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18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11)
‘제길.’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째서 우효열이 저런 모습으로 변한 것인지, 어째서 이기영 님께서는 말을 아끼고 계신지,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자신은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인정하기 싫지만… 계속해서 그 사실을 속으로 부정하고 있었지만 그가 이성을 잃을 만한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이 이기영 님을 아끼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되살리겠다는 다짐도, 그의 긍지를 지켜줄 것이라는 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우효열이었다면 결코 꺼내지 않을 말 들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기영 님은….’
묻고 싶다. 당장에라도 소리치고 싶지만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은 시기였다. 아직까지도 격렬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저런 모습이 된 거지.’
전에도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운, 이곳에 있는 21군단과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약간의 위화감이 느껴지는 마력.
자신은 분명히 이 정체불명의 마력을 알고 있었다.
이기영 님의 안에 있는 어떤 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가능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아마 분명할 것이다.
‘로헨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힘과….’
“악의.”
‘꿈속에서 목도했던 심연 속의 괴물.’
그리고 그것을 봉인하고 있었던 성자.
퍼즐이… 퍼즐이 점점 맞춰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을빛의 군주는 강하다. 아니… 반신이라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그는 평범한 필멸자들과 궤를 달리한다.
여러 가지 페널티를 중첩으로 받고 심지어 이성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보여주는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 괴물과 우효열이 지금 맞붙고 있다. 평범한 필멸자에 불과한 그가 반신과 검을 부딪치고 있다.
성자의 안에 있는 그것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추론은 결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다.
로헨을, 대륙을, 차원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는 힘이라는 것 역시 결코 허풍이 아니다.
그만한 힘을 품고 있었던 여린 성자의 몸이 얼마나 썩어가고 있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힘을 완벽하게 억제하고 있었단 것 하나였다.
어째서 꽃과 풍요의 성자는 로헨에 온 이후로 우효열에게 접근했을까.
어째서 그의 곁을 맴돌았을까.
우효열은 분명 그의 선택을 받았다. 지레짐작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마왕성 수집품 관리자와의 싸움에서 확실하게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자신 역시 꽃과 풍요의 성자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자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꽃과 풍요의 선택을 받은 성자와 그가 선택한 용사.
본래 그 자리에 윌리엄이라는 인물은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선택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분함은 없다. 꽃과 풍요의 성자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후우….”
우효열은 틀림없이 천재였고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외에는 없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그는 명백히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는 사람이었다.
꽃과 풍요의 성자의 안에 있는 어떤 것은 분명히 커다란 힘이었고, 꽃과 풍요의 성자는 그 힘을 분명히 억제하고 있었다.
아니, 억제가 아니라 정제하고 정화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릇이었다. 이기영 님 그 자신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히 그릇으로써 로헨에 소환됐다.
우효열은 분명히… 아직 정화되지 않은 힘을 받아 괴물이 됐을 것이다.
꽃과 풍요의 성자는….
끝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로 숨을 거뒀다.
그런 이야기였다.
“하… 하하… 제기랄… 미친… 도대체 누가… 이런 개 같은 짓거리를….”
그는 그가 선택한 용사를 위해 죽도록 로헨에 떠내려 왔다.
“도대체… 어떤 개자식이! 이런 미친 짓거리를….”
누구보다도 힘차게 살고자 했던 그가, 누구보다도 세상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던 그의 마침표는 죽음이다.
그게 그의 역할이었고… 그게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하… 하하하… 하하….”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던 그의 마지막은 결국 죽음이었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게… 이딴 게 자신이 그렇게나 지키고 싶어 했던 세상이었다니…. 이런 미친 곳이 그가 목숨을 버려야 하는 장소라니….
“여신이시여…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어째서… 어째서… 그가 저런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겁니까.”
[꽃과 풍요의 여신이 당신을 측은하게 바라봅니다.]
“어째서… 어째서… 한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 이리도 가혹할 수 있단 말입니까….”
[꽃과 풍요의 여신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꽃과 풍요의 성자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효열 오빠는… 괜찮은 거 맞나요? 윌리엄 님… 대답 좀 해주세요. 이기영 님께서는 뭐라고….”
“윌리엄 님.”
“윌리엄 님!”
손발이 떨린다. 화를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분함과 슬픔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자신에 대한 무력함도… 로헨에 대한 분노도… 그리고… 노을빛에 대한 적의도….
“…….”
[꽃과 풍요의 여신이 당신을 향해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여신님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은….]
“제 이야기는 꽃과 풍요의 여신의 신도가 아닌, 버림받은 성자의 친우로서 끝을 내릴 것입니다.”
단 한 번도 끊어본 적이 없었던 채널을 닫는다. 시끄러운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꽃과 풍요의 여신의 목소리도 다른 게니우스들의 목소리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시야가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주변을 바라본다. 황폐해진 대지와 무너져 내린 성벽. 회색 노을이 내려앉은 장내. 이게 그가 지키고 싶어 하는 세계였다.
그가 바라던 로헨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겠지만 내 눈에는 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썩은 세계를 위해 죽었다. 당장에라도 이 빌어먹을 대륙을 짓이겨 버리고 싶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로헨의 운명이야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어느새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윌리엄 님.”
“윌리엄 님! 저희도 함께 가겠습니다.”
손짓으로 그들을 제지한다.
속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지만… 구역질을 참을 수 없을 장소로 이 모든 것들이 역겹지만… 어느새 발을 놀리고 있었다.
이야기의 끝을 위해서.
그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의 끝을 내기 위해서.
꽃과 풍요의 성자가 바라고 바라던 대륙을 위해서….
-윌리엄 님. 지금… 도대체….
눈앞에 보이고 있는 것은 마구잡이로 공격당하고 있는 괴물, 이미 이지를 상실해 괴성밖에 지르지 못하는 괴물이었다.
“키에으에에에에에에에아아아악!”
어처구니없게도 자신은 지금부터 저 괴물을 구해야 한다.
“저 멍청한… 자식.”
로헨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괴물을 구하는 게 마지막 임무라니….
‘쉬운 일은 아니겠지.’
한 발자국을 내딛자 아니나 다를까 노을빛의 군주의 시선이 내리꽂힌다.
계속해서 괴물의 몸을 뜯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었다.
한 발자국을 내딛자 어김없이 노을빛의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메운 노을빛의 검기는 받아내는 것조차 힘에 버겁다.
이미 인간을 초월한 둘과는 다르게 자신은 평범한 인간이다. 둘의 싸움 아닌 싸움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이를 악물고 검기를 받아내자 내부가 뒤집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콰아아아아아앙!
다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전진하기는커녕 몸이 뒤로 밀려나는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길이 열린 것처럼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 하하….’
분명히 거대한 성벽처럼 보이는 곳이었을진대, 그곳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몸은 한계다. 제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저 지름길을 지나지 못할 정도가 아니다.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기영 님.”
-…….
아마 무언가 할 말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다시 좁아지기는 했지만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듯 노을빛 속으로 몸을 내던지자 다시 한번 지름길이 보였다.
꽃과 풍요의 성자는 자신이 저곳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웃기지만 그것만으로도 조금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우효열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그 역시 인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리고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는 것이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겠지.
연신 붉은 꽃을 그린다.
계속해서 꽃을 그릴수록 몸에 활력이 돋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쪽 팔이 움직이지 않아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도, 출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도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럽지 않다. 당연히 이 정도는 고통 축에도 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온몸이 넝마가 된 것 같았지만 꽃과 풍요의 성자가 느꼈던 고통에 비하면 별것 아닌 일이다.
“후우… 후우….”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지만 발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발이 느리다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다.
발을 멈추면 안 된다고 속으로 끊임없이 속삭였다.
‘진실한 믿음. 진실한 믿음이요.’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괜스레 떠올랐다.
자신을 바꾼 것은 분명 꽃과 풍요의 성자였다.
그의 꿈에서 함께 한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괴로운 시간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자신을 담금질한 시간이기도 했다.
죽음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뒤틀릴 것같이 두려운 경험이기도 했지만 윌리엄이라는 인간을 한 차례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우습지만 즐겁기도 했다.
‘모두가 행복했답니다. 하는 이야기의 끝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어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모두가 행복했답니다. 하고 끝날 거라고….
‘그렇게 믿다 보면 사라지거든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악몽에 대한 공포가,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도. 모두 다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렇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거짓말처럼 모든 불안감과 의문들이 사라진다. 그가 말했었던 진실한 믿음이라는 게 뭔지…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제는 정말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믿음.
진실한 믿음.
노을빛의 군주의 몸에서 폭발적인 마력이 뻗어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목표는 자신이 아니라 괴물이 되어버린 우효열이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 발걸음을 옮긴다. 팔을 벌리고 다리에 힘을 꽉 준다.
약한 신체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여나 몸을 뚫고 녀석까지 빛에 휩쓸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지만… 다시 한번 이를 물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윌리엄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마무리됐다고. 여기가 끝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죽음이 두렵다.
그런 것 따위는 진즉에 극복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마 자신이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 날 아침, 꽃과 풍요의 성자와 함께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 눈을 뜨면,
다시 한번… 다시… 한번 처음이 시작됐으면 좋겠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시 한번 처음이 시작됐으면 좋겠…습니다.”
몇백 번을 죽어도 상관없으니.
“다시 한번… 처음이… 시작… 됐으면….”
이번에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을 테니….
“다…시… 한… 음… 됐….”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해낼 테니….
“시작… 됐… 으…면….”
다시 한번 처음이 시작됐으면….
“됐… 으면….”
다시 한번 처음이 시작됐으면….
그리고.
이를 악문 채로 괴물이 된 우효열을 향해 시답지 않은 유언을 내뱉었다.
“정신… 차려…라… 이… 멍청아….”
마음에 들지 않는 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