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00화
노을빛의 마왕성 (20)
꽃기영에게 남은 것은 이것밖에 없다.
새삼스레 그것을 깨닫게 된 순간.
제삼자가 내가 만들고 있는 작품에 똥을 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아무래도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인 것 같았다. 짜증 섞인 녀석의 표정이 내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순간적으로 녀석을 신경 써주지 못할 정도로 불쾌한 기분이 물감 번지듯 번지고 있었다.
“…….”
“장비.”
“뭐?”
“장비 다시 세팅하는 게 좋겠네요.”
“갑자기 왜.”
우효열의 장비는 그 결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불순물이 섞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차피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이기영의 선택이 합리적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짜증이 치솟아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녀석 쪽에서 이쪽을 도발한 셈. 정말로 도발할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꽃기영 쪽이 기분 나빠 할 것을 고려했어야 했다.
자기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어떤 불순물도 섞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녀석도 나도 마찬가지.
김현성에게 미친 까마귀가 묻었을 때와 진배없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자기 자신이 기분 나빠 할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터.
‘이건 뭐 어쩌라는 거지?’
노골적으로 서로 간의 지켜야 할 영역을 침범하며 도발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꽃기영을 도발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아니면 나를 아예 신경 쓰고 있지 않거나.
동등한 자신으로 대우할 생각이 아니라고 한다면 녀석의 이렇게 행동하는 것 역시 이해가 간다.
함께 나아가야 할 동반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동업자와 하청업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법이다.
녀석이 꽃기영을 단순한 하청업자로 치부하고 있다면….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라고….’
어차피 자신이 그려놓은 타임라인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녀석이 굳이 이쪽을 배려할 이유가 없다.
내가 만들 수 있는 변화는 아주 사소한 것이고 혹여 레일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다시 바른길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본래 예상하고 있었던 사안이었지만… 괜스레 입안이 쓰다.
아니, 그것보다도….
‘이게 목적이었을까?’
꽃기영이 가질 수 있는 게 로헨에 있는 것뿐이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싶었던 걸까.
“오늘은 이만 들어갈게요.”
“뭐? 너….”
“…….”
“…….”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는 우효열을 뒤로하고 다시금 거울을 바라본다.
조금 흥분했는지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당연하지만 한쪽 눈이 변하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나와.”
“…….”
“나와 이 개새끼야! 보고만 있지 말고!”
피드백이 없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피드백을 하고 싶었다면 해도 진작에 했을 것이다.
단순히 이쪽을 괴롭히는 게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디스트 같은 행위에 점점 더 화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정하얀의 눈 한 쌍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구석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만났다고 했었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꾸만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듯한 느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원정… 꼭 해야 돼요.”
“뭐?”
“꼭… 해야 돼요. 괜, 괜, 괜히… 쓸데없는 것 때문에… 미루지 말구….”
“…….”
혼란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을 지경. 정하얀을 뒤로한 채로 다시금 방을 빠져나온다.
정신없이 캠프를 돌아다니다 보니 파티원들이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효열은 조용히 임채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 무슨 대화를 나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상기시키고 싶었던 거야.’
같은 생각을 떠올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기영은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녀석들이 어떻게 살아가든지, 어떤 최후를 맞이하든지 간에 아무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 확률이 높다.
저들과 인연을 쌓은 것은 녀석이 아니다. 꽃기영이라는 자아가 진짜든 가짜든 간에 이 자아는 애초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어졌을 확률이 높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로헨에서 인연을 만드는 것 자체가 무가치하다고 판단한 건지, 아니면 이곳에 온 계약을 꼬기 위해 새로운 자아를 주입한 건지, 더욱더 효율적으로 일 처리를 하기 위해서인 건지 알 턱이 없었지만….
최소한 녀석의 생각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꽃기영은 로헨을 저버릴 수 없다.
남은 게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 순간부터 이 미친놈은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지혜 누나랑 한번 이야기를 해보는 게 나을까.
당연히 답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 역시 만족스러운 대답을 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지혜를 찾고 싶은 것은 아마 이기영이 가지고 있는 습관 같은 것이리라.
무슨 일이 있을 때면 이기영은 언제나 이지혜와 대화하며 문제를 풀어나가고는 했으니까.
들이켜면 안 되는 독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나.”
-…….
“지혜 누나?”
나는 그녀를 찾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왜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예요? 싱겁게.
‘말을 하는 게 좋을까.’
“아니야….”
-약이라도 먹었어요? 오빠 요즘에 진짜 이상하다.
“누나.”
외줄을 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내가 오늘 누나한테 연락했었나?”
조심스럽게.
-갑자기 뭐예요?
“내가 누나한테 오늘 연락했었냐고. 대답하는 게 어려워?”
-이 오빠 또 이상한 소리 하네. 갑자기 왜 그래요? 진짜 무슨 일 있어요? 그쪽 잘 진행되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지혜 누나. 나 지금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나는 언제나 우리 이기영 편이죠. 오빠 진짜 이상하다. 우리 이거 끝나면 이번에는 진짜로 한번 상담받아봐요. 아니, 지금 어디에요? 내가 그쪽으로 갈까? 만날래요?
“…….”
-너무 그렇게 스트레스받지 말라니까요.
“…….”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자기 할 일만 제대로 하라고요. 지원은 팍팍하고 있고 공략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뭐가 그리 문제람.
가슴이 답답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참을 수가 없다.
“누나.”
말하면 안 돼.
‘묻지 마.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나아.’
지금 연락을 끊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지만….
“내가….”
말하지 마.
“내가 진짜 이기영이 맞아?”
-…….
“…….”
-하아….
시발.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목소리는 떠나간 뒤였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무겁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계속 가지고 있었던 의문, 계속해서 속을 썩이고 있었던 문제를 밖으로 내뱉은 것만으로도 답답함이 사라진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불안감이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원정 취소할까요? 내가 보기에는 오빠 조금 심각한 상황인 것 같은데. 잠깐 내려오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오빠가 이렇게 스트레스받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 그동안 조금 무리하기는 했나 봐.
“…….”
-솔직히 우리 둘 다 로헨이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상관없잖아. 당초 계획이랑 조금 멀어지고… 손해가 있기는 해도… 금방 털어낼 수 있는 것들이고… 대륙 운영에 지장이야 생기겠지만 그게 오빠 정신건강보다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건….”
-계약이 문제기는 한데… 사실… 우리가 그대로 놔두면 로헨이야 알아서 무너질 테니까. 몇십 년만 시간 끌어주면 알아서 무너질 테니까… 계약 이행 의무도 없을걸요.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 이건 시스템으로 묶인 계약….”
-해결책은 언제나 있다니까. 정 안되면 위쪽이나 악마들 쪽에 중재를 요청해도 되고… 계약 불이행으로 인한 위약금? 크기는 하지만… 솔직히… 아니, 크기는 크구나… 근데 우리가 그런 거 감당 못 할 정도로 상황 심각한 것 아니잖아. 그러니까 우리 그냥 털어버려요.
“무슨 뜻이야.”
-로헨 애들 어떻게 되든 우리 알 바 아니니까. 그냥 털어버리자고요.
협박처럼 들려온다.
하지만 절대로….
‘그만둘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사실 문제는 없다. 계약으로 얽혀 있기는 하지만 계약을 한 당사자가 꽃기영이라면 애초 계약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새로운 자아, 아니, 영혼을 주입한 가장 커다란 이유로 예상했던 것이 이 계약 문제 아니었던가.
계약 자체가 사기인 만큼 위약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원에 대한 것.
이미 투자한 것들이었다. 예상외로 많은 시간과 자원을 투자했다.
없는 곳에서도 극한의 이득을 뽑아먹으려고 하는 둘의 성격상 적어도 투자한 것들을 회수하기 전까지는 로헨에서 발을 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투자한 시간이랑 자원이 얼만데… 여기서 발을 빼?”
-잘 알고 있기는 하네요. 근데 말했잖아요. 오빠 건강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한번 상담받아보라고 할 때 받아보지 그랬어요.
하지만….
‘그냥 버린다는 거야?’
이대로 발을 빼버린다면 로헨은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단순히 소환된 군주들 때문이 아니다. 우효열의 회귀 전이 양반일 정도로 로헨 차원의 균열이 벌어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자력으로 회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완전히 불가능하다.
“아니….”
-네?
“아니야… 내가 잠깐… 피곤해서 그랬나 봐. 누나.”
-그런가요?
“문제는 없어. 내일 원정도 무리 없게 진행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최대한 빨리 끝내 볼게.”
-아… 걱정되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 누나 말 듣고 보니 나도 최근에 조금 무리한 것 같아서… 빠른 시일 내에 마무리 지을 거니까.”
‘이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들.’
이 새끼들은 이곳을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식민지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만 같다.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조력자.’
뭘 도와야 하는 건지, 어떻게 도움을 받아야 할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최소한 어떤 방식으로든 로헨이 무사할 수 있게… 누나와는 다르게 그 누구보다도 이기영이 엿 먹기를 바라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으니까.
당장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없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김현성도 이쪽을 볼 수 있었던 만큼 녀석도 분명히 이쪽에 연결점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난.’
“…….”
‘난 절대로 양보 안 해.’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이기영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유감이네.]
“어. 너….”
[나도… 절대로 양보 안 하는데.]
“제기….”
-하아….
“지혜… 누…나….”
-진짜 사람 귀찮게 하고 있네.
“아….”
-넌 여기까지인가 봐.
“아니… 이지혜… 너….”
-아! 오빠! 벌써 몇 번째예요? 이거 문제 있을 거라고 내가 말했는데! 카스가노가 괜히 헛바람 불어놔서… 그리고 오빠는 거기서 도대체 왜! 아니….
“아… 으… 아… 흣… 흣… 앗….”
-이 새끼 X나 똑똑하다니까! 암시 안 걸었으면 어쩔 뻔했냐고요!
‘무슨 암시… 내가… 너한테… 말을 한 게… 암…시….’
-아으… 리셋할게요.
그리고.
“…….”
“…….”
“…….”
암전.
눈앞이 깜깜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