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212화 (1,21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12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5)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유영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돼.’

집착, 아니, 주박이나 저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성적으로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라는 것은 이미 깨닫고 있었다.

어째서 그 지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인지, 어떠한 당위성이나 논리적인 이유도 없다.

무조건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나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돼. 돌아가야 돼.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시점.

저도 모르게 곧바로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금 자리에 앉는다. 지금 움직이는 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이기영과 했던 계약을 완료하는 것, 목적이 달라졌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됐건 간에 이 마왕성을 깔끔하게 클리어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남은 뒤처리는 그 이후였다.

자연스럽게 우효열과 윌리엄에 대한 생각까지 닿게 된다. 실상 그 둘이 이번 이벤트에 가장 중요한 패요, 가장 중요한 배역이었으니까.

두 명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그 둘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올 수 있을지에 따라 방향성이 달라진다.

아마 지금쯤 서큐버스 여왕이나 암흑 방패 수문장과 조우해 전투를 벌이고 있지 않을까.

‘전투는 금방 끝날 텐데.’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은 김예리나 박덕구 역시 알고 있다.

김현성에 의해 상처까지 입은 상태일 테니 레이드는 비교적 약식으로 진행될 터.

어떤 식으로든 결국에 공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다.

공략으로 얻을 수 있는 스펙도 스펙이지만 그 외 부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경험치도 중요하다 판단할 테니 지도하는 듯한 느낌이 날 수도 있겠지.

윌리엄에게는 피에 미친 성전사와, 암흑방패 수문장의 방패를 뚫을 수 있는 공격력을.

우효열에게는 서큐버스 여왕을 쫓아갈 수 있는 속도를, 아니, 최소한 자신보다 빠른 속도를 가진 상대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필요가 있었다.

사실상 전투 지휘는 이쪽에서 전투 맡을 테니 그런 경험치들이 구태여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머릿속에서도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시간을 벌었으니 얻을 수 있는 것은 전부 얻어가는 게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생각하는 것보다는 행동하는 것이 더 빠르다.

망원경도 없고, 정하얀도 아네모네의 눈을 깔아 줄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지만 이쪽은 이미 우효열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윌리엄은 이 새끼는 가능한가?’

못 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기동하는 것은 짭사설이었고 찐사설처럼 많은 조건으로 많은 기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회귀자 사용설명서라고 부를 수 없을 테지만….’

신화 등급의 스킬이 아니다. 영혼이 연결되어 모든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거나, 김현성만을 위해 만들어졌다거나 하는 거창한 것을 가지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고, 시야를 확인할 수 있으면 그만 구태여 쌍방이 아니어도 좋다.

오감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히 사치. 기왕이면 촉각 정도는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스킬은 개량하면 돼.’

애초 이기영 몸에 심은 스킬이 개량된 스킬일 것이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회귀자 사용설명서나 망원경, 신화 등급에 이른 연금술 능력 같은 것들은 전부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 각인되어 있는 고유 특성일 테니 이쪽에 그대로 심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신화 등급, 준신화 등급, 소위 말하는 대륙의 질서나 벨런스를 파괴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에는 시스템의 규제나 허락이 필요로 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날치기로 통과가 가능하다.

게니우스라는 놈을 이 스킬이나 직업을 만들 때처럼….

녀석이라면 분명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데….”

“…….”

“나랑 계약 하나만 더 해요. 코인은 많으니까.”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당신의 게니우스가 되고자 합니다.]

[게니우스를 변경하시겠습니까?]

“네.”

[6레벨 직업 모방꾼이 개방됩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을 게니우스로 삼았을 때와는 다르게 커다란 이펙트는 없었다.

몸에 가득 들어서 있는 신성력도 천천히 사그라드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꽃과 풍요의 성자의 스킬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시야에 커다란 체스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고유스킬 체스 게임이 발동됩니다.]

‘아니, 이딴 거 주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은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두 개의 말.

룩 하나를 손으로 잡는 순간,

-으아아아아아!

-호오오오홋홋홋! 이 매혹의 예리엘을 상대로 그런 공격이 통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만년은 이르답니다.

우효열과 잠깐이나마 연결된다.

‘괜찮네.’

방법은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최소한 내가 원하는 걸 얻은 셈이었다.

한쪽은 우효열의 말일 테니 한쪽은 윌리엄의 말일 터.

우효 녀석의 말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윌리엄의 말을 들어 올린 순간 또 다른 목소리와 풍경이 들어왔다.

체스판은 마치 둘의 전장을 직접 옮겨놓은 듯했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이지만 윌리엄을 비롯한 꽃과 풍요와 박덕구와 안기모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공간을 축소해 평면으로 만들어 놓은 듯했다.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 보드도 금방 적응할 수 있겠지.

마법을 비롯한 원거리 공격을 간지럼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막고 있는 암흑 방패 수문장과 그런 녀석을 보조해가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피에 미친 성전사.

항상 같이 다니는 만큼 팀워크에 군더더기가 없다.

안기모 녀석은 얄미울 정도로 본인에게 주어진 커다란 벽을 잘 활용한다.

본인 선에서 흘릴 수 있는 공격은 막거나 흘리고,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공격은 박덕구에게 맡긴다.

-달구나. 너희들의 피! 너무나 달아!

저 대사만 아니었어도 조금 더 보기 편했겠지.

-으아아아악!

-제길….

-지금 뭐 하고 있는 거냐니깐. 이 정도도 감당 못 하면 안 된다니까!

-크…하하핫. 크하하하하하하하! 하아하하하하하하하!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저 캐릭터를 놓지 못하는 것일까.

이 새끼들의 정신상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필사적이다. 이 역할극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역할이 잘못되었다는 것밖에는 없다.

-이야아아아아!!

피에 미친 성전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윌리엄이 녀석을 막는다.

팀워크라면 이쪽도 나쁘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고함을 내지르는 암흑 방패 수문장의 외침에는 디버프가 섞여 있다.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고 몸에는 힘이 빠지고 있을 게 당연했다. 전형적으로 말려죽이기를 하려는 것을 보면 현재 상황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가면 갈수록 본인들이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리라.

윌리엄과 꽃과 풍요 역시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주사위를 던지지 않으면 무난하게 지는 그림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게 쉽지는 않을 거야.’

이 새끼는 뇌가 굳어 있었다.

-피를! 더 많은 피를! 이곳에 피의 축제를!

-경거망동하지 마쇼. 성전사. 녀석들… 아직 눈빛이 죽지 않았다니까.

-크큭. 크크크크큭. 걱정이 많은 거 아닌가 수문장? 저 필멸자들이 무엇이 두렵다고… 하찮은 녀석들이다.

-여기까지 올라온 놈들이요.

-요행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곳에 있는 다른 놈들이 무능했을 뿐이다. 크큭. 아아… 아아아아! 이게 얼마 만의 신선한 혈액이란 말인가! 겁먹어라! 더욱더 나를 두려워해라! 그만큼 네놈들의 피가 더 달콤해지겠지!

‘아 근데 진짜 안기모 저 새끼 못 보겠다.

물론 다른 쪽이라고 해도 보기 편한 것은 아니었다.

-호오호호홋! 제 매혹의 춤을 견딜 수 있을까요?

-…….

-이 아름다운 나를 보지 않고 어떻게 싸울 생각이실까?

-…….

-흐응… 조금은 여흥거리가 되었을 거라 기대했는데… 겨우 이 정도라니… 실망이 크네요. 이래서 어떻게 노을빛의 군주를 상대할 수 있을지… 조금이나마 당신들한테 기대를 했던 제가 바보처럼 느껴지네요.

-당장 꺼져라.

-네?

-나는 이런 곳에서 허우적거릴 시간이 없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그럼 목숨은 부지하게 해주마.

-호오호홋홋! 허세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하군요. 상처 입은 나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하는 당신이… 당신이? 이 서큐버스 여왕 매혹의 예리엘을? 웃기지 마! 이 더러운 벌레가! 지금 당장에라도 네놈의 목을 분질러 버리지 않은 걸 감사하게 여겨라!

-꺼지라고 말했다!

우효 녀석이 허세에 찬 외침 이후에 곧바로 돌진하는 것이 보인다.

미리 이빨을 털어놓은 게 부끄럽지 않게 슬슬 밀어 붙여주면 좋으련만 그게 쉽지는 않은 모양.

그야 기믹이 워낙 까다롭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매혹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효열 파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빠른 상대일진대,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제대로 레이드가 진행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얘네들 이거 괜찮을까?’

이래서야 김현성 이길 수 있나?

대신 변명해 보자면 제대로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기는 했다.

윌리엄이나 우효열이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특히나 우효열은 그게 더 두드러진다. 눈앞에 있는 상대부터 제대로 직시해야 그럴듯한 전투를 벌일 수 있을진대, 녀석은 벌써부터 김현성을 쫓으려고 하고 있었다.

김현성을 이미징하고 김현성을 투영하고 있었다.

‘저 병신 같은 놈. 너무 급하자너.’

견제고 나발이고 대뜸 큰 기술부터 걸려고 하고 있으니 제대로 싸움이 될 리 만무, 심지어는 같은 파티원들조차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기본적인 오더라도 내려주면 그나마 전투를 쉽게 이끌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노담혜, 임채령, 남궁선도 조연으로 써먹기에는 스펙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니까.

남궁선이 어찌어찌 우효열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역시나 역부족, 이쯤 되면 혼자 독불장군처럼 달려드는 기벽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윌리엄의 경우에는 초조함에 스스로 먹히고 있는 쪽. 조바심이나 긴장감,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새끼도 달라진 거 없자너.’

500번의 죽음은 대체 뭐였을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이겨낸 녀석이 뭐가 그리 무섭길래 저렇게 병신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답답하면 내가 뛰어야지. 시바.’

당연히 말을 손에 쥔 채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 배운 건가요? 당신들은.”

-이기영?

-기… 기영 씨?

“그동안… 대체 뭘 배운 거예요?”

-어디지? 넌… 지금.

-괜찮으십니까? 이기영 님?

당연히 괜찮지 않다.

아쉽게도 지금은… 이미 죽어 있다는 설정이었으니까.

혼의 잔재를 통해… 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그런 설정이었으니까.

“상대한테 집중하세요. 하나하나 떠올려보자고요.”

지나치게 씩씩한 말투와 목소리가 바로 그 증거였다.

-칫… 건방진 놈.

-네. 이기영 님.

곧 가슴 아픈 진실이 들이닥칠지도 모른 채로….

녀석들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며 기분 좋게 미소 짓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