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207화 (1,20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07화

노을빛의 마왕성 (27)

필멸자들에게는 천재지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말 그대로 신의 변덕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셈이었다.

[노을빛의 군주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노을빛의 군주가 희생과 부활의 신을 애타게 찾으며 그의 적들을 멸하고자 합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윌리엄과 우효열의 대련이 끝나고 조금 더 지났을 때였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둘 모두와 연결되는 것을 시험해 보려고 했던 타이밍.

캠프에서 휴식을 취하려 했던 병력들에게도 당황스러운 소식이었고, 이미 깔려 놓은 타임라인을 밟아가던 내게는 더 황당한 소식이었다.

별것 아닐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보통 대륙에 떨어진 초월자들이 특정 행동을 할 때면 시스템이 메시지를 뿌린다.

초월자들의 날갯짓 한 번에 영향을 받을 필멸자들을 위한 재난 문자 같은 장치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더욱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시스템은 별것 아닌 일에까지 경고를 보내지 않는다.

노을빛의 군주가 정말로, 그저 단순히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거나 희생과 부활의 신의 적들을 멸하려고 혼잣말하는 게 재난 문자로 오지는 않는다는 거다.

저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는 건 노을빛의 군주가 행동을 시작했다는 의미가 된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고, 적들을 멸하고자 함이 다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치환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걸 모를 수가 있을까.

‘시바.’

방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캠프에서는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뭐야. 갑자기.”

“갑자기 던전이 왜 이래?”

금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모습이 보인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사제들은 아직 회복 중인데. 분명히 삼 분의 일 정도만 움직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어차피 개미들이 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다.

땀을 닦고 있는 윌리엄과 우효열도, 세부사항을 논의하던 지휘본부의 인원들도,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의 인원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내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마왕성에 내부에서 커다란 폭음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직후.

“뭐야! 씨발! 뭐야!”

“으아아아악! 씨발!”

마왕성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바보가 아니라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노을이 가라앉은 성에 악의와 분노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시바!’

시나리오가 꼬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정확히 위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획이 틀어진 것만은 확실했다. 아니, 계획은 재난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틀어져 있었다.

‘뭐가 어디서부터….’

윌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다시 한번 커다란 폭음이 울린 때였다.

“이기영 님.”

“이건….”

“아무래도 변수가 생긴 것 같아요.”

“변수 말입니까.”

“네. 저도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을빛의 군주가 움직인 것 같아요.”

“던전 보스가….”

“특수한 상황이에요. 보통 던전 보스는 보스 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악마 21군단의 둥지니까요. 그에게도 도박이겠지만… 아군에게 좋은 소식은 아니에요. 페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움직이겠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페널티 말입니까?”

시스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두고 설명하자니….

“21군단이 소환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해요. 노을빛의 군주가 그간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것도 그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고요. 다른 악마들도 마찬가지지만 군단장 같은 경우에는 사용하는 비용의 규모도 당연히 달라요.”

“…….”

“초월적인 존재가 대륙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가 페널티에 페널티를 안고 있는 셈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그건… 아군에게는 유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습니까?”

‘무슨 개소리야. 이건.’

조금 성장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너님들 각각 1분 컷이세요.

‘어쩌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는데 크게 차이는 없어요.’

몇 걸음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적어도 김현성과 대화라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스펙까지 정말로 몇 걸음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극단적인 예지만 10 대 0과 10 대 1은 엄연히 다르다.

적어도 1로 올라와야 김현성과 대화라도 나눌 수 있게 되는 셈.

우효열과 윌리엄은 아직 최소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다.

박기리 삼 남매를 통해 스펙 업을 한다면 딱 그 최소 조건이 맞춰질 거라 생각했지만…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재미있군. 안 그래도 슬슬 던전이 지겨워지던 차였다. 스스로 페널티를 받으며 나온다는 멍청이를 구태여 피할 필요가 있나?”

‘이 새끼 제정신 아닌가 봐. 네가 현성이를 못 봐서 그래요. 따귀 한 방에 머리 으깨지고 싶어서 환장하셨나 봐.’

“놈은 어디 있지? 알고 있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쩌면 잘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자가 움직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한다면 분명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우효열과 윌리엄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전의를 불태우는 중, 어째서인지는 대충 이해할 수 있겠지만 번지수를 잘못 잡고 있었다.

“불가능해요. 절대로. 지금은 절대로 이길 수 없어요.”

“전투에 절대라는 것은 없어.”

“우효열 씨의 말이 맞습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입니다.”

“특히나 상대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머저리라면 더더욱.”

‘너네 이러라고 친해지라고 한 거 아닌데….’

“이 경우에는 있어요. 그리고 노을빛의 군주는 결코 머저리가 아니에요. 다만… 무언가 그를 급하게 만든 이유가 있을 거예요. 두 분이 강하신 건 알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최소 기준점을 통과하는 게 첫 번째예요.”

“그건….”

“스펙 업이요. 뭐가 됐든 좋아요. 코인이 됐든… 게니우스에게 힘을 받든… 상관없어요. 적어도 계단을 하나는 더 오르셔야 해요. 아니, 반 계단이라도….”

“그건….”

‘장비 쪽에서는 더 이상 건드릴 게 없어.’

외부적으로는 스펙 업을 할 구멍이 없다.

“이기영 님.”

“지금 당장 움직이겠어요. 떠날 채비를….”

“네?”

“일단은 이곳에서 벗어납니다. 생각하는 건 그다음이에요.”

“…….”

‘무슨 피난민들 보는 것 같자너.’

“캠프는 버립니다.”

“그건….”

“전부 정리할 여유가 없어요. 챙길 수 있는 보급품만 챙기고….”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움직여! 움직여!”

“캠프는 버린다! 들고 움직일 수 있는 것만 들고 후딱 튀어라, 이 새끼들아!”

“거기! 무장했으면 움직여야지 지금 뭘 하고 있나요! 당장 움직이세요!”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와 지휘본부가 곧바로 이쪽의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도망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도망치는 게 아니에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 자만과 자신감은 분명한 차이가 있어요. 효열 씨.”

“나는 단지.”

“이곳의 지휘관은 저예요.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저는 최선의 상태로 노을빛의 군주를 맞이하고 싶어요. 허무하게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아요. 최대한 승률을 높여도 모자란 싸움이에요.”

“…….”

“저는 이 싸움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 제 말에 집중해 주셨으면 해요.”

그제야 입을 닥치고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들이 눈에 띄었다.

“이기영 님. 목적지는 어디로….”

나도 몰라 이 새끼야.

콰아아아아아아앙!! 울리는 폭음이 다시 한번 들려온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던 것은 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는 것.

일정한 장소에서 계속해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아마….

‘막고 있구나.’

정황상 파란 길드가 김현성의 출진을 막아서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정황상 그렇게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김현성이 광증에 시달리고 있다거나 진짜가 아니라는 씨앗을 심어뒀으니 녀석의 출진이 내게 위협이 됐을 거라 판단했을 것이다.

‘나쁘지는 않지만… 좋은 상황은 또 아니야.’

박덕구, 안기모, 김예리를 빼고 게임이 될 리 만무.

경험치를 줘야 할 보스 몬스터가 자리를 비웠으니 윌리엄과 우효열의 경험치를 먹일 방법이 없다. 최대한 빠르게 올라가서 후다닥 경험치를 얻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럼….

선희영, 김예리, 박덕구, 김창렬, 황정연, 안기모, 엘레나.

구성은 이게 끝인가?

얼마나 버텨줄 수 있지?

조혜진이라도 있었으면… 아니, 하얀이라도 합류해 있었으면 괜찮았을 텐데.

냉정하게 거기서 믿을 수 있는 건 선희영뿐이다.

우리 돼지 새끼도 처맞는 데에는 조예가 있으니 어느 정도 버텨주기야 하겠지만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수단이 적다.

김현성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때리기만 하는 셈.

냉정하게 말해 한 시간을 버티면 잘 버틴 셈이었다.

벨리에나 알프스는 사실상 전력 외다. 둘이 전위가 아니라면 그나마 해볼 만했겠지만 어설프게 덤벼드는 것은 오히려 파티의 균형을 깰 확률이 높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정하얀이 이쪽에 붙었다는 것.

‘시간이라도 끌어볼까.’

아냐. 의미가 없어. 만약 운이 좋아서 녀석이 역소환된다고 해도….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어쩌면 그것보다 더 길게? 그 정도를 버틸 여력이 없어. 마냥 버티는 건 불가능해. 다른 무엇보다….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이기영이 상정하고 있지 않았던 수잖아.

로헨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김현성에게 대항하는 걸 포기 한다는 건 로헨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름없는데.

이기영에게 로헨이 스스로 발전할 수 없다고 광고하는 꼴 아니야?

‘꽃기영이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마치지 못하는 셈이야.’

“이기영 님.”

‘시바. 이거….’

“저… 이기영 님.”

“언제든지 전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네.”

“전투준비 태세! 전투준비 태세!”

“전투준비! 빨리빨리 안 움직여! 이 새끼들아! 전투준비 하라고!”

“제기랄.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내가 알면 이러고 있겠어? 무조건 전투준비 태세라고….”

“말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래, 너네 당황스러운 것도 이해해. 시바. 나도 당황스러우니까.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당신을 바라보며 멍청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만 거슬리게 해. 이 새끼야.’

“일단 병력을 뒤로 빼….”

라고 말하던 바로 그때였다.

콰드드드드드드득!!!

쿠우우우우우우우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을빛의 날개를 빛내며 흉신악살이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인다.

‘벌써 당했을 리는 없는데.’

“아….”

‘전투를 피한 건가?’

“아아….”

할 말을 잃은 듯이 그걸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머저리들의 모습 뒤로 노을빛의 군주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이질적 비쳤기 때문에 나조차도 잠깐 녀석을 정말 신 같다고 느껴 버릴 정도였다.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