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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 1202화

노을빛의 마왕성 (22)

푸하아아아아아!!

“푸하아아아아아!!”

“이기영. 이기영!”

“하아… 하아… 하아….”

“정신 차려라.”

“하아, 하아….”

“이 멍청한 새끼! 그러니까 내가 몇 번이나!”

“부파티장님! 부파티장님…. 괜찮으세요?”

“온다! 막아! 남궁선!”

“네… 네!”

“신성력은 얼마나 남았지?”

“거의….”

“하아… 하아… 하으… 하아….”

“부파티장님… 부파티장님!!”

“보호의 선율!”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씨이발….”

“뭐라고요? 부파티장님! 부파티장님!”

“우욱… 우웨에엑!”

“부파티장님이 이상해요! 효열 오빠! 오빠 내 말 듣고 있어요?!”

“제길!!”

“효열 오빠! 부파티장님이 이상하다고요!”

“나도 알고 있다.”

“어… 어!”

내가 없는 동안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주입되고 있었다.

엘프여왕 엘레나의 공략을 눈앞에 두고 회의를 진행하고, 파티원들과 평소대로 대화를 나눈 이후에 진행된 전투.

신성력으로 지옥의 식물들을 불태우고 전진하는 원정대원들과 거의 다 온 이후에 길이 막혀 전진하지 못하게 된 파티의 상황까지.

파노라마가 흘러가듯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히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점점 머릿속이 또렷해진다.

아직까지는 감각이 희미하기는 했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지끈거리는 머리도 이곳이 현실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숲에서 나는 피와 오물 냄새 때문인지 코를 찌르는 악취와 귓가로 바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너무나 현실적이다.

‘내 다음 놈의 기억이 들어온 건가?’

들어온 건지, 자연스럽게 흡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흡수된 것인지, 흡수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녀석이고 녀석이 나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데이터가 성공적으로 옮겨질수록 이전에 있었던 상황 역시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넌 여기까지인가 봐.

“…….”

-아! 오빠! 벌써 몇 번째에요? 이거 문제 있을 거라고 내가 말 했는데! 카스가노가 괜히 헛바람 불어놔서… 그리고 오빠는 거기서 도대체 왜! 아니….

“…….”

-이 새끼 X나 똑똑하다니까! 암시 안 걸었으면 어쩔 뻔했냐고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지혜의 목소리.

-리셋할게요.

‘개 같은 놈들.’

정황상 리셋이 한 번 진행됐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어째서 폐기되어야 할 개체가 다시 주도권을 잡았는지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내가 겪은 일이 뭔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더미였구나.’

나는 더미였구나.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지혜가 스스로 뱉은 말도 그랬지만 이것이 아니더라도 눈에 보이는 정황들을 너무나 쉽게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암시라는 것은 아마도 내가 스스로 의문을 느꼈을 때 이지혜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진실을 부정하는 종류의 암시였을 것이고….

‘아마 전자겠지.’

개인적으로는 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혜에게 질문을 던진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카스가노는… 카스가노는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 거지?’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뻔했다. 그녀가 나설 수 있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는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는 것은 이기영과 이지혜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떠나지 않는다.

리셋되기 전의 상황을 떠올려 보면 분명히 이렇게 사고하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을 터였다.

어떤 형태로든 그쪽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거나… 소위 말하는 쿠데타를 꾀하는 것은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사고하는 것 자체가 읽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기는 했지만….

“시바….”

당연하게도 사고하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 지금껏 보고 들은 적 없는 정보들이 차고 넘친다.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떠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닷속에서 보았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만약 지금 보고 있다면 어째서 개입하지 않는 걸까.

개입할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실험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이기영과 이지혜에게는 이상한 일도 아니지. 실험을 즐기며 지켜보는 것은 녀석들의 취미라 해도 무리가 없다.

내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 건지. 그냥 지켜보고 싶은 건가.

자신들의 실험체가 어느 정도까지 발버둥 칠 수 있는지.

만약 정말로 내 상황을 전부 알고 있는 거라면 이후 실험에 쓰일 데이터를 건지기 위해서라도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섞이기 시작한 기억은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점점 형태를 갖춘다. 아까까지만 해도 움직이지 않았던 몸이었는데 이제는 손가락을 꿈틀거릴 수 있다.

마치 정신과 육체가 동기화하고 있는 듯한 감각. 폐기되어야 할 개체가 틀림없이 이 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기영… 제길!”

“오빠! 지원군이에요! 지원군!”

“윌리엄 님이! 오셨어요! 윌리엄 님이….”

“일단 뚫어내!”

“성자님은! 성자님은 무사하신 겁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올라오기 전에 봤던 건 뭐야. 내가 진짜로 본 게 그게 맞는 건가?’

“이기영 님을 중심으로 방진을 구성한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당연히 데이터의 바다, 늪을 올라오기 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마치 안개가 낀 듯, 아니, 오류라도 있었던 것처럼 머릿속이 지직거리고 있었지만 데이터들이 중얼거렸던 목소리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더미월드에서 있었던 일들이겠지?’

내 기억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었다.

나 스스로가 더미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은 분명 이기영의 기억이었으니 말이다.

어디까지나 이기영의 기억으로 더미들의 대사를 해석하는 것뿐이었지만 대략적인 타임라인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어떤 거래가 있었다.

대륙 던전화 사태가 끝난 이후에 방치 상태로 있었던 더미월드의 자원들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그 사실을 인지한 더미들이 이기영에게 계약을 요구했다?

물론 이기영의 머릿속에는 계약을 했다는 기억은 없다. 어느 쪽이 먼저 접촉했는지, 시기가 어땠는지, 정확한 계약 내용이 무엇인지는 당연히 잠겨 있다.

바닷속에서 봤던 기억들을 토대로 정리한 것뿐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댈 수 있는 곳은 그곳에서 얻었던 조각들뿐이었다.

-가지 마. 혜진아.

‘덤혜진도… 이곳에 오게 된 거겠네. 걔가 갑자기 왜 그러나 싶었는데….’

-우리 상황을 타개할 수 있어. 정당한 거래야.

‘진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관리자 없이 많이 버틴 편이지. 그렇게 더미월드가 망가지기 시작했던 거고.’

-성을 다해 간청드리오니 부디 거래해 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거래에 성공했던 거야.’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물론 위화감은 있다.

이기영의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가 더미라고 생각해야 하는 게 무슨 상황인 건지….

어째서 더미기영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인지, 실제로 덤현성과 덤기영, 덤혜진과 덤하얀과 나누었던 대화들 내가 바닷속에서 들었던 그 대화들은 내 감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었다.

더미월드에서 일어난 서사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분명 내가 감당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

어째서 이런 작업을 해놓은 건지는 예상할 수 있었지만 조금 더 명확한 이유가 필요했다. 아마도….

‘돌아오는 건 계약 내용에 없었던 건가.’

지금 꽃기영을 계속해서 제련하고 픽스하는 과정은 꽃기영을 로헨의 관리자로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만약 더미의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덤기영은 분명히 로헨보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선택했을 테니….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덤기영의 기억을 완전히 봉인시켜 놓은 게 아닐까.

“하아… 하아… 흐윽….”

“이기영… 이기영!”

저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꽃기영은 지금 이 순간… 분명히 안심하고 있었다.

‘나. 돌아왔구나.’

“이기영! 이 개자식!”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구나.’

최소한 지금의 이기영에게는 더미월드보다 로헨이 더욱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계속해서 울부짖으며 이쪽을 흔드는 임채령.

날아들어 오는 식물의 줄기를 베어내며 길을 열고 있는 우효열과 윌리엄.

연주하기에 여념이 없는 노담혜와 얼마 남지 않는 신성력을 쥐어 짜내는 남궁선.

파란이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저 멍청이들에게 집착하게 된다.

일종의 패배의식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

덤기영와 더미월드에 관련된 이야기는 알고 있지만 이기영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이상 데이터에게 공감하는 것 따위는 불가능했다.

‘머리 아파. 시발.’

“하아… 하아….”

“부파티장님? 부파티장님!”

“뭐하고 있는 거냐. 이기영!”

‘뭐하고 있긴… 너네 도와주려고 이러고 있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씌워진 빛의 화관.

아직까지 움직이지 힘든 몸을 일으키고 천천히 손을 뻗어 신성력을 일으킨다.

“부파티장님!”

‘사제들한테 경험치 먹일 수 있는 챕터 같은데….’

이대로 가다간 죽도 밥도 안 되겠네.

손끝에서 뻗어져 나간 빛의 꽃잎들이 휘날리며 길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녹아내리고 있는 기괴한 식물들이 비명을 내지른다.

촉수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는 줄기와 수백 개의 이빨을 가지고 있는 꽃들, 봉우리에서 계속해서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들도 순식간에 사그라든다.

“부파티장님… 더 이상은!”

‘나 멀쩡해요.’

“하아… 하아….”

아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계속해서 그 덩치와 개체를 불려가던 식물들의 기세가 일순간 사그라들자 윌리엄과 우효열이 이를 악문 채로 길을 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분명히 엘프여왕 엘레나의 쉼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을 터, 꽃기영이 마지막으로 힘을 보탰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던 만큼 그녀에게 길을 뚫는 것이 마지막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는 끝난 건가.’

아마 엘레나가 잡히고 난 이후에 사제들을 강화시킬 수 있는 보상이 주어질 확률이 높을 테고….

노을빛의 마왕성도 얼마 남지 않게 된다.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다.

‘이제 어쩔 거야.’

“이제… 뭐 어쩌려고….”

‘아마 보고 있었겠지.’

전부 다 지켜봤겠고,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도 잡아놨을 테니….

‘어쩔 거야. 제길.’

악취미 같은 실험도 아마 끝이 났겠지….

‘다시 한번 리셋당하려나.’

그들에게는 쉬운 일이다. 꽃기영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놈들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버그에 가까운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사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든지 이쪽을 지울 수 있는 버튼을 가지고 있으니….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였다.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당신을 향해 비밀 메시지를 보냅니다.]

‘어….’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당신을 바라보며 웃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그곳에서 다시 돌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몇 번째 녀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닷속에 있었던 폐기물 하나는 분명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

‘근데….’

“…….”

‘근데 네가 왜 소년이야. 이 양심 없는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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