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03화
노을빛의 마왕성 (23)
몇 번이나 리셋되는 것을 반복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던 셈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가진 개체가 대부분이었을 터, 대응할 수 있는 수 역시 한정적이었다.
그 와중에도 몇 번째 개체인지 모를 녀석은 최선의 수를 던졌다.
아니, 최선의 수 정도가 아니라 유일한 돌파구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이지혜나 이기영을 제외하면 사실상 더미월드나 시스템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하나였으니 말이다.
‘우리 진 군사밖에 없자너.’
정황상 녀석이 나를 수면 위로 다시 끌어 올리지 않았을까.
휴지통으로 떨어진 것을 비우기 전에 다시금 꺼내왔다는 것이 정설.
단순히 이기영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거나 게임을 하고 싶다거나 하는 이유에 지분이 있겠지만 아마….
‘따로 계약한 부분도 있을 거고….’
취미활동에는 시간을 쓰는 걸 아끼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그렇다고 공짜로 움직이는 것을 즐기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다짜고짜 당신을 머저리라고 모욕합니다.]
‘…….’
마음 같아서는 녀석의 닉네임에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반갑다고 해서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기영이라면 모르겠지만 꽃기영에게 모욕을 당하고 참고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계속해서 입이 근질거리는 중, 지금 당장에라도….
‘진짜로 한마디 해주고 싶다.’
아무리 눈을 속이기 위해 닉네임을 대충 만들었다고 해도 구태여 소년이어야 했을까.
나이 처먹고 자신을 소년이라고 칭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 별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었지만 꽃기영조차 23살이 한계였다.
무리하면 19살까지 내릴 수는 있었지만 그것조차 소년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 도대체 뭐가 이 새끼를 소년으로 만든 것일까.
넘어온 건지 거기에 있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만약 넘어온 게 맞다면….
‘그 과정에서 어려진 건가?’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악마 비자를 타고 온 것이 아니라면 이쪽으로 오는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도 너프를 받았을 테니… 그게 나이라고 생각해도 어색하지는 않다.
‘아무리 그래도….’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당신에게 무례한 생각은 자중하는 게 좋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아둔한 머리로 발버둥 치는 것이 소용이 있을 것인지 묻습니다. 누구를 닮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멍청해서 눈을 뜨고 봐주기가 힘들 정도라고 비웃습니다.]
‘분명히 지랄 떨고 있을 것 같자너. 이미 하고 있자너.’
안 봐도 녀석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진 것은 당연지사.
이쪽이 더미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평소의 이기영과 말하는 것처럼 흥분하며 침을 튀기고 있지는 않겠지만 아마 묘하게 이쪽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지 않을까.
얕잡아 보는 얼굴로 설교하듯이, 모욕적인 발언을 섞어가며 말이다.
원본에게 당한 스트레스라도 풀려고 하는 것인지 점점 점입가경으로 흘러가는 중.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버전의 모습이라 생각하니 더욱더 열이 뻗친다. 이기영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이쪽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뒤통수… 뒤통수가 치고 싶다.’
혹시나 암시를 걸어놓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참기 힘든 욕구. 마치 본능과도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이걸 어떻게….’
그동안은 참아본 적이 없어서 몰랐던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참기 힘들다.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자신은 당신의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재수 없어서.’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자신은 약속을 지켰으며 할 일을 전부 끝냈다고 말합니다.]
‘참을 수가 없자너.’
거래라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재수가 없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
계속해서 호흡을 가다듬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은 지켰다니까.’
녀석이 이쪽을 도와주기로 한 부분은 아마도 두 가지.
첫 번째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쪽을 휴지통에서 꺼내주는 것.
나머지 남은 하나는 아마….
‘뒤를 봐주는 거겠지.’
꽃기영이 활동할 수 있는 활로를 열어주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내가 폐기된 그 녀석이라고 해도 아마 같은 것을 부탁했을 테니까.
제한적으로나마 이기영, 이지혜의 눈을 피하게 해준다는 것.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에게 자동적으로 전달되는 보고서에 혼선을 주는 방식이 될 것 같았다.
진 군사가 먼저 만들어 놓은 로그를 저쪽으로 보낸다든가. 전달할 로그에 금지 단어 같은 것들을 설정해 놓는다든가.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은 더 이상 당신과 대화를 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중얼거립니다. 떠 먹여줄 의무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 이제부터는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주 약간의 자유를 얻은 셈이었다.
기분 탓인지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은 느낌. 사고를 완전히 읽히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선택지가 늘어난다.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이번 한 번뿐이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래. 한 번이면 충분해.’
내가 가면 듀오의 적이라면 한 번으로 부족했겠지만 꽃기영은 그들의 적이 아니다.
처리해야 할 대상이나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단순히 지켜봐야 하는 물건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깊게는 아니지만 파고들 여지가 있다.
그래. 목표를 재정립하자.
단기적인 목표와 장기적인 목표.
가장 처음에 든 생각은 이 몸을 빼앗고 몸의 통제권을 완전히 돌려받는 것이었지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양보를 하고 안 하고를 떠나 도전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이기영은 이기영 자신의 한계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꽃기영에게 이기영이라는 존재는 신이나 다름이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손을 거치며 만들어졌다.
지우고, 복사하고, 삭제하는 것조차 그의 뜻에 달려 있다.
불명확하지만 어느 정도 기준점이 있는… 이 차원을 구성하는 시스템이 있는 것과는 다르게 더미에게는 그런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의 꽃기영은 시스템의 보호조차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한 상태였고….
만들어져 있는 타임라인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제대로만 끝내면 적어도 자치권은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 육체를 그대로 가져가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육체를 가져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미월드가 잠깐 동안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내가 미쳤다고 그 지옥도에 들어가겠냐구.’
덤현성이고 덤혜진이고 기억도 하나도 안 나는데 굳이 거기 가서 같이 개고생을 하겠냐 이 말이야.
이번 일이 잘 끝난다고 해도 그 세계는 완전해지는 게 아니다.
한정된 자원, 본래 일그러진 세계.
본인들끼리 자치권을 가지고 싶다고 주장한 탓에 관리자가 아예 손을 놔버린 것도 큰일.
데이터들끼리 으쌰으쌰 해서 구멍 난 균열을 메우려 노력하기야 하겠지만 결과가 그리 좋지 않으리라는 것 정도는 손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기영, 이지혜 두 가면 듀오의 변덕도 변덕이고….
‘차라리 로헨에서 내 입지를 다져 놓는 게….’
언젠가 기회는 찾아온다.
‘게다가.’
이 모든 게 사기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다. 무게추는 이미 기울였지만 내가 이기영의 분리된 자아라는 끈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어서 문제지.’
덤기영의 자아를 집어넣은 것은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이기영이 구태여 자아를 분리할 이유는 없다.
내가 보고 느낀 게 나를 더미라고 인식한 계기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당위성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아냐. 집착하지 말자.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면 돼.’
때마침 메시지가 들려온다.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마왕성의 저주받은 엘프 여왕이 쓰러집니다.]
“이… 이! 더러운 인간 놈들! 꺄아아아아아아악!”
‘공략했구나.’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메시지가 들려오고 다시 한번 커다란 환호성이 귀에 들어와 꽂혔다.
동시에 정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식물들 역시 풀썩풀썩 주저앉기 시작.
칙칙한 녹색에 가로막혀 있던 숲들은 전부 허물어지고 그제야 이 넓은 부지에 지쳐 쓰러져 있는 원정대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실제로 이번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다.
사제들은 이미 탈진 상태였고… 중상을 입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쳤는지 죽었는지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놈들도 부지기수.
그 지친 몸으로 거침없이 승리의 환호를 내 지르는 녀석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부상자들과 탈진한 이들을 먼저 챙기는 모습이 더욱더 눈에 띄었다.
“포션이라도 먹여!”
“중상자들 빨리 옮겨! 뭣 하고 있어!”
“괜찮을 거야. 다 끝났어.”
‘아직 안 끝났는데.’
“탈진한 사제들부터 옮겨. 아직 신성력이 남아 있는 놈들 있나! 급한 놈들부터! 빨리!”
“이봐! 거기!”
“상처뿐인 승리구먼 제기랄.”
물론 내가 있는 쪽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부파티장님! 부파티장님!!”
아직까지 울부짖고 있는 임채령.
남궁선은 이미 말라버린 신성력을 내 몸에 억지로 밀어 넣고 있었고, 노담혜 역시 치유의 선율을 끊임없이 노래하고 있었다.
이윽고 저주받은 엘프여왕 엘레나를 쓰러뜨리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윌리엄과 우효열도 이곳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상태는… 상태는 어떻습니까! 이기영 님의 상태는….”
“흐윽… 저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이기영… 내 말 들리나? 이기영.”
“정신이 드시는 겁니까? 이기영 님.”
쉽지 않은 전투였는지 녀석들의 몸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둘이 협력하기로 했었나 보네?’
길이 열리자마자 함께 뛰어 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걸 봤어야 했는데.’
일단은 입을 열자.
“…….”
“이기영….”
“네. 저는….”
힘겹게 웃으며 꺼낸 대사.
“하아… 하아… 네. 효열 씨는….”
“이기영 님….”
그러고 보니 나 죽어가는 중이었지.
‘진짜 전설적인 싸움처럼 보였겠네.’
저번과는 다소 반응이 다르다. 꽤 침착했던 우효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게다가.
‘너 울어?’
윌리엄은 눈물을 감출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쥐똥만 한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저는… 하아… 저는 괜찮아요.”
분명히 승리했지만 승리한 분위기가 아니다.
“저는 괜찮다고 말씀드렸어요. 모두….”
“…….”
“가슴을 펴세요. 눈물을 보이지 마세요.”
“…….”
“승전이에요. 원정대원들에게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전하세요.”
“흐윽… 흐으윽….”
“울지… 마세요.”
“흐끄윽….”
“승전… 승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