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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13화 (1,21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13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6)

희망찬 음악이라도 깔아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시점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으니까.

반전의 기회를 노리는 용사들이 마왕성에 간부들에게 한 방 먹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용기의 선율!

‘그러고 보니까 우리 음악가 있었자너.’

우효열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입이 찢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손발에 괜스레 힘을 꽉 주고 있는 것도 보인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무슨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었지만 내 눈에는 녀석이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꽤 많이.

녀석이 나를 걱정하는 게 익숙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임팩트 있는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 헛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 하… 하하.

오죽하면 웃음소리가 입꼬리를 비집고 튀어나올까.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지만 금이야 옥이야 키워놓은 보람이 느껴진다.

녀석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고….

-죽어.

짧은 한마디를 내뱉은 채로 발을 크게 굴렀다.

“눈이 문제가 된다면 한쪽 눈은 감으세요. 시야는 제가 확보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멍청한 놈.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저깟 애송이… 눈을 감고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허세는….”

-흥. 허세인지 아닌지 두고 보면 알겠지.

당연히 허세였다.

아무리 그래도 눈을 감는 건 에바라고 생각했던 모양,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김예리의 발을 바라보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실상 상대의 공격을 육감으로만 반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멍청한! 어리석군요!

김예리가 휘두른 단검을 양손을 뻗어 자신의 검으로 쳐낸다.

-어떻게… 한 거지?

-흥.

-어떻게 알 수 있었던 거지? 내 질문에 대답하세요. 필멸자. 만족스러운 답을 해주신다면 내 기꺼이 노예로 만들어 쾌락에 허우적거리게 만들어 드릴 테니.

-반갑지 않은 제안이군.

-건방진!

-굳이 답을 알고 싶다면 이야기해 주지.

-…….

-재능이다.

재수 없지만 우효열의 말은 사실이었다. 저런 기예는 재능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그동안 만나봤던 수 많은 강자들 중에서도 저런 게 가능한 인간들은 많지 않다.

아니,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스타일 자체가 워낙 독보적이었으니까.

그나마 비슷한 것이 희라 누나였지만 녀석은 조금 더 저런 종류의 육감에 발달되어 있는 편.

짐승들이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는 것마냥 녀석의 위기 감지 능력과 순수 신체 능력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재수 없네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원한 건 네놈이 아닌가?

“이렇게까지 재수 없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죠. 조언 하나 드리자면….”

-파티원들을 활용하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알면서 왜 안 했어?

-내 장점을 살리라는 말이겠지. 끈질기고 악바리같이… 진흙에 뒹구는 것처럼.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거겠지.

아니, 알면서 왜 안 했냐구요.

“상대는 지쳐 있어요.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겠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없으니….”

-바짓자락을 붙잡더라는 한이 있어도 몰아붙이라는 것이로군.

“더럽게 싸우세요. 치사하고 비열하게. 효열 씨보다 강한 사람도 효열 씨와 맞붙는 게 꺼려질 정도로 끈질기게. 수준 높은 싸움이나 머리 아프게 두뇌 싸움을 할 필요는 없어요. 상대를 끌어내리세요. 바닷속 밑바닥까지.”

자존심 강한 녀석은 대답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내 조언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파티원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는 것부터 시작, 임채령은 몸을 숨기고 남궁선은 주문을 외운다. 노담혜는 선율을 바꾸고 방금과는 다른 전투를 할 준비를 마친다.

이를 악물고 있는 우효열이 검을 휘두른다. 상대를 제대로 보지 않고 날린 일격이었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은 공격. 분명 속도는 김예리가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끝까지 그녀를 따라붙어 체력을 고갈시킨다.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은 다리뿐, 땅바닥을 구르고 바닥을 스치듯이 기어가 흙먼지를 뿌리고 집요하게 하단을 노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패턴이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른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정확히 말하면 뒷골목 양아치들이나 사용할 만한 수법이라고 해도 사용자가 우효열 정도가 되면 부담스럽다.

예상할 수 없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타입에 김예리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치잇! 품위 없는 싸움이로군요.

-싸움에서 품위를 찾는 머저리도 있었군.

검을 집어 던지고, 발을 휘둘러야 할 타이밍에 주먹을 휘두르고 거리를 벌려야 할 타이밍에 거리를 좁히고 검을 회수해야 할 타이밍에 파편들을 발로 차고, 검을 휘둘러야 할 타이밍에 몸을 들이민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는 개싸움은 서큐버스 여왕을 진흙탕 속으로 빠뜨리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지금까지 안 했어?’

심지어 윌리엄 녀석도 기억이라도 되찾은 것마냥 제대로 전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중이었으니 당황스러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윌리엄 님은….”

-네.

‘딱히 코멘트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왜, 꼭 자식 둘을 키워도 한 놈은 손이 많이 가는데 한 놈은 알아서 쑥쑥 잘 크는 거.

적절한 예는 아니었지만 내 눈에 보이는 윌리엄이 딱 그랬다.

녀석은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다. 본인이 우효열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는 걸, 자신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우효열의 대척점에 있는 셈이었다. 기본 운영은 언제나 정석적으로, 재능이 아니라 노력으로 일구어낸 힘.

녀석이 재능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비교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수백, 수천, 수만 번을 휘둘러온 검을 같은 검로 같은 타이밍에 내지르고, 파티원들로 완변학 진영을 완성하고… 모든 행동이 약속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당연한 말을 하자면 내 취향은 우효열보다는 윌리엄 쪽이었다.

‘우효는 품위가 없어도 너무 없자너.’

멋있는 줄도 잘 모르겠고.

“잘하시고 계세요.”

-흥.

“아니, 효열 씨 말고요.”

-…….

전에 없던 과감함까지 보이고 있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당연했다.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마력을 포기하고 극단적으로 검으로 마력을 모은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붉은 꽃이 그려진다.

피에 미친 성전사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윌리엄의 공간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턴을 이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까지 전투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우효 녀석이 알까.

막고 공격한다.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것을 캐치하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다.

꽃과 풍요는 날개를 단 것마냥 한 몸처럼 움직인다.

‘너도 이렇게 할 수 있었으면서 도대체 왜….’

-더러운 벌레치고는 제법이군요.

-흥.

우효열이 검을 휘두른다.

-제길! 피가….

한쪽에서는 붉은 꽃이 계속해서 그려지고 있는 싸움이 한쪽에서는 진흙탕 속에서 나뒹구는 것만 같은 개싸움이 일어나고 있었다.

‘될지도 몰라.’

어쩌면 진짜 될지도 몰라.

지금 당장 코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을 정도.

박덕구나 안기모, 김예리가 적당히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들의 몸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윌리엄과 우효열은 박기리 삼 남매가 원하는 걸 정확히 얻어가고 있었다.

우효열은 김예리의 속도와 기술에 익숙해지고 있었고, 윌리엄은 박덕구의 방패에 점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해지고 있었다.

‘진화하고 있자너.’

전투 중에 성장하는 클리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중.

내가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적당히 잡담과 농담을 섞어주는 게 전부였다.

‘근데도 효과는 확실하자너.’

“효열 씨. 지치신 건 아니죠?”

-허억… 허억… 쓸데없는 소리.

“윌리엄 님. 검이 느려지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후우… 후우….

“아뇨.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에요.”

‘경험치가 중요해. 경험치가.’

“기억나시나요?”

-네? 당연히…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윌리엄 님은 정말로 강했어요.”

같은 뻔한 소리 한번 해주고.

“저는 윌리엄 님의 진짜 장점이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너무 뻔한 말이라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

“…….”

“제가 느끼기에 윌리엄 님은 언제나 도전자였어요. 언제나 도전자의 입장에 있었어요. 계속해서 부딪치고 도망치고 두려워해도 끝끝내 올라가 정상에 깃발을 꽂는 등반가처럼 기어 올라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 모습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답게 보이는지 아마 윌리엄 님은 상상하기 힘드셨을 거예요.”

-그런….

“쓰러지고 무너져도 계속해서 일어나 다음을 준비하고, 도망치더라도 종국에는 다시 돌아와 계속해서 산을 오르고…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재능보다 커다란 재능이에요.”

딱 타이밍 좋게 방패에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구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당연하지만 저런 극찬을 받고 가만히 앉아 있을 리 만무,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붉은 꽃을 그린다.

분명히 뼈 맞았던 것 같았는데 그 고통을 참은 채로 이를 악 물고 있다.

-과찬이십니다.

-내게는 뭔가 할 말 없나?

“없어요.”

-…….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효열 씨는 천재인데.

-흥.

‘이 새끼는 피곤하게 계속 잘했다 잘했다 해줘야 되는 타입이야.’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우효녀석은 다시 한번 더 발을 크게 구른다.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온몸의 근육을 폭발시키듯이 튀어 오른다.

과정이 어떻게 되든 간에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싸움.

-너 느려졌구나.

-제길! 이 미천한 필멸자 따위가 감히! 감히!

‘김예리도 김예린데 쟤도 진짜 너 느려졌구나 이런 대사 어떻게 치는지 모르겠어.’

-피를! 더 많은 피를! 크하하하하하핫!

-더 이상 같은 수에는 당하지 않을 겁니다.

-흥! 저리 비키쇼! 내가 상대할 테니!

-웃기지 마라! 암흑 방패 수문장! 녀석은 내 먹이다!

‘얘네는 분열 기믹 있었나 보네.’

냉정하게 전장을 분석해 보면….

사실 한계를 맞은 것은 오히려 박기리 삼 남매 였다.

‘성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야.’

아마 쉬고 싶을 것이다. 김현성이 대충 싸워주지는 않을 테니 속은 아마 엉망진창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녀석들 역시 우효열과 윌리엄이 성장하는 걸 바라고 있었으니까.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윌리엄의 나쁜 버릇을 고쳐주기도 하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김예리의 경우에는 본격적으로 김현성의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저 흉내내기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게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 역시 시간문제.

‘정하얀 한소라 덤혜진, 얘네가 언제까지 김현성을 붙잡아 둘지도 알 수 없고….’

이미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돼에!!!! 내가! 이 내가! 겨우 인간 따위에게!

‘딱 좋은 타이밍이야.’

-이 망할! 멍청한 놈! 네 녀석 때문이다! 암흑 방패 수문장!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니까!

‘딱 좋아.’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상처 입은 서큐버스 여왕 매혹의 예리엘이 침묵합니다.]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암흑 방패 수문장 바크더크가 침묵합니다.]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피에 미친 성전사 아르기르모가 침묵합니다.]

직후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억… 허억… 이기영… 네놈… 지금 어디에 있지?

-후우… 하아… 이기영 님. 혹시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당장.

그래도.

‘아직 모자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성장통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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