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그래… 그게 놈을 막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만약 녀석을 살릴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 안에 그 방법이라는 걸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나? 그 방법이 녀석을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이미 영혼은 썩어 문드러지고… 육체는 한계를 맞이했다. 녀석인 이미 여기 오기까지 많은 것들을 희생했다. 그 희생들을 전부 아무 일도 없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놈에 대한 모욕이다.”
“그건….”
“모든 건 이기영 저 녀석의 선택이라는 거다.”
“저는…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네놈이 용납하지 않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머저리 자식.”
“당신 같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 같은 비정한 인간이… 타인의 심정이나 기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이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눈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는 인간은….”
우효열은 윌리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그래.’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눈빛은 정말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을 거 같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그런 거야?’
나 역시 분하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원망스럽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짜야? 사실이야?’
괜스레 꽉 쥔 주먹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중, 표정 역시 내가 지금까지 본 우효열의 얼굴 중 가장 살벌하다.
윌리엄에 대한 적의라기보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몸에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를 괜스레 윌근본에게 쏟아내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윌리엄 역시 할 말을 잃은 듯 녀석을 노려보는 중. 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는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는 놈의 뒷모습이 눈에 보였다.
왠지 모르게 김현성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약간의 불안함이 감돌았던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가슴 속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무려 500번을 넘게 생사를 함께한 전우의 시한부 소식을 듣는 것은 일반인을 기준으로도 꽤 힘들 만한 일이다.
이미 나를 꽃과 풍요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는 녀석의 경우에야 오죽할까.
질서. 선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저런 타입이 오히려 흑화하면 귀찮아진다.
‘저 새끼 좀 달래줘야겠다.’
“이기영.”
아, 넌 또 왜?
“…….”
“혹시 네놈의 수명이 준 것이 나를 살린 것과 관련이 있나?”
“아니요.”
“…….”
“이미 타들어 가고 있던 것을 전해 준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신경 쓰여라.’
“그리고… 당신을 돕고 살리는 것 역시 제게 주어진 역할이에요.”
‘그게 성자의 충격적인 결말이야.’
“효열 씨 말대로 저는 제 역할에 충실하고 싶어요. 제가 이 대륙에 살아 있었다는 걸… 이기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모든 사람이 기억해 줬으면 해요.”
“멍청한 새끼. 네놈은….”
“만약 제가 정말로 사라지더라도 로헨은 저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혹시라도 진짜가 아니면 더욱더.’
몸이 정말로 좋지 않다는 듯이 괜스레 한 번 비틀거리고.
“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꿋꿋한 모습을 선보인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살짝 한쪽 무릎을 굽힌다. 걷는 것도 힘겹다는 듯이 말이다.
우효열이 눈치를 보며 다가오기는 했지만 당연히 꿋꿋한 꽃기영은 이런 도움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혼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듯 부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꽉 부여잡은 채로 발걸음을 옮긴다.
바깥에 몸을 숙이고 있는 파티원들의 모습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남궁선, 임채령, 노담혜.
“듣고 있었군요.”
“…….”
“…….”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임채령.
‘진짜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자너.’
할 말을 잃은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남궁선. 이미 눈이 벌게진 노담혜.
“부…파티장님… 흐윽… 흐으으윽….”
“끄윽….”
하나같이 즙을 짜내기에 바쁘다.
너무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 걱정이 될 정도, 심지어 얘네들은 우효열이 불러온 것만 같다.
스스로 위로할 수가 없으니 이렇게라도 위로를 전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타이밍은 괜찮았다는 판단이 선다.
‘슬슬 얘네들도 알아야 하기는 했어. 너무 갑작스러우면 또 감동이 없어요.’
말없이 이쪽을 꽉 안아주기까지 하지 않는가. 이런 따뜻함이 오랜만인 것 같아 기분이야 좋다.
“부파티장님… 죄송해요. 정말… 정말로….”
‘그래. 그래. 근데 뭐가 죄송하니.’
“흐으윽….”
‘그래요. 그래요. 울지 말아요. 다들.’
“흐윽… 흐으윽.”
‘아픈 만큼 성장하고… 아픈 만큼 강해지는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