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14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7)
-허억… 허억… 이기영… 네놈… 지금 어디에 있지?
-후우… 하아… 이기영 님. 혹시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당장 찾으러 가겠습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사연을 파는 것은 하책이다. 떡밥 정도는 뿌릴 만하기도 했지만 가장 이상적인 타이밍은 감정이 올라올 대로 올라왔을 때였다.
“저는….”
-어디 있지?
“저는 안전한 곳에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기영 님.
“당장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 이곳으로 찾아오지 않으셔도 돼요. 당장 중요한 것은 노을빛의 군주예요.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는 것보다 그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에 대해 준비하는 게 더욱더 중요해요.”
-쓸데없는 일이 아닙니다. 이기영 님의 안전의 확보는 지금 가장 중요한….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나는 그딴 게 궁금한 게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지. 네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아, 이 새끼 왜 이렇게 끈질겨 도대체.’
아직 사연을 팔 타이밍이 아니다. 분노를 표현할 대상이 옆에 있어야 조금 말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각성을 이끌어낼 만큼 중요한 부분인 만큼 조금 아껴두고 싶건만 이 새끼들은 당장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하긴 했나?’
노을빛의 군주가 떨어졌던 그 상황은 누가 봐도 쉽게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꽃기영 본인도 그 사실을 인지하듯 뒤를 부탁한다 이야기하기도 했고 더 이상 보지 못할 것 같다는 플래그를 팍팍 꽂아 넣지 않았던가.
당장 연락은 되고 있으니 일차적으로 안심은 하고 있겠지만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모른 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
“그건….”
-뭐?
“그러니까….”
말 수 줄이기.
-이기영 님… 정말로… 정말… 괜찮으신 게 맞습니까? 자세히 상황을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여 말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신호를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곧바로 윌리엄이 미끼를 문다.
-제길! 대답해라! 이기영! 지금 어디에 있지?!
우효열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딱 좋아.’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 도저히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다는 듯이 이야기를 질질 끌어주는 스탠스.
숨이 넘어갈 것마냥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는 두 놈은 역시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말을 질질 끌면 질질 끌수록 초조함은 배가 된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지?
-네?
“당장 말씀드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이야기했어요. 여러 가지로 궁금하신 게 많으실 테지만 정말로 말씀드리기 곤란해요. 저도… 저도 전부 말씀드리고 싶지만… 한 가지… 한 가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언젠가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거예요.”
새빨간 거짓말. 녀석들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이기영 님! 지금….
-이 개같은 자식!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지금 당장 말해!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은….
-이 미친 자식!
급발진하고 있는 우효열 때문에 윌리엄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는다.
상황이 뭔가 이상해졌다는 것을 인지한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와 임채령, 남궁선, 노담혜는 불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건 무슨 의미인지, 어째서 위치를 말해주지 않는 것인지, 곤란한 상황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인지, 머릿속으로는 온갖 상상을 하고 있겠지만 지금 당장 고백하는 것은 곤란했다.
“제 말 들으세요!”
-너 이 개자식… 네가 지금 소리를 칠….
“정말로 중요한 게 뭔지, 어째서 원정대가 노을빛의 마왕성으로 온 것인지.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세요. 제 안위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저는 분명히 안전한 곳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제발 뭐가 우선인지에 대해 생각을 하시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제길! 전부 부숴 버리기 전에 당장 설명해라.
‘뭘 부술 건데?’
-이기영 님… 이기영 님!
“어차피 저는 죽어요.”
-또 그딴 소리를!
“제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아요. 아니… 어쩌면 이미….”
-이기영….
“제게 집중할 시간이 아니에요. 이걸 이겨내지 못하면 로헨은 끝이라고요. 옳고 그른 게 뭔지, 이 상황에서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우선순위가 뭔지! 하나하나 설명을 해드려야 아시겠어요?”
-나는 그딴 것 따위 필요 없….
“하얀 씨와 소라 씨… 그리고 남은 원정대원들이 버티고 있지만 그것마저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아니, 이미 당했을지도 몰라요.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고… 쓰러지고 있다고요.”
울먹거리는 소리 좀 넣어주고….
“두 분밖에는 없어요.”
-…….
“노을빛의 군주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두 분 외에는 없다고요.”
꽃기영으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킨다는 것은 23살의 풋풋한 꽃기영에게 결코 익숙한 일이 아니다.
일반 병사의 작은 상처에도 눈물을 흘리는 여린 심성을 가지고 있는 어린 성자가 어떻게 많은 사람들의 상처에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을까.
마동력위치전환기를 우효열과 윌리엄에게 사용한 결단은 둘을 살리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한 결단이었지만, 다른 말로 하면 그 둘 외의 모든 병력을 버린다는 결단이나 다름이 없었다.
꽃기영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곳에 자리한 부상자들과 지금까지 함께 싸워왔던 동료들이 언젠가 쓰러질 것이라는 걸.
우효열과 윌리엄 없이는 전투를 진행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었다고 여겼을 뿐이다.
피눈물을 참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삼키며 가장 이상적인 선택지에 손을 뻗었을 뿐이다.
“제가… 제가 어떤 심정으로….”
이 새끼들의 입을 봉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꽃기영의 사연 어린 외침.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저버렸는지….’
위치가 어디냐고 묻는 앵무새들을 닥치게 만드는 것은 눈물 몇 방울로 충분했다.
-아마 그들 역시 이기영 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아니요. 원망했을 거예요.”
-…….
“어째서 자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는 건지, 어째서 우리들을 이곳에 버린 것인지… 분명… 저를 원망하고 있을 게 분명해요.”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미친 사람마냥 소리치던 우효 녀석의 목소리가 줄어들자 윌리엄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우효열 이 새끼는 남을 위로하는 데는 재주도 없거니와 이런 어려운 주제에는 입을 닫아버리는 성향이 있으니 이미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애먼 땅바닥을 차며 분노를 표현하고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띈다.
윌리엄은 끊임없이 위로의 말을 건네는 중, 사실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 새끼들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으니까.
박기리 삼 남매의 레이드가 생각보다 일찍 끝나기는 했지만 녀석들의 체력이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만전을 기해도 승리를 점칠 수 없는 만큼 아주 약간의 변수도 고려해야 했다.
상처는 이미 거의 회복이 되어 있었지만 몸에 남은 피로까지는 회복하지 못한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몸을 쉬게 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중요했다.
‘스펙업은 확실히 됐고.’
아이템들은 생각보다 크게 교체할 필요는 없겠네.
이미 파밍은 거의 완벽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른 직후였다.
-나는… 아직도… 납득할 수 없다. 네놈이 설명을 하기 전까지는….
“설명드리기 쉽지 않아요. 이해하는 게 힘들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은 진심이에요.”
진심은 아니었다.
“제 소망이기도 하고요.”
소망도 아니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믿어주실 수 없나요?”
-…….
“…….”
-…….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내부 정리요. 오른 스탯이 뭔지, 방금 전투로 얻은 코인으로 어떤 스펙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점검하세요. 체력을 회복시키는 건 덤이고요.”
-…….
“아마 곧 들이닥칠 거예요.”
분명히.
위에서 들리던 쾅쾅거리는 소리도 어느새 멎어들었다.
정하얀과 김현성의 전투가 소강상태를 맞았다거나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는 뜻.
후자가 정답이라면 아마 김현성의 다음 선택지는 이쪽을 찾는 것일 확률이 높다.
만약 나를 찾기 힘들다고 여겨진다면….
‘곧바로 위로 가겠지, 뭐.’
윌리엄, 우효열에게 닿을 것이 분명했다. 김현성의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직까지는 제대로 결정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던 건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쪽에게는 유리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물론 녀석이 멘탈을 가다듬는 데 한세월이 걸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현성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10분?’
아니면 5분.
아주 약간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으면 더 좋다.
그리고….
“움직인다.”
-네?
다시 한번 노을빛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제가 지시한 장소로 이동해 주세요. 노을빛의 군주가 움직였어요.”
-제길….
-네. 이기영 님.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고 우효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욕을 내뱉었다.
동시에 달리기 시작한 둘은 정신없이 성한 곳 없는 복도를 뛰어가는 중.
예상하기는 했지만 우효열과 윌리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제때제때 해두라니까.’
우효열은 뛰어가면서도 정비를 하고 있다.
코인을 가지고 구매할 아이템이 남아 있는 모양인지, 아니면 강화 물약 같은 것을 찾고 있는 건지, 윌리엄보다 더욱더 정신없어 보였다.
언뜻언뜻 두 사람의 눈에 불안감이라는 감정이 비친다.
처음 본 노을빛의 군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걸까. 그때 느꼈던 좌절감과 공포, 두려움과 경외감을 떠올리고 있는 걸까.
“두 분은 강해요.”
-네….
-칫….
“저는 분명히 두 분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네.
-당연한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자신을 믿으세요.”
-…….
“…….”
직후.
콰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노을빛의 군주가 치솟아 올랐다.
아까와 변함이 없는 모습, 여전히 멘탈이 좋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효열과 윌리엄이 다시금 녀석을 올려다봤을 때. 노을빛의 군주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사이에 성장한 격을 보고 있는 것일까. 자신에게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을 만한 벌레들을 살펴보고 있는 것일까.
둘 다 정답은 아니었다.
녀석의 시선이 머무른 곳은 우효열과 윌리엄 각각의 눈동자. 빛을 잃어버린 자신의 눈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미약하게나마 빛을 뿜고 있는 눈동자였다.
-…….
-뭐야… 너희들은.
“전투준비 하세요.”
-…….
-…….
-…….
-너희들은 도대체 뭐냐고… 이… 이! 개새끼들아!!!!
콰드드드드드아아아아아!
노을빛이 시야를 뒤덮은 동시에 나 역시 몸을 일으켰다.
조금 더 극을 볼륨 있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재료가 하나 더 있었으니까.
‘시체 만들어야 돼.’
물론 꽃기영의 시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