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93화
노을빛의 마왕성 (13)
원정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좋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하수로의 3명의 네임드를 모두 몰아낸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집품 관리인 황정연까지 잡아낸 시점에서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의 전반전이 끝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앞으로 상대할 네임드들이 더욱더 문제이기야 하겠지만 원정대원들이 자신감을 얻은 것이 유효했다.
난세에 영웅이 태어나는 것처럼 일개 소규모 파티의 파티장에 불과했던 우효열이 샛별처럼 떠올랐고, 그 영향으로 원정대 내부적으로는 정말로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을 완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도처에 깔리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중요했던 것은….
‘내가 일어난 거자너.’
로헨에 벼락처럼 떨어진 천재군사, 꽃과 풍요의 성자이자 이번 원정의 총지휘를 맡은 이기영이 깨어났다는 소식.
그동안 있었던 강행군을 위로하듯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은 시점이었으니 긍정적인 분위기가 퍼져 나가는 속도도 빠르다.
술을 마시거나 도박판을 벌이거나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긴장을 풀 수 있을 정도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장려되고 있었다.
가장 긍정적인 것은 스스로 상태창을 연구하고 코인을 소비하는 놈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은 이쪽뿐만이 아니라 위쪽에서도 최고의 이벤트였으니 평소보다 더 많은 코인이 터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게니우스들이 공략 가능성을 높게 평가해 모아놓은 적금을 뿌린다는 것은 아군 병력에게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이템을 좀 구비해 놔야겠어. 아무래도….”
“구매할 만한 게 뭐가 있나? 내가 가지고 있는 걸로는 포션 몇 개 사는 게 끝일 텐데… 어? 감사합니다! 철갑 사자님. 보내주신 코인 감사하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대화를 캠프 곳곳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기여도를 정산하는 시스템 특성상, 자신의 패밀리아에게 있는 코인 없는 코인 전부 풀어버리는 게니우스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부대를 재정비하고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시간이 코인을 수금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보통 게니우스들은 관종들이 많으니까.’
급박한 상황에서 터지는 코인에는 플레이어들이 잘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게니우스들도 잘 알고 있다.
전투 상황에서는 메시지를 읽어주거나 피드백을 줄 수 없으니 자신의 계약자가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린 것이리라.
물론 이쪽도 예외는 아니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당신에게 미안해합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너무나 원통할 뿐이라고 중얼거립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우리 기영이가 사라진다면 자신 역시 사라질 것이라 외칩니다. 더 이상 이 긴 시간을 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오열합니다. 거짓말이라고… 우리 기영이가 사라질 리가 없다고 목 놓아 외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얘는 좀 정신과 상담 좀 받아야 될 것 같더라.’
[하늘의 문지기♥가 차원 시스템과 적대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기영이의 영혼을 꼭 찾아낼 것이라 말합니다. 전쟁을 치러서라도 당신을 꼭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말합니다.]
‘진짜 심각해. 얘는… 분명히 처음에는 안티였던 것 같았는데….’
[호수에 비친 별무리♥가 조용히 당신을 응원합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은 누구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째서 이토록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건지, 무엇이 당신을 그토록 강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인지. 인간은 때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는 하지만 언제나 당신은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중얼거립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며 5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가녀린 촉수여왕♥이 무언가 중얼거리려 했지만 말을 아낍니다.]
[가녀린 촉수여왕♥이 10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이렇게 후원해 주시지 않아도 괜찮은데….”
[포도주와 유희의 노래가 10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황금빛 성좌에 앉은 이♥가 당신은 후원받을 자격이 있는 필멸자라고 말합니다.]
[황금빛 성좌에 앉은 이♥가 20만 코인을 후원 합니다.]
“좋은 말씀 너무나 감사드려요.”
‘열자마자 난리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후원릴레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을 정도.
물론 이미 예정된 수순이기도 했다.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만으로도 손에 땀을 쥐고 시청했을진대 이기영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극적인 전개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정신없이 메시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진실을 알아버린 윌리엄과 마치 체념한 듯 분노를 삭이는 우효열, 파티원들에게 위로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꽃기영.
이번 극의 셀링 포인트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다른 것도 좋아.’
밝고 희망차고, 잘은 모르겠지만 행복한 미래로 향하는 분위기 속에 만들어진 어두운 그늘.
대부분의 로헨의 인류와는 다르게 소위 꽃기영의 측근이라 불리는 이들의 분위기는 대륙에서 유행하는 소설의 북부대공만큼이나 싸늘했다.
‘윌리엄 이 새끼도 점점 위험해지는 것 같고….’
파티원들은 매일매일이 눈물바다.
이때 즈음 이쪽은 휴식시간을 대폭 늘렸다. 하루에 활동하는 시간은 약 4시간 정도였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침대에 누워서 보냈다.
병사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때는 늘 당당하게 스스로 걸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 외의 시간은 부축해 줄 수 있는 인원들을 대동했고, 스스로 걷는 것조차 힘겹다는 스탠스를 취했다.
창백한 얼굴로. 계속해서 콜록거리며 조금 더 적극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소통하는 시간도 조용한 침대 위에서.
촛불이 한두 개 켜져 있는 조금은 따뜻한 방 안에서….
괜스레 천장을 바라봐 주고 보이는 모습을 의식하며 입을 여는 것이 국룰이었다.
“부족한 것 많은 저를 이렇게 관심 있게 봐주셨던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고… 뜻깊은 일이에요. 여러분들이야말로 제게 가장 커다란 축복이에요.”
[……가 2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이 4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빨아 먹어야 되자너.’
“언제나 후원해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했지만… 이번만큼은 후원해 주신 코인은 로헨과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을 위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할게요. 아… 코인 상점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씀이지만… 이 코인을 그렇게 소비하고 싶지는 않아요. 방법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
“물론 노을빛의 마왕성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안정을 취한다면 진행을 조금 늦출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가 나아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그 무엇도 구할 수 없는 채로 눈을 감는 것보다는 이곳에서… 이런 말씀 드리기 쑥스럽지만… 조금은 명예로운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어요.”
좋은 질문도 날아들어온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어째서 그렇게까지 로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글쎄요. 저도 정확히 어째서 인지는 말씀드리기 힘들지만… 아마 이 곳이 저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 같아요.”
그래.
“제가 사라지더라도 제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은… 제가 이 대륙을 위해, 로헨의 인류를 위해 싸웠다는 것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황금빛 성좌에 앉은 이♥가 언제나 인간은 모든 것을 망각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희생과 업적은 후대에 널리 알려질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로헨은 당신을 잊을 것이라 말하며 씁쓸해합니다.]
“하지만….”
“…….”
“여러분들이 저를 기억해 주시잖아요.”
“…….”
“적어도 로헨의 대지와 바다는… 로헨의 바람과 별은… 저를 지켜봐 주시는 여러분들은 언제나 저를 기억해 주시잖아요.”
옛날 감성을 이해하고 있는 노친네들에게는 이런 감성이 먹힌다.
“잿빛노을이 사라진 여느 때와 같은 로헨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것임을… 여러분들께서 언제나 저를 기억해 주실 것임을 알고 있어요. 저도 그리 이타적인 사람이라 말하기 힘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저런 관종은 무시해 주구.’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이 7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이 1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여기 진짜 장사 잘되자너.’
요 이틀간 휴식을 취하며 빨아들인 코인이 촉수와 함께 굴렀던 시절보다 배는 벌리는 것 같다.
당시 어마어마한 코인을 빨아들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실로 믿을 수 없는 수치.
어떻게든 응원이 되어 주는 말을 하려고 하거나 힘이 되어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게니우스 양반들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이런 관심 너무 오랜만이야.’
오죽했으면 대륙에서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까.
게다가 친절한 것은 게니우스들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더 친절해.’
우효열은 특히나 더 친절해졌다. 말로 표현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행동 하나하나에 친절함이 묻어 나 있는 것이 느껴진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식사는 했나?”
‘이것 봐. 이것 봐.’
전형적인 한국식 인사. 녀석이 밥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은 네놈을 걱정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니요. 아직….”
“또 걸렀나 보군. 뒈질 때가 되면 처먹지 못하는 병이라도 걸리는 건가? 원정길이 길다. 당장. 내가 보는 앞에서 전부 먹도록.”
“하지만… 정말로….”
“네놈의 그 작은 입을 찢어 벌리고 직접 쑤셔 넣어줘야 하는 건가?”
“…….”
“못 참겠군.”
“알… 알았어요! 먹으면 되잖아요. 먹으면….”
‘사실 이거 진짜 맛있자너. 입 안에서 살살 녹자너.’
당연하지만 식사의 질도 달라졌다. 원래 좋은 걸 많이 먹기는 했지만 정성이 들어간 맛은 언제나 다르게 느껴진다.
“윌리엄 님과는 이야기… 좀 해보셨나요?”
“글쎄. 내가 다가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 원래 한번 고집을 부리면 좀처럼 풀지 않는 성격이니. 당분간은 같을 거다.”
“아….”
“결국엔 그 머저리도 이해하게 되겠지. 인정하기 쉽지 않겠지만… 네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
“다른 분들은 조금 어떠신가요?”
“구태여 대답이 필요한가? 그 천둥벌거숭이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더군. 괜히 너를 불러왔다고….”
“정말로 그것 때문이 아닌데… 이미 몇 번이나 설명을 드렸는데….”
“애초에 남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그 지경이 나진 않았겠지. 그렇지 않나?”
“아니요. 당신은 항상 채령 씨를 그런 식으로 너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근데 이 새끼 진짜 밥 처먹는 거 다 보고 갈려고 하나 보네.’
“효열 씨는 안 드시나요?”
“나는 이미 먹었다.”
“다음부터는 같이 먹어요.”
아마 녀석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자기 음식까지 챙겨 여기로 찾아오겠지.
‘아픈 게 좋기는 해. 진짜루. 이렇게 잘해주잖아.’
물론 아직까지 그 발언을 사과하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웬만하면 이쪽이 죽을 때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간에 다른 이야기를 중얼 거리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여왔다.
“그리고… 소식은 들었나?”
“무슨 소식이요?”
“레인저들이 다음 네임드와 접촉했다.”
“누군가요.”
“노을빛의 마왕성. 무기창고 관리자 유아영.”
“전투는….”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네.”
“그녀는 싸울 생각이 없다고 하더군. 오히려 간접적으로나마 아군 병력을 돕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효열의 말을 듣자마자 대충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거….’
아무래도 김예리가 던전에 이스터 에그를 심어 놓은 것 같았다.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유아영 표 장비와 21군단의 창고를 뒤질 수 있는 이벤트 구간이었다.
“믿을 수 있겠나?”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요.”
무조건 잡아야 하는 이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