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206화 (1,20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06화

노을빛의 마왕성 (26)

[노을빛의 군주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노을빛의 군주가 희생과 부활의 신을 애타게 찾으며 그의 적들을 멸하고자 합니다.]

‘어떻게 하지.’

이건 어떻게 해야 좋은 거지?

“저… 길드마스터! 길드마스터!”

“…….”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길드마스터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게 당연했다.

계속해서 조용히만 앉아 있던 길드 마스터가 별안간 몸을 일으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사실 길드 마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던 평소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까지 막내의 꼬리표가 지워지지 않은 현시점에서 자신이 무엇이라고 길드마스터의 행동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는가.

비밀리에 받은 임무가 아니었다면 길드마스터의 행보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최대한 막으라고 하셨어.’

물론 막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설득하라는 게 올바른 표현.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일단을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

“아직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된다고….”

“…….”

“아마 밖으로 나가시면 페널티를 받으실 거라고… 하… 하셨어요. 길… 길드마스터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군… 군주로서 로헨에 소환된 것이기 때문에… 신성이 전부 모이기 전까지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아마 페널티를 받으실… 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

“저희 대륙에 27군단이 소환됐을 당시에도 27군단장은 소환장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들… 들었는데. 지금 상태로 나가시면 역소환 되실 가능성도… 이곳에서 가만히 계시는 게 힘드시겠지만… 다른 길드원분들도 열심히 하시고 계시니까… 조금만 더 참으시면….”

“…….”

“저. 길드마스터… 길드마스터!”

‘어떻게… 말리라는 거야.’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허리까지 내려온 긴 머리는 관리하지 않은 지 오래, 핏발이 선 눈동자에서는 살기가 느껴진다.

저게 정말 자신이 알고 있던 파란 길드마스터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솔직히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선희영 님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길드마스터가 미쳐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길드마스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아직까지 정확한 결론이 내려지지는 않았다.

사실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자신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배들의 몫이었으니까.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일단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구석에서 떨고 있는 흰둥이를 뒤로하고 서둘러 문 앞으로 다가가 길드마스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자.

“조금만 더 기다리시라고 하셨어요. 길, 길드마스터.”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누구 지시입니까.”

“네?”

“…….”

“…….”

“그 지시를 내린 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그러니까. 선희…영 님이랑… 김….”

“당신은 누구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습니까.”

“저… 저는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의 명령을….”

“…….”

“…….”

“그럼 비켜.”

“아….”

순간적으로 살기가 몸을 옥죄는 것이 느껴진다. 감히 반항할 수 없는 무언가가 몸을 휘감고 있다.

마치 권능과도 같은 공포와 두려움이 계속해서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설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지경.

“왕!”

하는 소리와 함께 흰둥이의 목소리가 들려와 굳었던 몸이 조금이나마 풀어졌지만 말 그대로 조금이었을 뿐이었다.

오돌오돌 떠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

무슨 용기가 생겨 길드마스터의 앞을 막아선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

그렇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길드마스터가 다시 한번 한 발자국을 내디뎠을 때였다.

“부길드마스터의 뜻입니다.”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인형 하나가 시야에 비쳐온다.

‘창렬 선배님.’

전형적인 암살자들이 입는 복장에 언제나 그렇듯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 바로 윗기수인 김창렬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드마스터가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정말로 길드마스터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면 자신만 이곳에 놔둘 리 없었을 테니까.

“살기가 너무 짙으십니다. 길드마스터.”

“…….”

“…….”

“방금 기영 씨의 명령이라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네.”

“창렬 씨가 말하는 기영 씨가 밖에 있는 가짜를 칭하는 것이 맞습니까?”

“…….”

“아무 대답이 없다는 건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겁니까? 혹시. 제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신 겁니까?”

“…….”

“분명히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 여기 와 있는 건 가짜라고 말입니다.”

“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는 가짜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억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선희영 님이나 정하얀 님도 부길드마스터에 대해서….”

“영혼이 다르다고 말했잖아! 제기랄!”

“…….”

“지금… 지금 제 판단을 의심하는 겁니까? 가짜라고! 제기랄! 바깥에 있는 건 진짜 기영 씨가 아니란 말야. 기영 씨의 탈을 쓴 무언가라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내가! 내가!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내가 기영 씨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도대체 왜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씨발!”

“길드마스터.”

“연결이 끊어졌단 말입니다! 연결이 끊어졌다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이라고 몇 번을 이야기하고… 제길! 그것 때문이었습니까? 그것 때문에 저를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겁니까? 내 말을 믿지 못해서 이런 시답지 않은 수작까지 부리면서 저를 여기에 가둬놓은 겁니까?!”

“저희가 어떻게 길드마스터를 가둬놓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아마 옥좌를 벗어나시면 어떤 식으로든 페널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곧바로 역소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부길드마스터를 아끼신다면 그들이 이곳에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최선입니다. 그게 아니면 저희들을 믿어주시는 게….”

“뭘 믿으란 말입니까! 도대체! 내 말을 믿지도 않으면서 뭘 믿으라는 거냐고! 말해보세요! 제기랄. 제가 뭘 믿어야 합니까? 누굴 믿어야 합니까. 김예리? 선희영? 전부 다 그 가짜한테 휘둘리고 있는데 제가 무엇을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

“…….”

“역소환? 역소환!? 그게 무서웠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로헨을 전부 때려 부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다시 찾아올 겁니다. 기영 씨를 찾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요. 일단 이곳에 찾아온 그 개자식들을 머리를 전부 부수고.”

“많이 흥분하셨습니다. 길드마스터.”

“뭐?”

“조금 진정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심적으로 많이 지치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시고 달려오시지 않았습니까. 전 21군단장과의 전투도 아직 회복하지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부길드마스터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에 최선을 다할 테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저희를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후우….”

조금은 진정한 것 같으시다면 기분 탓일까. 크게 한숨을 들이쉬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 것처럼 느껴진다. 변화가 느껴진 것은 창렬 선배가 다시 한번 말을 이었을 때였다.

“부길드마스터께서도 이런 길드마스터의 모습을 보신다면 많이 슬퍼하실 겁니다.”

“기영 씨는….”

“…….”

“기영 씨는 제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길드마스터.”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가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고… 매일 매일 두려움에 떨면서도… 언젠가 제가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고 믿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제기랄….”

“길드마스터….”

“대답해 보세요. 제가 이곳에서 편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기영 씨는 계속해서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고! 이제는 지쳤습니다. 제길. 기다리는 것에도 계속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도… 마치 내가 미친 것마냥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마음에 안 들어.”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광증에 시달리고 있거나 심신미약으로 아무 말이나 내뱉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이기영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내 눈에는 너희들이 단체로 미친 것처럼 보인다고… 제길! 사과도…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사과도 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어째서 기영 씨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거야! 씨발! 이 거지 같은 곳은 왜 기영 씨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거냐고. 제길! 전부 다 치워 버려야 돼. 전부….”

대기가 떨려온다.

마왕성 전체가 요동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내 다시금 조용히 침묵한다.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

“비키세요. 명령입니다.”

“길드마스터.”

“계속해서 제 앞을 막는다면 약속컨대… 창렬 씨를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

“…….”

“죄송합니다.”

“뭐?”

“길드마스터를 위해서도 부길드마스터를 위해서도… 지금은 비켜드릴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길드마스터가….”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마치 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에 몸을 움찔 떨었을 때도 길드마스터가 내지른 손등이 창렬 선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가까스로 창렬 선배가 팔을 드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린다.

“선… 선배님!”

그것으로도 모자라 벽으로 튕겨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제대로 잡을 수 없을 정도.

단 일 수. 심지어 제대로 내지른 일격도 아니었다. 단 일 수에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창렬 선배에 모습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비명도 내지르지 않은 채로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지금 이건 제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길드마스터의 팔에 길다란 침 같은 것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서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었지. 창렬 선배는 입 안에 암기를 숨기고 다닌다고.’

“대답하세요. 이걸 쿠데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열리지 않을 것 같은 문이 열리며 다시 한번 익숙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길드마스터. 하지만… 이대로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선희영 님.’

“형씨. 이건 너무 나갔다는 생각은 안 드오? 우리라고 형님이 걱정되지 않는 게 아니요.”

‘덕구 선배.’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저희 마음을 헤아려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길드마스터께서는 정상적이지 않아요. 명백하게 심마에 사로잡혀 있으세요. 부길드마스터가 가짜이냐 진짜이냐에 대한 여부와는 상관없이 휴식이 필요해요.”

‘엘레나 님.’

“오빠. 정신 차려. 이런 거… 오빠답지 않아. 기영이 오빠도….”

‘김예리 님.’

전투 불능이 된 창렬 선배의 몸이 시간이라도 되돌린 것처럼 순식간에 회복된다.

박리안 님은 그런 선배를 부축하고 있었고 자신과 가장 비슷한 상황에 놓인 벨리에 역시 불안한 얼굴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연 선배가 벌써부터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무서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길드마스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제기랄.”

어째서인지 길드마스터의 모습이 굉장히 슬퍼 보였다. 마치 궁지에 몰린 것처럼 말이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