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95화
노을빛의 마왕성 (15)
개연성도 두서도 없이 펼쳐진… 무지성으로 내지른 인간찬가.
뭔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받아치면 이쪽도 할 말이 없겠지만 아쉽게도 꽃기영에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래서 사람은 감투가 중요하자너.’
로헨을, 인류를 위해 자신의 삶마저 초개처럼 내던져 버리는 성자가 내뱉은 대사일진대, 개똥으로 죽을 쓴다고 말해도 무언가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슬그머니 윌리엄 녀석의 반응을 살피니 한참이나 생각에 빠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우효열 역시 마찬가지.
“무슨 개 같은 소리를….”
라고 지껄이고 있기야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꽃기영의 눈을 외면하기에는 힘들어 보인다.
왠지 모르게 생각이 많아 보이는 녀석. 믿음, 신뢰, 진심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할 여지가 필요한 것일까.
도대체 어째서 이 꽃과 풍요의 성자는 이토록 아무런 의심 없이 타인을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 불신에 걸린 우효열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웃기지도 않는군… 정말로… 웃기지도 않는 개소리야. 차라리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면 더 그럴듯하게 들렸겠지만….”
“합리적인 이유는 있어요. 말씀드렸잖아요. 효열 씨. 다만 그것 이상으로 저분을 믿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단순히 저분을 동정하거나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
“저분을 믿어야 할 것 같아요. 이 느낌을 정확히 말로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귀인 만난 상황이자너.’
뜬금없기는 했지만 일종의 시험이라고 판단해도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없느냐. 던전을 디자인한 놈이 보통 성선설을 믿는 경우일 때 이런 이벤트들이 더욱더 두드러진다.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의외의 보상을 받는 구조는 언제나 1픽으로 꼽히는 구성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이 건은 그런 경우와 함께 취급할 수는 없겠지만 골조는 같다.
무기창고 관리자를 믿음으로써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조.
“그게 이기영 님의 뜻이라면….”
내가 할 일은 이번 일에 여기에 분명 뭔가가 있을 거라는 냄새를 풍기는 것밖에는 없었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봐도 굳이 이견이 없을 것 같은 느낌. 곧바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유아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감사합니다.”
“그전에… 단순히 호의로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미리 말씀 주신 대로… 저희들이 장비들을 사용할 수 있게 제련해 주셨으면 해요.”
“물론입니다.”
“지금부터 부탁드려요. 일단 이곳에 계신 분들부터, 특히 저분과 저분이 사용하실 장비를….”
우효열과 윌리엄을 가리키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윌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우효열이 겪고 있는 장비 이슈는 꽤 시급한 상태였으니까.
계속해서 임채령의 단검을 사용하게 둘 수는 없었다.
김현성처럼 검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다소 험하게 사용하니 내구도가 남아날 리 만무.
사실 지금까지 부숴 먹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어서 빨리 장비를 갈아치워 줘야 했다.
계속해서 내게 불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 검을 바꿔준다고 하니 관심이 가기는 하는 모양.
슬그머니 집단에서 이탈해 무기들을 힐끔힐끔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근데 영….’
“…….”
‘실피아의 손톱?’
뭘 저딴 걸 고르고 자빠졌어?
아무 말도 없이 검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은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조용히 검에 손을 뻗는다.
“그거 아니에요.”
“뭐?”
“효열 씨 무기는 제가 고르는 게 좋겠어요.”
“갑자기 무슨….”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효열 씨와 궁합이 맞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쪽이 더 나아 보여요.”
“네놈이 뭘 안다고….”
“실피아의 손톱에 있는 바람의 가호의 부가 효과를 노리시는 거겠지만… 효열 씨의 장점은 민첩함이 아니에요. 순간적으로 낼 수 있는 폭발력이죠. 효열 씨는 가끔 자신이 빠르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효열 씨는 절대로 빠르지 않아요.”
‘현성이랑 비교하면 거북이 수준임.’
원래부터 발이 느린 윌근본이야 말할 것도 없고.
“뭐라고?”
“뱀파이어릭 블레이드. 이게 더 어울리겠네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는 것처럼 적에게 입힌 대미지를 체력으로 흡수하는 검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효열 씨의 장점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스탯이 뭔 것 같아요?”
“…….”
“제가 효열 씨의 스탯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효열 씨는 현재 자신이 낼 수 있는 민첩과 힘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근간이 되는 스탯이 바로 체력이고요.”
“…….”
“금방 지치시죠?”
“웃기는 소리. 내가 금방 지친다고?”
“혼자 신나게 움직여 놓고는 금방 탈진하시잖아요. 이 악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버티시려고 하는 건 알지만 표정에서 다 보여요.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체력이 아니라 정신력으로 이겨내려고 하는 것도….”
“네놈이 뭘 안다고.”
“정신력이 높은 건 좋지만 언제까지 거기에 의지하실 생각이신가요? 지금까지의 전투방식은 요행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무튼 이게 효열 씨가 민첩 세팅이 아니라 체력 세팅을 해야 하는 이유에요. 제 판단은 그래요. 아니, 제 말이 맞아요. 나머지 한 자루도 비슷한 계열의 무기로 선택하셔야 해요.”
‘팩트폭행 당하니까 얼굴 찌푸리는 것 봐.’
“기세 좋게 움직이던 처음 그 느낌을… 전투가 끝이 날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해야 하는 게 효열 씨가 지향점으로 잡아야 하는 스타일이에요.”
‘좀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은데… 그냥 돌려 말할 걸 그랬나?’
“…….”
강해지고 싶어 하는 욕구가 클 테니 분명히 내 말을 들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빤히 뱀파이어릭 블레이드를 바라보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본인도 느끼고 있었을 문제, 인정하기 싫어서 버팅기고 있었겠지만 이렇게 수면 위로 드러내 준다면 절대로 외면할 수 없다.
“이 무기도 제련이 가능한가요? 유아영 님?”
“네. 물론입니다. 부길… 이기영 님.”
‘똑바로 몰입하세요. 쫌.’
“그리고….”
“이기영 님. 저도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디 보자… 너는….
“윌리엄 님은 알아서 잘 맞추신 것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네. 자신의 장점이 뭔지, 어떤 점이 부족한지 확실하게 알고 계신 것 같아서….”
‘다들 오랜만에 신난 것 같네.’
물론 곧바로 장비들을 지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플레이어는 없다.
특히나 지금 같이 스펙업을 꼭 필요로 하는 던전에서는 장비 하나하나가 보물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하리라.
“작업은 곧바로 시작해 주세요. 저희도 곧바로 구출 작전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혹시 저희가 알아야 하거나 주의해야 할 만한 것이 있나요?”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21군단의 현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터라…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는 간수장 스콜필드를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아마 흑집사와 마수조련사를 이겨내신 여러분들이라면….”
‘뭔 엑스트라 하나 데려왔나 보구나.’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정보들이 귀에 들어왔다.
첫 번째로 무기창고 관리자가 갈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부탁하고 싶다는 것.
감옥을 지키고 있는 간수들은 네임드 개체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 간수장 스콜필드의 대략적인 능력과 김창렬의 인상착의.
감옥을 탈출하는 것은 아마도 창렬이가 도움을 줄 거라는 것 정도였다.
확실히 사이드 퀘스트로 분류해도 상관없다 느낄 정도로 무게감이 없는 볼륨,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이 퀘스트는 2선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네.’
아무래도 무기창고 관리자는 꽃과 풍요의 에밀리아를 비롯한 2선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
‘작전 지시는 내가 대충대충 해주면 될 것 같고…’
우효열, 윌근본 이 투톱에게 볼을 연결시켜 줄 2선들의 레벨 업도 필요하니까.
두 명이 강해지는 속도를 따라가기는 힘들겠지만 최소한 발을 맞출 정도로는 성장해야 하지 않겠는가.
“힘든 짐을 지게 해서 죄송해요. 에밀리아 님.”
“아닙니다. 성자님.”
힘내라고 포옹 한번 해줘야지.
“…….”
너무 꽉 껴안았는지 살짝 얼굴을 붉힌 에밀리아에게 조용히 미소를 지어준 이후에는 차례대로 안아주고….
“저도 함께 가고 싶지만….”
“멀리서나마 작전을 지휘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책무를 다한 것이니 신경 써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죄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사실은 가기 싫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재충전을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네.”
그 와중에도 우효열은 여전히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선보이고 있었다.
체력문제로 도발한 것이 녀석의 여린 가슴을 난도질한 것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장비까지 받을 예정이면서 또 이제 와서 마음에 걸린다는 개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그것 역시 아니다. 이미 녀석은 이 사이드 퀘스트가 아군에게 득이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지금 당장 대장간으로 들어가 장비들을 제련하고 있는 유아영을 보고 있노라면 알면서도 당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대장장이들과 장비들을 봐온 만큼, 무기창고 관리자의 실력이 어떤지, 또 21군단이 모아놓은 수집품의 질이 어떤지 이해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갑자기 또.’
“갑자기 또 뭐가 불만이신가요?”
“그런 건 없다.”
“아니… 기분 좋게 아이템까지 골라놓고….”
“그게 문제라는 거다. 생각 이상으로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네?”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듯한 얼굴.
뭐라 해석하기 힘들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인간찬가.
선의와 신뢰가 낳은 긍정적인 결과물.
마치 짜여진 판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스토리 텔링.
이 모든 결과물의 발단이 조건 없는 믿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던 게 분명하리라.
‘하긴.’
녀석은 1회 차에서도 버림받은 들개마냥 홀로 싸돌아다녔으니 말이다.
꽃기영이 없었던 1회 차는 낭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통수에 통수를 치는 상황들과 야생에 풀어놓은 짐승들이 서로 아웅다웅하다 자멸하는 꼬라지만 눈에 담아왔겠지.
녀석이 2회 차에 와서 겪은 것들은 녀석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료를 만나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을 만났다.
‘영감님.’
뿐만 아니라 로헨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며, 다시 한 번 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천천히 인지하고 있기야 했겠지만, 갑작스러운 인간찬가를 계기로 우효열이 알고 있는 상식 자체가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우효열이 말을 이어왔다.
“네놈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갑자기 뭔 소리를 하려고요?”
“나를 믿고 있나?”
“…….”
“내가 네놈에게 숨기고 있는 게 있다고 해도?”
“…….”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너 이 새끼… 벌써 준비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