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10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3)
제길.
‘뒤를… 뒤를 부탁드려요.’
제기랄.
‘마지막 부탁이에요.’
쾅 하고 바닥을 내려칠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이 멍청한 자식! 제길! 도대체 뭘 지켜? 네까짓 놈이… 어떻게….”
“윌리엄 님.”
“이 아무것도 모르는 놈… 이 멍청한 새끼….”
속으로 차오르는 화를 억누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절대로 이기영 님을 죽게 만들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한 맹세가 허무하리만큼 쉽게 사라져 버렸다.
아니, 오히려 도움을 받았다. 이 쓸모없는 몸뚱이를 고사하고자 그에게 다시 한번 빚을 졌다.
강해졌다고, 그 어떤 적이 찾아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따위는 노을빛의 군주를 본 순간 무너져 내렸다.
아마 우효열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인간의 시선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는 아득한 강함. 초월자가 어째서 초월자인지, 그들이 어째서 필멸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는지, 어째서 이기영 님께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인지 깨닫지 못할 리 만무했다.
‘움직이지도 못했어.’
그 악마를 본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꿈에서 본 악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공포에 휩싸였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자신은 분명 몇백 번이 넘는 죽음을 경험했다. 그 짧은 시간에 말이다.
‘만약 움직일 수 있었다면.’
대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에게 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이 있었다면?
멍청하게 멍하니 노을빛의 악마를 바라보고 있지 않고, 상황을 분석하거나 이기영 님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면?
모두가 목이 터져라 공격이라는 소리를 외쳤을 때 그의 곁으로 한 발자국을 더 움직였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최소한 그가 이쪽을 내보내기 위해 마동력위치전환기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병력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꽃과 풍요의 성자 최후의 최후까지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것은 아마 우효열과 자신이었을 테니까.
멍청하게 서 있었던 탓에 그가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시간을 벌려고 한 것이다.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모든 건 내가 약했기 때문에….
“으아아아아아아아!!!”
쾅쾅하고 바닥을 손으로 내려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손이 터져라 주먹을 쥐었지만 전혀 고통스럽지 않다.
계속해서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조용히 웃으며 뒤를 부탁한다고 말하는 얼굴, 확신을 가지고 마지막을 부탁한다는 모습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입에 담았던 것인지,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인지, 자신은 아마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는 분명히 윌리엄이라는 사람을 믿고 있었다. 실수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바보처럼… 멍청이마냥 굳어 있었던 자신을 향해 의심 없는 믿음을 보내고 있었다.
“뭐가 로헨의 검술 천재냐고… 제길… 도대체 뭐가….”
“윌리엄 님.”
“으아아아아아!!! 제길…!!! 이 멍청한 새끼!!! 이 병신 같은 새끼!!!”
“윌리엄 님!”
“…….”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윌리엄 님.”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란 말입니까!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몰라. 이 멍청한 놈들은 이기영 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그가 어째서 이곳에 왔는지, 홀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한 건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말해보십시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라는 겁니까! 어떻게 진정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에밀리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놈들은….’
“꽃과 풍요의 성자가 어떤 심정으로 우리를 대피시켰는지 알고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의 인원들을 바라봤을 때였다.
에밀리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
“…….”
그녀뿐만이 아니다.
“…….”
침통하다 못해 표정을 구기고 있는 패밀리아 모두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꽃과 풍요의 막내인 밀로에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오열하고 있다. 그녀를 위로해 주고 있는 론다 데이지 또한 그녀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흐윽… 흐으어아아아앙… 꼭… 맑은 하늘을… 맑은 하늘을 같이 보자고 약속했었는데… 흐윽… 흐으으윽… 성자님이 꼭… 그렇게 하자고 하셨는데….”
하는 침통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제야 꽃과 풍요의 막내인 밀로에가 이기영 님과 함께 간혹 시간을 보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간혹 함께 차를 마시거나 꽃과 풍요의 여신님을 위한 기도회를 열기도 했었지.
아마 그녀는 이기영 님을 무척 따르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보지 못했을 뿐… 그녀의 눈은 언제나 꽃과 풍요의 성자를 좇고 있었다.
론다 데이지 또한 마찬가지 였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간혹 수행원으로 차출된 그녀는 그와 함께 여러 가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씨발! 씨발!!”
다소 거친 욕을 내뱉으며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부수고 있는 저 녀석, 미구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패밀리아 중 흔하지 않게 아헨델의 뒷골목에서 인연이 닿은 녀석, 패밀리아 하우스로 들어온 뒤로 욕을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던 녀석이었는데….
녀석 역시 작은 술자리에서 이기영 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함께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미구엘도 이기영 님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이기영 님이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로 들어온 이후로 그의 눈은 조금 더 깊어져 있었고 가지고 있었던 편집증 역시 상태가 호전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버림받은 성녀와의 전투에서 그에게 목숨을 빚진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꽃과 풍요의 성자를 경호했던 이들도, 따로 시간을 보냈던 이들도, 여러 가지로 그에게 은혜를 받은 이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슬퍼하고 있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그는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이나 패밀리아의 모두에 가슴 속에 틀어박혔다.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에밀리아도 항상 타인을 쌀쌀맞게 대하던 파발로냐도, 이기영 님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던 이들까지도 모두가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
“…….”
“윌리엄 님.”
그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이기영 님이 자신에게 원하는 모습은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다.
“분명히 살아계실 겁니다. 윌리엄 님. 이기영 님이시라면 분명히….”
“네. 저도…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아니… 믿을 겁니다.”
“구출대를 보낼 겁니까? 대장?”
“당연합니다. 미구엘.”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래서는 안 돼요. 윌리엄 님. 그건….”
“그게 무슨 소리지? 에밀리아?”
“어째서 이기영 님이 저희들을 이곳으로 보내셨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이유 따위보다는….”
“일단 이곳이 어디인지, 어째서 꽃과 풍요의 성자님께서 우리들을 이곳에 보내셨는지 파악하는 게 먼저입니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아까 전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길을 잃거나….”
“에밀리아 너… 지금 성자님을 그곳에 홀로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콰앙!
“너.”
“그만하십시오. 미구엘. 지금은 가족들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밀리에, 론다 데이지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살기를 거두십시오.”
에밀리아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것이 맞다.
그가 허투루 일을 진행할 리가 없었다. 마왕성 밖이 아닌 이곳으로 자신들을 이동시킨 것도, 우효열 파티와 함께가 아니라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만 따로 이동시킨 것도 모두 뜻이 있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으니까.
당연히 그가 미래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꽃과 풍요의 성자는 모든 것을 가정한다.
일반인들이 볼 수 없는 수많은 정보들을 취합하고 분석하고 받아들이며 도출할 수 있는 가장 옳은 미래를 안내한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주 작은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모두 미래의 자신들에게는 최선의 수로 다가온다.
실제로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를 이곳에 보낸 이유 역시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가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분명히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가 해줘야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문제는 꽃과 풍요의 성자가 그리는 미래에 그 자신의 미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 모든 것이 그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제길.’
그의 뜻을 반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그의 뜻을 존중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금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지?’
높은 확률로 전멸당할 확률이 높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처럼 쓸려 나가는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는다.
갑작스레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이 좋을 거라 조언합니다.]
‘여신님.’
[꽃과 풍요의 여신이 자신의 성자가 아직 느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은 나의 자식들을 전적으로 믿으며 꼭 그를 구해낼 것을, 그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게 할 것을, 그가 다시금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할 것을 종용합니다.]
‘살아 있는 거야.’
[꽃과 풍요의 여신이 자신의 성자를 구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자 합니다. 어떠한 결과가 있더라도 이 싸움을 마지막까지 지켜볼 것이라 다짐합니다.]
길은 정해졌다.
“돌아가지 않습니다.”
“대장.”
“지금 당장은.”
“…….”
“꽃과 풍요는 절대로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게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고 한들, 우리가 이기영 님을 구하러 가지 않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
“하지만 동시에 저는 분명히 이기영님께서 이곳으로 저희를 안내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장! 지금!”
“여신님의 전언이었습니다.”
“네?”
“네… 여… 여신님이 직접….”
“이게 얼마 만에….”
“성자가 아직 느껴지고 있으니 그의 뜻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그를 구하고, 그를 상처받지 않게 하며, 그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을 종용하셨습니다. 분명 그에 대한 안배도….”
“성자님께서!”
“이기영 님이 무사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은… 무사합니다.”
쿵! 쿵!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
“이기영 님께서… 어째서 저희를 이 곳으로 보낸 것인지도 대충 알 것 같군요.”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에 띄는 것은 거구의 남자였다.
커다란 방패를 들고, 거대한 갑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인형.
방패를 드는 것 조차 힘들어 보이는 전사.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또 옮기고 있지만 눈이 살아 있는 것이 보인다.
[노을빛의 마왕성의 상처 입은 암흑 방패 수문장과 조우합니다.]
[노을빛의 마왕성의 상처 입은 피에 미친 성전사와 조우합니다.]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내가 판단해 주겠다니까.”
“후우…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조금… 어울려 드리도록 하죠.”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쿠웅!
하는 소리와 거대한 방패를 내려놓은 전사가 중얼거렸다.
“덤벼.”
* * *
“우리는 바로 향한다.”
“네?”
“노을빛의 군주를 죽인다. 그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하지만… 효열 오빠!”
“물론 녀석이 우리를 이쪽으로 보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놈의 생각이다.”
“네?”
“내가 굳이 녀석의 계획을 따라줘야 하는 의무는 없지. 그 자식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오빠… 잠깐….”
[노을빛의 마왕성, 상처 입은 서큐버스 여왕 매혹의 예리엘과 조우합니다.]
“이 나를 넘어설 수 있다면.”
“…….”
“그에게 돌아가셔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