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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98화 (1,19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98화

노을빛의 마왕성 (18)

착각도 아니고 꿈도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고 시간이 흘러 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약 11시간 정도의 공백.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태를 파악하는 것은 빨랐다.

허투루 이런 일이 벌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이 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상황이었다.

제대로 퍼즐을 맞추고 있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정황들은 너무나 뻔했다.

블랙아웃이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기억은 이쪽의 한쪽 눈이 금색으로 반짝이는 것이었으니까.

‘기절해 있었던 것도 아니야.’

장소가 달라져 있었고 옷도 갈아입고 있는 상태. 애초에 누워서 깨어나지 않았으니 공백의 시간 동안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판단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원격조종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내 안에 진짜로 무언가가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누군가가 이쪽의 통제권을 빼앗았다는 것 하나였다.

그 누군가로 제일 의심이 가는 사람은 당연히 이기영, 정황상 진짜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겠지.

진짜와 진짜가 드잡이질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아직 내가 가짜라고 도장을 찍을 시기는 아니었지만 이 몸에 대한 통제권은 내가 아니라 녀석이 쥐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녀석을 막을 수 없고, 녀석은 언제든지 이 몸의 통제권을 가지고 올 수 있었다. 아니면….

‘트리거가 따로 있는 건가?’

그날 아침에 따로 무언가를 했던 기억은 없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봤을 뿐이었고 트리거가 될 만한 행동을 따로 한 적도 없었다.

어느 순간 갑작스레 몸의 통제권을 잃은 만큼….

무언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힌트를 찾으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혹시나 메시지를 남겼을 가능성을 떠올린 탓이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을 리 없을 텐데.’

분명히 뭔가 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오는 것이 없었다.

“불친절한 새끼.”

현 상황을 내가 스스로 파악하기를 원하고 있거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싫거나 둘 중 하나.

아니면 단순히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됐든 간에 모두 개연성은 충분하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게 먼저였으니까.

‘장비는 전부 받은 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사이드 퀘스트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원정대, 그리고 유아영과 했던 계약들.

지휘본부가 소란스럽지는 않았으니 성공적으로 끝마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제대로 장비들을 받았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한곳으로 시선이 간다.

호위인력들.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서자 조금 먼발치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몇몇이 눈에 보였다.

있는 듯 없는 듯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이쪽에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언제든지 대처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는 인력들.

꽃과 풍요에서 면접까지 준비하며 고용한 경호원들이었다.

“잠깐… 시간 좀 괜찮으신가요?”

“네?”

“그러니까… 혹시 알레리아 님 맞으신가요?”

“아… 아… 앗! 네…네!”

‘얘 무슨 렉 걸린 것 같네.’

“평소부터 지켜보고 있었어요. 너무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이 자꾸만 눈에 띄어서…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깐 방 안으로 들어와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네? 방… 방 안으로 말입니까? 제가… 감히… 지… 지금은 임무수행 중인데….”

“더 가까우면 임무수행 하시기 더 편하시지 않을까요? 잠깐 조용히 이야기 좀 하고 싶어서 그래요. 부탁드릴게요. 여쭈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웃으면서 말하는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던 모양.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 채로 천천히 방 안으로 입장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뭐가 그리 둘러볼 게 많은지 힐끔힐끔 눈알을 굴리고 있는 모양새.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려왔다.

본인도 깜짝 놀랐는지 의식적으로 침을 넘기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입안에서는 계속해서 침이 고이는 있는 것 같았다.

대충 봐도 긴장할 대로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익숙한 반응이었다.

꽃과 풍요의 성자를 눈앞에 목도하고도 긴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은근히 허당 느낌이 있네.’

“여기 앉으세요.”

“네? 여기… 말입니까?”

“네. 네. 차는 어떤 걸로 드시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요.”

“정말 괜찮….”

“그렇게 계속 거절하시니 제가 알아서 타드리는 게 좋겠네요.”

알레리아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상시 갑옷을 입고 있어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신경 쓰였는지 본인의 몸을 킁킁거리기까지 하는 상황.

이내 눈이 마주치자 다시금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돼요. 임무수행 중 흘린 땀이니까요.”

“아… 네… 네….”

“업무는 좀 어떠신가요?”

“…….”

“정확히는 이곳에서의 생활은 어떠신지….”

“아… 생… 생활 자체는 괜찮습니다. 여기 친구들도 함께하고 있어서… 그… 아헨델의 캐시와… 조지나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들이….”

얘 갑자기 무슨 말 하는 거야?

본인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횡설수설 손짓 발짓 하며 이상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지만 전부가 영양가가 없는 말들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생활이… 정리해서 말씀드리자면 괜찮습니다. 네. 총지휘관님 덕분에 항상 괜찮습니다!”

“아… 네. 감사드려요. 후훗.”

“…….”

“…….”

본인도 망한 거 아나 보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어 하는 표정이 눈에 띄었지만 아쉽게도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나마 이 대화를 빠르게 진행하는 것이 민망함을 덜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급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보다 총지휘관님… 물어보실 말씀이라는 게….”

“아. 네. 그랬었죠. 알레리아 님은 오늘 하루 종일 저를 지켜보고 계셨죠?”

“네. 그…렇습니다만….”

“제가 오늘 무슨 일들을 했었는지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차례대로 말이에요.”

“네.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만… 어째서….”

“아무것도 묻지 말고요.”

“이건 혹시 시험….”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말씀해 주시면 돼요.”

아니라고 말했지만 뭔가 본인의 자질을 시험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얼굴을 보이고 있다.

“그… 죄송합니다. 정확한 시간은 제가 숙지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 대략적으로나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일단 아침 8시 30분 정도에 방에서 나오셨습니다.”

“네.”

“이후에는 공용식당에서 간단한 식사 이후에 여러 가지 보고서를 읽으시며 커피를 드셨습니다.”

그 와중에 커피는 처먹었네. 이 새끼.

“그 정도로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큼지막한 일로만 말씀해 주셔도.”

“아… 네. 실례했습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무기창고로 향하셨습니다. 그곳의 관리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고는 몇 가지 장비를 교체하거나 추가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쪽 관리자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만….”

“아. 네.”

“그다음에는 저주받은 엘프여왕의 정원에 펼쳐져 있는 결계로 향하셨습니다.”

“…….”

“정하얀 님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시고 함께 결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이때가 오후 1시 즈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하자면 유아영네 공방에 들러 장비들을 교체하거나 추가 발주하고 정하얀과 퀴즈 놀이를 함께 한 셈이었다.

‘따로 필요한 장비가 있었나?’

요청 장비목록을 따로 작성해 놨을 테니 이후 확인하면 될 것 같았다. 이쪽이 놓치고 있던 것을 그쪽에서 발견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아마 우효열이나 윌리엄, 그리고 주요 네임드의 전체적인 성장 방향은 건드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놈의 눈이 옹이구멍이 아니라면 말이다.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고 있는 알레리아를 뒤로하고 슬쩍 장부를 꺼내 흘겨보자 확실하게 몇 가지 추가된 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력증강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라고 판단되기는 했지만 구태여 이쪽의 통제권을 빼앗으면서까지 변경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예상대로 우효열의 장비들은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윌리엄은 조금 바뀌었네.’

그마저도 미비했다. 나는 윌리엄에게 민첩성이 필요 없는 스탯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쪽은 그게 아닌 모양, 아마 김현성을 상대하기 위한 최소한의 민첩 수치는 올려놔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버프로 그 민첩 수치를 떼우려고 생각한 이쪽과는 조금 다르다. 녀석의 세팅은 버프가 비는 타이밍까지 고려한 세팅이었다.

사제직군이 전멸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

물론 정하얀을 만난 것도 신경 쓰인다. 오랜만에 정하얀과 함께 있고 싶다는 의지였는지, 꼭 전달할 메시지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결계를 빠르게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바탕이 된 것인지 조금 더 생각해 볼 만했지만 알레리아의 말로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오후 2시 10분 정도였고… 회의 내용은… 모르지만….”

“정말 듣지 못하셨나요?”

“네. 하지만 어떤 내용으로 회의를 하셨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회의가 끝난 직후, 그림자 복도를 우회해 통과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요.”

“…….”

“…….”

“그래요?”

“예.”

녀석은 시간을 앞당기고 싶어 하고 있었다.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지만 생각해 볼 만했다.

내가 너무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일까.

그림자 복도를 우회하고 정하얀의 퀴즈놀이에까지 손을 뻗을 정도라면 꽤 노골적으로 시간을 앞당기려고 한 셈이었다.

로헨에서 체류한 기간이 너무 길게 느껴진 것인지, 이 모든 게 싫증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이 이야기의 끝을 조금 더 빠르게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조금 더 빠르게 가도 문제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기영은 급한 성격이 아니다. 다소 성급하게 움직이는 것보다는 천천히 하더라도 퍼즐이 완벽하게 맞는 것을 더욱더 즐긴다.

녀석이 이걸 앞당기고 싶어 한다면 이유야 어찌 됐건 이쪽이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그림자 암살자 리안이 줄 수 있는 경험치를 무시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산책이라도 하면서 나머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알레리아를 대동한 채로 병영을 한 바퀴 둘러보자 원정 준비를 하고 있는 인원들이 눈에 띄었다.

정찰대 몇몇이 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회 루트를 한 번 더 점검하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몇 번을 점검해도 부족하다고 느껴질 테니 레인저들을 계속해서 교대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은 뭘 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네.”

“5시부터는 쭉 우효열 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셨던 것 같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고… 저 역시 자세히는 모르지만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계신 것처럼 느껴졌었습니다.”

‘뭐야. 무슨 이야기 했는데? 나만 빼고 시바 뭔 이야기 한 거야?’

“약 3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밖으로 나오셨고 밤 산책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역시나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총지휘관님께서 눈물을….”

“네?”

‘아니, 왜 울었어? 또?’

“우효열 님께서는 총지휘관님을 위로해 주신 것만….”

‘그 새끼가 위로를 해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이 새끼가 뭔가… 뭔가 영화 한 편을 찍고 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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