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21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14)
‘나 죽은 건가?’
정말로 노을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소였다.
분명히 우효열과 김현성의 마지막 격돌을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황상 노을빛에 휩쓸린 이후 뒈졌다고 봐도 무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냐.
‘굳이 그런 거라면 대화를 하자고 할 이유가 없었겠지.’
아마 이기영이 의도적으로 만든 장소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았다.
전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구태여 안 좋은 가정을 우선순위로 둬 이 대화를 망칠 필요는 없었다.
어떤 변덕 때문에 대화를 요청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내게 득이면 득이지 실이 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싸움의 결과를 눈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으니 말이다.
우효열은 이미 한계였고, 사실 노을빛의 검을 막을 수 있는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이야기로 마무리됐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적어도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는 거니까.
김현성과 우효열의 싸움은 딱 거기까지. 어차피 전투에 대한 후처리나 배상의 문제는 몸 쓰는 멍청이들이 아니라 이쪽의 몫이다.
뭔가 처리할 것이 남아 있어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면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고 표현해도 괜찮다.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지? 아니… 겁니까?”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이거 뭐… 어쩌자는 거야?’
걸을 수 있기는 하다. 자신을 찾아보라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조건을 원하고 있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을 즈음에.
[아. 미안. 미안. 여기저기 처리할 일이 좀 있어 가지고.]
하는 목소리와 함께 공중에 작은 형태가 꾸물꾸물 생겨나기 시작했다.
노을빛과 함께 형태를 만들어낸 인형은 아직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녀석.
정확히 이기영의 유년시절이었다.
대륙에 있을 때부터 매일 입고 있었던 정복을 입고 있다.
차이점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매우 커다란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
‘시바. 진청이 아니었구나.’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은 진청이 아니라 이 새끼였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것이 당연하리라.
애초에 자신을 진청이라 생각하기를 유도한 거겠지.
최대한 머리를 굴려가며 추리 아닌 추리를 하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 틀어졌다.
‘이기영이 내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어쩌면 이 몸이 진짜라는 것도….
[아니야. 그것 맞아. 정확히는 여기에 80퍼센트 정도 그곳에 20퍼센트 정도 비율로 들어가 있다고 하는 게 편하겠네. 말은 편하게 해요. 그게 나도 편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지.”
작은 이기영은 땅바닥에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지, 공중에 붕 뜬 채로 앉아 있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돈다든가 유영하고 있다든가 하는 모습은 당최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산만해.’
무척 산만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미안. 아무래도 여기로 옮겨가면서 정신상태도 같이 어려진 느낌이라서… 제어하기가 쉽지 않네. 나도 내가 산만해. 없었던 장난기 같은 것도 생긴 것 같고… 딱히 나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느끼기는 하는데 그래도 좀 적응이 필요하더라구.]
“…….”
[처음부터 여러 가지로 설명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럴 시간은 없었을 같고. 사실 몇몇 개 빼고는 네가 예상한 게 전부 맞을걸? 더미랑 계약한 것도… 또 뭐가 있었더라… 우으응… 아. 덤혜진도. 응. 응. 맞아.]
“불행 중 다행이네.”
[아마 궁금한 건 자세한 계약 내용일 거야. 더미 월드에… 우욱… 잠깐, 계속 돌다 보니까 멀미 난다.]
‘그럼 그만 좀 돌아. 시바. 진짜.’
[근데 이 몸으로는 이렇게 빙글빙글 돌아야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더라. 희한하지? 나는 어릴 때도 꽤 조숙한 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지구에서의 기억도 심어놨으니까.]
“…….”
[개인적으로는 보상심리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때 경험해 보지 못한 걸 지금 경험해 보고 싶어 하는 거 있잖아. 그래서 어쩔 수 없거든… 아! 내가 무슨 말 했었지?]
“자세한 계약 내용까지.”
[아. 계약 내용은 네가 생각한 게 맞아. 더미월드는 그렇게 좋은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뭐. 사실 난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자너. 푸… 푸힛… 푸헤헿. 너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어려지니까 더 얄밉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머리카락을 붙잡고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뻔한 거지. 프로그램이 왜 프로그램이겠어. 업데이트를 해주지 않으면 애초에 끝장날 수밖에 없자너. 우리 쪽도 업데이트가 필요한 마당에 거기는 어떻겠어? 너희는 거기가 이미 끝장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뭐… 타이밍이 좋았지. 사실 나도 계약을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카스가노가….]
녀석이 어려짐으로써 이쪽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사실에는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생각을 대충 읽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쓸데없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주저리주저리, 그냥 퀴즈를 낸 이후 정답을 기다리는 꼬맹이의 눈빛이나 다름이 없었다.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육체를 이쪽에 넘긴 이후에, 영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예산이 없었나?’
게다가 20퍼센트나 되는 지분을 이 육체에 심어놨다고 가정한다면 당연히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카스가노 유노가 뭘 본 거지?”
[사실 별게 아니야. 어쩌면 네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게 들릴 수도 있을걸. 그러니까… 지혜 누나나 카스가노나 내가 여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 정확히는 로헨 쪽 인사들이랑 너무 얽히는 걸 경계했었던 거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대충은.”
사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유노 말로는 내가 병에 걸린다는 거야. 자세히는 말 안 해줘서 모르겠는데 정신병 같은 거겠지. 그리고 대륙이 위험하데. 뭐. 로헨 애들이랑 얽힌 게 너무 많아서 정이 들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잘 모르겠다니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노가 본 미래에는 내가 우리 대륙이랑 로헨을 합치려고 한데.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데… 거짓말도 작작해야지. 결국에는 그게 콰과광! 하면서 충돌이 났다는 거야. 이 차원이랑 저 차원이랑 합치려고 하다가….]
[살아 있는 지옥으로 만든다는 거지. 터무니없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해. 누나랑 카스가노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양보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구나 했지. 사실 너를 쓰는 게 더 효율적일 거라는 개인적인 판단도 있었어.]
“그렇겠지. 일단 시간 단축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거지 같은 계약에 얽매여 있지 않아도 되고….”
[응. 응. 위험부담이 없어지니까 막 던져 볼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지 아마? 푸헿. 네 말대로 로헨의 게니우스들과 한 계약도 전부 내가 한 게 아니게 되는 거니까. 어떻게 뒤통수를 치든지 간에 상관 없어졌자너.]
[솔직히 쓸데없는 계약을 하는 것보다 그냥 관리자 하나 두고 뽑아먹을 만큼 뽑아 먹는 게 제일 유리하기도 하구….]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아마 이기영이 로헨에게 정이 들었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걸 정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로헨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몇 번 하게 된다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 본인의 손을 벗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품에 안고 있는 것은 확실하게 차이점이 있다.
물론 대륙과 로헨을 합친다는 발상 자체는 말도 안 되기는 하지만 이 또라이라면 그 실험에 발을 디딜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여겼을 테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
물론 위험부담은 그만큼 크다. 하지만 주사위를 던져보지 않을 정도는 아니라 판단할 것이다.
[솔직히 귀찮잖아. 뭣 하러 내가 쟤들 사정을 봐줘야 돼? 푸힛. 너도 알고 있자너. 여기 완전 썩었다는 거.]
“…….”
[게니우스고 나발이고 한번 싹 밀려봐야 돼. 잠깐 위기를 벗어났다고 해도 결국에는 도돌이표가 될걸. 유피테르나… 플로라 정도가 그나마 제정신인 것 같기는 한데. 나머지 놈들은 워낙 답이 없어서 베니고어도 호통을 칠 지경이더라니까. 얘네들은 답이 없어.]
“그건….”
[효율을 생각해 보자구. 효율을… 장기적으로 이 로헨에 중요한 게 뭔지. 뭐가 이 로헨에 도움이 되는지. 인간의 관점이 아니라 조금 더 위에 있는… 관리자나 초월자의 관점으로 살펴보자 이거야. 네가 정말로 로헨에 관심이 있다면 이건 꽤 중요한 문제라구? 여긴 체계가 바뀌어야 되는 곳이야.]
‘씨발.’
[한 번쯤은 혁명의 불꽃이 타올라야 되는 곳이라고. 이 게니우스라는 시스템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해. 필멸자라는 것들은 신에 한 번 묶이면 자기 가능성을 제한하게 되거든…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왜 여기로 스카우트된 건지 생각해 본 적 없어? 내가 볼 때 이 장소는 스스로 초월자를 만들 수 없게 설계된 곳이야. 나나 현성이, 하얀이나 희라 누나 같은 사람들이 나올 수 없는 구조라니까? 그냥 닭장이나 다름없다구. 닭장. 인간의 가능성이 얼마나 무한한데… 그걸….]
‘조금 잘못 생각했나.’
[아무튼 여기는 외부인력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게니우스 개잡놈들이 정을 붙일 리가 있나. 관리는 개뿔 사리사욕 챙기기 바쁜 놈들이 한 사발일걸. 그렇지? 더 최악인 건 총대를 멜 놈도 없다는 거야. 적당… 적당히… 어차피 큰 그림은 시스템이 그려주니까. 푸헿.]
‘어쩌면 더 위험할 수도….’
어쩌면… 저 어린 이기영이 성인이 된 이기영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마치 순수한 악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지. 저걸 악이라고 할 수 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구태여 많은 자원을 들여 로헨의 똥을 닦아주는 것 보다는 한번 밀어버린 이후 재건하는 게 더 좋은 선택지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스템이 실수라는 걸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로헨에 박혀 있는 프로그램은 명백하게 실패했다.
오류도 적당해야 하는 법이다.
계속해서 자원을 투자하고, 투자하고, 또 투자하며 오류에 매달릴 바에야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정답이었다.
물론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저 어린 이기영은 이런 것이 기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인 이기영도 썩 남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저 소악마는 실리와 정답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새끼들이 뒈져 나갈 거라는 거… 알고서 저러고 있는 건가?’
[물론 희생이 있기야 하겠지만… 뭐 어쩔 수 없자너.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건 언제나 있어 왔고… 까놓고 우리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잖아. 더 큰 걸 위해서는 단호하게 쳐내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야. 심지어.]
“…….”
[나는 이게 내 개인의 생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이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해. 내가 여기로 우연히 온 것 같아? 절대 아니올시다야. 물론 현성이가 조금 지랄하기는 했어. 개인적으로 멀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구… 타이밍이 어떻게 맞아 내가 로헨에 오기는 했지만.]
“…….”
[있잖아. 나는 시스템의 목소리가 나를 여기로 부른 거라고 생각해.]
‘시바….’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김현성과 얽혀서 우리 대륙에 ‘우연히’ 찾아온 것도, 아니, 그전에 먼저 유피테르 사단이 우효열을 회귀시킨 것도…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 전부 시스템의 의지였다는 거지. 걔가 마술을 부린 거라니까?]
‘…….’
[개인적으로는 현성이가 술에 꼴아서 추태를 부린 것도 시스템의 뿅뿅뿅! 한 게 아니었나 하는 희망 사항을 품고 있거든. 뭐… 아무튼 간에 요지는 이거야. 로헨을 밀어버리….]
“그렇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네 대척점에 있는 것도 시스템의 의지겠네?”
[아니지. 넌 인간이 아니라 프로그램이니까.]
“프로그램으로 태어났을지는 몰라도 난 인간으로 여기에 있어. 멍청아. 그리고 네 말이 맞다고 한들, 나라면 기분 나빠서 참을 수가 없을 거다. 시스템의 의지? 언제부터 그딴 거에 휘둘릴 정도로 애새끼가 됐어요? 몸이 어려지니 정신도 나갔나 보네. 응?”
[도발하지 않아도 돼. 나는 싸우려고 온 건 아니니까.]
“너….”
[나도 썩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뭐…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실리라 이거야. 내게도 이득이 되는 이야기고… 근데 그렇게 말하니 내가 할 말이 없네… 응. 응. 그래.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그래서 네게 많은 걸 기대하고 있기도 하고….]
“뭐?”
어린 이기영이 입술과 눈꼬리를 반달처럼 휘어 올리고 내리며 말을 이었다.
[너… 어디로 돌아가고 싶어?]
“어….”
[여기 남을래? 아니면 더미월드로 돌아갈래?]
“…….”
[네가 원하는 거… 들어줄 수 있는데… 행복하게 끝났답니다! 라는 걸로 끝맺음할 수 있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푸헿.]
“…….”
[어떻게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