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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99화 (1,198/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99화

노을빛의 마왕성 (19)

그 영화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지만 구태여 시간을 내 우효열을 찾은 것을 보고 있노라면 내용 자체가 평탄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바야.’

정황상 꽤 진득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거라는 판단이 선다.

몸의 통제권을 빼앗아온 타이밍을 생각해 보면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회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녀석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감언이설을 퍼부었길래 녀석이 들고 있는 방패가 허물어졌을까.

무슨 영화를 찍었길래 상황이 이토록 극적으로 변할 수 있었을까.

이곳에 온 이래로부터 녀석을 우효열을 사람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내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

금이야 옥이야 키워왔더니 남이 홀라당 채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는 딸기를 도둑맞은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시바 뭔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한 거지?’

아니, 성과는 있었던 건가?

다른 무엇보다 그 우효열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것에 협조한 것이 놀랍다.

“저… 총지휘관님. 괜찮으십니까?”

“네? 제가….”

“표정이 너무 좋지 않으신 것 같아서… 혹시 편찮으신 곳이 있으시다면….”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잠깐 생각할 것들이 있어서.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것보다 알레리아 님 혹시 그다음은….”

“…….”

“그다음은 없었나요?”

“앗! 네. 다음 방에 들어가신 이후에 저를 부르신 게 마지막입니다.”

“아… 그렇군요.”

“혹시 도움이 되셨는지… 여쭈어보실 게 남아 있으시다면….”

“아니요. 제가 궁금한 건 딱 여기까지예요. 도움 주셔서 감사해요.”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이…이렇게 짧게나마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너무나도 영광….”

“그리고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윌리엄 님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저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는 걸 알리지 않아 주셨으면 해요.”

“네? 네. 알겠습니다.”

“꼭 부탁드려요.”

“…….”

“…….”

“네.”

왠지 모르게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팬서비스 좀 해주고 후딱 내보내야겠다.’

“이해가 가지 않으시겠지만 제게는 중요한 일이에요. 부디 꼭 부탁드려요….”

그녀를 살짝 껴안아 주고 토닥거려주기까지. 긴장했는지 몸이 굳어 있었던 것만 빼면 나름 유익했던 팬미팅이었다.

대략적인 타임라인도 알 수 있었고 이기영이 뭘 원하고 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굳이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녀석이 원하는 것은 노을빛의 마왕성을 최대한 빠르게 클리어하는 것 하나. 여러 가지로 본인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에 대해 몇 가지 길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그것 하나였다.

‘왜 모습을 드러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내가 녀석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것.

사실상 가장 기분이 좋은 성과였다.

이기영와 꽃기영의 인격은 명백하게 분리되어 있다.

혹시나 이기영의 무의식이 이쪽을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내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인 셈.

몸의 통제권은 빼앗길 수 있지만 최소한 꽃기영의 의식이라는 영역에는 녀석이 손을 뻗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판단하는 것이 옳다.

만약 정말로 녀석이 내 무의식의 영역까지 손대는 게 가능했다면 구태여 이 몸의 통제권을 빼앗을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함정일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지만….’

굳이 이런 종류의 함정을 팔 정도로 이기영이 치밀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아니,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리라.

나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나게 많은 이점을 포기한 셈.

꽃기영이 경쟁상대가 아니라 상생해야 할 관계라고 여기고 있다는 해석에 무게를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내가 진짜 이기영에게서 떨어져 나온 자아인 건지, 아니면 이곳 게니우스들을 속이기 위해 프로그래밍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 스스로가 자신을 이기영이라고 여기고 있는 만큼 단기적인 목표는 같다.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으로 이어지는 로헨 구원하기.

1기영 이슈로 홀로 드잡이질을 했을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

“…….”

‘이걸 같이 가자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할까?’

뭐가 됐든 간에 상관없지만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궁금증이 해결된 것만으로도 기쁘다.

첫 번째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몸이 호문쿨루스가 아니었다는 것. 김현성이 내 육체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였다.

만약 꽃기영의 의식이 덤기영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자신의 육체에 새로운 자아를 주입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같은 짓거리를 한 셈이 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문제가 될 여지도 없다.

‘별게 아니기는 해.’

통제할 수 있고, 언제든지 분리해 낼 수 있는 자아라면 덤기영이나 1기영이나 주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본인의 자아를 분리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일단 우효열한테 가 봐야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는 게 좋을까.

고민을 하면서도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치고 있다.

늦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아직 녀석이 잘 시간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늘이 다시 지나가면 이 새끼가 다시 한번 모른 척할 가능성이 크다. 아직 감수성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재빠르게 다시금 찾아가는 것이 옳다.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와 우효열이 있을 만한 곳을 물색해 봤지만 녀석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캠프를 돌아다니고 있는 임채령이 눈에 들어왔다.

“채령 씨.”

“부파티장님! 어디 가세요?”

“혹시 효열 씨 어디 있는지 아세요?”

“글쎄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제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아까 전에 보기는 봤어요. 왠지 심각한 얼굴로 여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라고요. 조금 심각해 보이기는 했는데… 말을 걸어도 도통 대답을 안 해주고… 소리까지 질렀는데 무시하고 가더라니까요. 생각하니까 갑자기 화나네. 그 오빠 진짜 좀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혹시 어느 쪽으로 갔는지는 아시나요?”

“저쪽이에요.”

“죄송해요, 채령 씨. 먼저 실례할게요.”

“앗! 부파티장님.”

‘얘 어디가 있어?’

어차피 세이프티 존은 한정되어 있으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녀석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임채령이 말해준 방향을 중점적으로 찾아 나서자 얼마 지나지 않아 구석진 곳에서 혼자 가오를 잡고 있는 우효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커다란 기둥에 기대앉아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는 녀석.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센치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우효열답지 않게 뭔가 감상에 빠져 있는 듯했다.

‘여전하자너.’

놈의 기감이라면 이미 내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바라보는 녀석이 눈에 보였다.

“효열 씨?”

“…….”

“효열 씨.”

목소리를 내며 중얼거리자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이지?”

“저… 그러니까….”

“용무가 없으면 괜히 기웃거리지 말고 들어가는 걸 추천하고 싶군.”

‘뭐야.’

“…….”

“날이 쌀쌀해서 하는 소리다.”

“…….”

‘이 새끼… 조금 따뜻해진 건가?’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조금 더 친절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아니야. 확실히 더 따뜻해진 것 같아.’

녀석의 눈동자가 우호 레벨로 바뀐 지 제법 오래되기는 했지만 그 전보다 우호도가 더 올라간 것 같았다.

눈빛도 목소리도 조금 더 부드러워진 듯했고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이 새끼 성격에 오늘 무슨 이야기 나눴냐고 물어보면 지랄 날 것 같은데.’

다짜고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기보다는 일단 운을 띄우는 게 좋지 않을까. 적당히….

“효열 씨… 오늘….”

라고만 말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반응이 올 것이다.

“이야기는 전부 끝난 것이 아니었나?”

“그러니까….”

“더 이상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니, 시바. 나도 좀 알자. 뭔데? 진짜.’

“나답지 않게 말이 많아졌어. 쓸데없이 감상적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뭐가 이놈의 감성을 건드린 걸까.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도,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어.”

‘아니.’

“물론 그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

“네 말에 발끈한 것은… 나답지 않았다. 그저 네 말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혼자서 활동하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더군.”

정황상 1회 차의 이야기를 나누기는 한 것 같았다. 우효열이 솔로 플레이를 한 계기 같은 게 주제였을까? 녀석이 1회 차에서 어떤 최후를 맞이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인정하마. 너는 나를 변하게 했어.”

‘이게 시바 무슨 상황이냐고요.’

“아주 조금이지만 말이다.”

“효열 씨.”

“그만,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이미 이해했다만 한순간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다. 나는 여전히 나일 거다.”

‘그러니까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고 계시는 거냐고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한다. 타고난 성정을 바꾸는 건 그만큼 쉽지 않아.”

팩폭이라도 맞은 것일까. 묘하게 기가 죽은 것 같기도 하다.

왠지 모르게 더 이상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 오늘은 이만하고 싶다는 의사를 계속 표현하고 있던 탓에 더 이상 압박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미안했다. 이미 용서를 한다고 했지만 다시 한번 사과를 받아줬으면 좋겠군.”

‘뭐 했는데?’

“…….”

“…….”

“네.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대충 흐름을 생각해 보면 회귀나 파티에 관련된 대화 중에 언쟁이 있었고, 녀석이 뭔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녀석이 느끼기에도 심한 말이나 행동을 했을 것이고 이기영은 그것을 약점 삼아 대화의 주도권을 잡지 않았을까.

그걸로 녀석의 성벽이 무너졌고, 결과적으로는 원하는 것을 얻은 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고 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

평소에 하지 않았던 진솔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늘도 몇 번 팔아주고, 눈물도 좀 흘려주면서 쌓인 이야기도 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공감하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진도를 나아갔겠지.

우효열에게는 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던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본인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시기를 겪고 있을 테니….

‘평소보다 더 감성적인 이유가 있자너.’

아마도 녀석은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돌아본다는 것이 바뀐다는 뜻은 아니지만… 또 그게 우효열에게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지만….

‘괜히 이러다 또 혼자 되면 멘탈 나갈 텐데….’

녀석은 자라나고 있었다.

분명 내게 잘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분 나빠.’

이상하게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건 내 작품이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만약 내가 이기영에게서 떨어져 나온 자아가 아니라 만들어진, 그러니까 프로그래밍된 자아라 가정하면 더욱더 머리가 차가워진다.

내가 김현성에게 가지고 있는 유대감 같은 것들이 모조리 가짜라고 한다면…. 파란 길드원들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도 모조리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면….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는데.’

꽃기영에게 남은 것은 이것밖에 없다.

새삼스레 그것을 깨닫게 된 순간.

제삼자가 내가 만들고 있는 작품에 똥을 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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