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194화 (1,19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94화

노을빛의 마왕성 (14)

‘생각보다….’

괜찮은데?

컨셉 자체는 구닥다리, 연출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노을빛의 마왕성의 구성 자체는 제법 만족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쉴 틈 없이 달리는 말은 언젠가 쓰러지는 법이다.

며칠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고는 하지만 원정대의 체력이나 정신적 피로도가 전부 회복될 리 만무.

호흡이 긴 던전에서 종종 나오는 이런 종류의 이벤트들은 원정대에게 큰 힘이 될 수밖에 없다.

던전 공략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비교적 쉽게 보상들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재를 맞은 셈.

심지어 그 이벤트를 여는 당사자가 무기창고 관리자 같은… 소위 퍼주는 종류의 네임드라면 이쪽의 입장에서도 여러 가지를 기대하게 된다.

‘보상은 확실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우효 녀석이 말을 이어왔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

“네놈이 직접 갈 필요가 있는 건가?”

“물론이에요. 애초 책임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게 그쪽의 제안이기도 했고….”

“…….”

“저도 완전히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에야 무기창고 관리자의 말이 진실일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근거는?”

“제정신이 박힌 악마들은 인간과 타협하지 않아요. 시종일관 보여줬던 서큐버스 여왕의 태도나, 마치 우리 원정대들을 유희거리 취급하는 것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 않나요?”

“…….”

“함정을 파기 위해 그런 쓸데없는 메시지를 보낼 수고를 사서 하지는 않을 거예요. 수집품 관리자나 흑집사가 패배했다는 건 그들에게는 웃음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고요. 다른 무엇보다.”

“뭐?”

“만에 하나 위급한 상황이 오더라도 효열 씨나 다른 분들이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내 말 맞지? 천하무쌍 우효열이 있는데 무서워할 게 뭐가 있겠어?

“제 말이… 틀렸나요?”

“…….”

“…….”

“네놈의 말이 전부 맞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놈들이 구태여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도 드는군.”

“이벤트나 이스터에그 같은 종류의 히든피스라면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도 있고요. 준비가 됐다면 일단 가보는 게… 일단 여기서 이러는 것보다 부딪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

“사람들을 불러주세요.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번 일에는 보안을 거는 게 좋겠어요. 혹시 해당 레인저 말고 알고 있는 인원들이 있나요?”

“아마 윌리엄의 귀에도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구태여 확인할 필요는 없는 것 같군.”

우효열이 시선을 돌린 곳에는 윌리엄이 자리해 있었다.

‘얘도 우효열을 닮아가나.’

녀석 역시 소식을 들은 내가 움직일 것이라는 걸 예상한 것이 분명하리라.

당연하지만 나를 막으려고 찾아온 것은 아닐 것 같았다. 이미 천방지축 꽃기영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을 테니….

최소한 함께 동행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지 않을까.

“아! 윌리엄 님!”

침대에서 살며시 몸을 일으킨 것은 당연지사. 감수성 많은 윌근본은 그 모습을 보고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럴 때일수록 더 꿋꿋해야 하자너.’

차마 이기영을 정면에서 바라볼 자신이 없는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기까지 하는 녀석.

시한부의 꿋꿋함이 그리 마음에 걸리는 것인지 이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절대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스탠스를 취했던 녀석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입씨름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 것 같았다.

아무리 설득해도 당장 성과를 볼 수 없는 상태라 판단했거나, 다시 한번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거나 둘 중에 하나.

‘누가 감히 꽃기영의 뜻을 굽힐 수 있겠냐구.’

마치 지난 갈등이 없었던 것처럼 말을 이어가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만… 이미 들으셨겠군요.”

“무기창고 관리자가 접촉했다는 소식 말인가요?”

“예.”

“그렇지 않아도 제가 직접 접촉해 보려고 해요.”

“구태여….”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기는 하지만… 혹시나 협상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윌리엄 님이나 지휘본부를 못 믿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너희들 말 개 못하잖아. 잘 나가고 있는데 굳이 찬물을 뿌리는 상황을 걱정하고 있는 거야.’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지만… 이기영 님… 지금은….”

“무엇을 걱정하고 계시는지 알 것 같지만 몸은 괜찮아요. 안정을 취할 만큼 취했으니 슬슬 움직이고 싶어요. 윌리엄 님도 아시다시피….”

‘말린다고 안 말려질 거 알자너.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그럼 무기창고로 가 보는 게 좋겠어요. 효열 씨.”

“…….”

윌리엄의 의사 따위는 묻지 않고 일단은 진행부터, 이미 그곳으로 향하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것 같은 스탠스를 취하자 아니나 다를까 애매모호한 포지션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결국 큰 한숨을 쉰 이후에는 꽃과 풍요의 에밀리아에게 말을 전달하는 놈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함께 창고로 향할 인원들을 편성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렇게 이번 원정대의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녀석들이 차출됐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윌리엄을 포함한 인원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상황이 터졌을 때를 대비하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서둘러 뛰쳐나가는 인원들은 함정의 여부나 불안요소들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고….

‘당연히 불안하기야 하겠지. 사실 저쪽에서 먼저 접촉했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김예리가 상황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것을 전부 알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아군 측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니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도 이해가 되기야 했다.

심지어 이런 종류의 이벤트를 제대로 겪어본 적도 없을 테니 과민반응하듯 반응하는 게 당연한 상황이기도 했다.

“무기창고는 여기서….”

“네. 수집품 창고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마물들이나 악마들을 만나지는 않았나요?”

“몇 기가 있었지만 정찰대가 길을 뚫는 과정에서 처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찰대 풀이 생각보다 괜찮나 보네.’

“그렇군요.”

무기창고로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수집품 창고와 결이 같은 만큼 가깝게 설계해 놓은 것 같았다.

윌리엄, 우효열, 에밀리아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자 금방 창고에 도착할 수 있었을 정도.

이미 안에는 정찰대를 비롯한 몇몇 인원들이 있기는 했지만 뭐가 그리 조심스러운지 윌리엄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늦추고 있었다.

이윽고 창고가 열린 뒤에 눈 앞에 펼쳐진 광경.

‘이야.’

수집품 창고가 잘 정리된 도서관을 보는 것 같았다면 무기창고는 마치 예술작품을 전시해 놓은 갤러리와 비슷한 것 같았다.

한곳에 쌓여 있는 물건들도 분명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아마 저것들은 쓰레기들일 테니 구태여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보인다.

사실 다른 것보다는 가운데 있는 커다란 대장간이 눈에 들어온다.

무기창고라기보다는 거대한 대장간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느낌.

계속해서 타오르고 있는 화로와 붉은색 쇳물이 흐르고 있었고 여러 개의 망치들이 모루 위로 떨어지고 있다.

쿠웅 쿠웅 하는 소리들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더 거슬리는 것은 창고 전체를 뒤덮고 있는 열기였다.

‘너무… 뜨겁자너.’

만약 이런 이벤트가 아니라 정규전을 벌였다면 이 열기도 공략에 필요한 요소로 자리 잡지 않았을까.

커다란 모루와 망치의 뒤로 유아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러니까… 유아영 님이라고….”

“네. 편하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조금 어색하네.’

첫 등장 때는 전체 무장을 하고 있어서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커다란 뿔을 두 개 가지고 있었다.

완전히 무장을 벗어버린 모습, 아마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원정대에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꽤 좋은 선택이었다. 실제로 이쪽의 경계를 푸는 것에 도움을 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안부를 물어보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군요.”

“…….”

“아마 여러분들께서 제일 궁금하신 것은 어째서 제가 여러분들께 이런 메시지들을 보냈는지에 대한 것일 겁니다. 더불어 정말로 저를 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도 궁금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미 이곳에 발을 디디셨다는 것부터 반쯤은 저를 믿어주신 것 같지만….”

“…….”

“사실 저는 여러분 같은 이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시 시바 그런 흐름으로 가는 거자너.’

전부 듣지 않아도 대충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상이 간다.

‘뭐 억지로 끌려왔다. 이런 건가?’

“사실 저는 21군단 소속이 아닙니다.”

아마 쟤는 본래 21군단 소속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평화롭게 무기를 만들고 있는 대장장이 였겠지.

우연히 21군단에 눈에 띄었고 그때부터 계속해서 강제로 무기를 만들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 공을 인정받아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왔지만 마음속 한구석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을 것이다.

“무척 평화로운 곳이었습니다만….”

물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 고향은 노을빛의 마왕의 점령지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계속 여기에 있었어야 했던 이유 하나를 더 만들어야 하지 않나?’

내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유도 등장한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현재 지하감옥에 구금되어 있는 제 남편을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쩐지 창렬이가 거기에서 안 보인다 했어. 근데 너희들 결혼 안 했잖아요.’

구성에 비해 아쉬운 스토리와 연기력이 눈에 띄었지만 어찌어찌 힘겹게 퍼즐을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난다.

마치 대본을 읽는 것만 같은 딱딱한 목소리. 평소 잘 긴장하지 않던 유아영이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니 확실히 배우 체질은 아닌 것 같았다.

“만약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이곳에 있는 만족하실 만한 보상을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구태여 우리가 네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있나?”

“효열 씨.”

“아마 저를 사냥하신다고 하더라도 이 곳에 있는 장비들을 사용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21군단의 수집품들은 당신과 같은 필멸자들이 사용하기에는 위험한 물건들일 테니… 이 노을빛의 마왕성에서 저 장비들을 여러분들이 착용할 수 있도록 고칠 수 있는 이는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답이 되셨는지….”

“웃기는군.”

여기서는 살짝 도움을 주는 게 괜찮을 것 같다.

“사실이에요. 효열 씨.”

“뭣?”

“이곳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저주받은 것들이에요. 착용 제한이 걸려 있는 것도 보이고요. 효열 씨나 윌리엄 님 정도가 되는 플레이어들은 그 페널티를 감수할 수 있겠지만 다른 분들은 아니에요.”

“…….”

“…….”

“당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나요?”

“없습니다. 믿는 것도 믿지 않는 것도 여러분들의 마음이지만… 최소한 저는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부디….”

“…….”

“제 남편을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는 유아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악마가 스스로 고개를 숙인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아마 지금 즈음이면 속으로 다들 깨닫고 있을 것이다.

무기창고 관리자는 결코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그녀를 믿어주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이벤트로 얻을 수 있는 이해득실을 따지기 이전에 적지의 한복판에서 잠재적인 적군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이 이벤트를 놓치는 이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

조금은 긴장한 무기창고 관리자의 낯빛이 계속해서 어두워지고 있을 즈음에 나는 윌리엄과 우효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믿어야 해요.”

라고.

“어째서지?”

‘왜긴 왜야. 너 무기 개 박살 났잖아. 그거 바꿔야지. 체급 차이 나는데 장비까지 후달리면 답이 없어요. 회사설이 만능인 줄 알어?’

“…….”

‘그리고 이거 그냥 거저먹는 이벤트야. 굳이 병력들 다 뺄 필요도 없고. 별동대 몇 명 구성해서 감옥에서 사람 하나만 빼 오면 되는 건데… 네임드랑 만나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 나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침대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뭐.

“어째서 이자를 믿어야 되는 것인지 물었다. 이기영. 네 알량한 동정심 때문이라면….”

“진심을 외면하기 싫었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윌리엄이라면 몰라도 우효열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토록 아무 조건 없이 상대방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말이다. 왠지 모르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저는… 아니, 우리는 인간이니까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