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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22화 (1,22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22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15)

‘무슨 의미지?’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저런 말을 하는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의도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단순히 계약과 관계되어 있는 이야기였으니까.

가장 편안한 답, 가장 원하는 답을 택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돌아가는 것이 가장 베스트였다.

애초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더미월드였다. 이미 스스로 그렇게 정하지 않았던가.

[물론 더미월드에 대한 지속적인 업데이트는 약속한 대로 이행할 거야.]

저렇게까지 말을 한다면 돌아가는 것이 합리적이다. 꽃기영의 역할은 여기까지가 끝.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자신이 맡은 역할은 여기까지. 이걸로 마무리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곳은 어떻게 되는 걸까. 로헨과 로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효열, 임채령, 레이먼 볼트, 남궁선, 노담혜는 전부 어떻게 되는 걸까.

“로헨은… 어떻게 되지?”

[그걸 굳이 네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목적은 완수했잖아. 네가 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 감사하고 있어. 가짜 계약이 내 역할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딱히 그렇지도 않아. 넌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전부 수행했어. 로헨에 대한 시험이라든가. 이곳의 가능성을 네가 평가한 거야. 김현성을 이곳으로 불러온 것도 엄밀히 말하면 네 공적이지 뭐.]

“밀어버릴 생각인가?”

[글쎄….]

‘시바.’

머뭇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정답을 표정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이 냉정한 신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생각이 정리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쓸데없는 질문부터.

“왜 뒤늦게 나타난 거지? 굳이 네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데… 음… 음… 김현성은 완벽해야 해.]

“…….”

[패배나 실패는 노을빛의 검신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 물론 전투 외적인 것은 다른 문제지만… 걔가 자기의 강함을 스스로 의심하는 건 그다지 이롭지 않아. 얘는 지면 안 돼. 패배가 좋은 경험이 되는 건 이전까지야. 우효열과 네가 현성이를 위협했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

[물론 현성이한테 많이 불리한 상황이기는 했는데. 그래도 네가 분전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네. 내가 이 자리에서 너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너에게 선택권을 주는 건 너에 대한 찬사라고 생각해도 될 거야. 나답지 않은 배려고….]

“내가… 만약 로헨을 선택한다면….”

[글쎄. 그것도 이야기해 주고 싶지 않은데… 시간을 끄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을게. 어디까지나 선택하는 건 너야.]

어쩌면 이 모든 게 시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꽃기영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로헨의 운명이 결정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이 장소는….’

뭐가 어찌 됐든 간에 관리자를 필요로 하는 곳이었으니까.

밀어버리고 새로 쌓는다는 선택지도, 오류 수정을 위한 선택지도 어찌 됐건 간에 관리자를 필요로 한다.

이지혜를 관리자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아마 자기 품에 있는 사람을 멀리 내치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꽃기영에게 더미월드를 포기하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로 내게 더미월드를 포기할 자신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과 같다.

애매하게 한 발 걸치는 걸 원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이기영은….’

꽃기영을 로헨의 관리자로 내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내게 20퍼센트가 붙들려 있으니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만약 내가 로헨의 관리자로 취임한다면 이기영의 자아는 완벽하게 사라진다.

꽃기영이 아니라 더미기영에게 로헨을 맡길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의 답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로헨에 관리자가 된다면….’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선을 정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정말로 운이 좋으면 리셋 이후 재건이 아닌 오류 수정으로 방향성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제약사항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저 정신 나간 어린놈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내가 브레이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가장 큰 문제는 더미월드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

‘돌아올게.’

‘꼭 돌아갈게.’

목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희미했던 기억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었다.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든 게 불안하다. 그런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일방적이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선택을 하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느껴진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더욱더 그랬다.

그 와중에도 공중에 둥둥 떠다니며 장난감 큐브를 맞추고 있는 애새끼영이 눈에 들어온다.

이쪽에 선택이야 어떻게 되든지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느낌. 어느 선택지 하나 아쉽다거나 아쉽지 않다거나 하는 티를 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저 새끼.’

제발 한 대만 때리고 싶다. 꿀밤을 머리통 정수리에 후려갈기고 싶어 참을 수가 없을 지경.

머리가 아픈 것과는 별개로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구는 저 낯짝을 구겨 버리고 싶었다.

‘원하는 게 뭐지?’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저런 행동들이 모두 계산되어 있다고 느껴진다면 자신이 너무 오버하고 있는 걸까.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나 그게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을 때라면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과장된 손짓, 과장된 움직임, 과장된 웃음, 과장된 행동, 저게 전부 계산 속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정말로 없을까?

블러핑이 무기인 저 쓰레기가 정말 이 협상 테이블에서 스스로 몸을 부풀리지 않았을까?

압도적인 을과의 협상 테이블이라 하더라도 정말로 저 컨트롤프릭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을까?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은 개뿔.’

애초에 저 새끼한테 진실이 있기는 한가?

자신이 80퍼센트의 혼만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실리와 효율만을 추구하는 신이라는 것도 전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손짓과 발짓도 전부 무대 위에 올라온 아역 배우마냥 자신을 꾸미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평소보다 방정맞은 말투와 산만한 행동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애초에 자신과는 협상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각인시키려 저런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쪽을 흔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그리고… 굳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겠어. 고작 프로그램 따위를 상대로….]

“…….”

[나는 네 창조주야. 조금 사이가 안 좋기는 하지만… 어쨌든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지.]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정답은 네가 알고 있을 테니까.”

다시 한번 빙글 몸을 돌리며 애새끼영은 입을 열어왔다.

[내 호의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면 조금 섭섭해질 것 같은데. 푸헿.]

‘애초에 너한테 호의라는 게 있어?’

[선택하는 것 네 몫이라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경고하는데 그렇게 재는 게 네게 유리하게 적용되지는 않을 거야. 가능성이야 당연히 많겠지. 우리 둘의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말자는 특약이 있을 수도 있고. 네 말대로 내가 지금 이 협상 아닌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 연기하고 있을 수도 있을 가능성도 있지.]

‘…….’

[네 생각대로 이기영은 보통 계산되지 않은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도 돼. 응. 응. 응. 그래. 지금 이런 것도.]

‘…….’

[이러고 있는 것도 계산된 행동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푸헿.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말이야. 전부 계산된 행동이야. 응. 응. 그렇게 마음대로 생각해. 근데 그래서 뭐.]

‘…….’

[모든 행동 원인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정말로 있다고 생각해? 블러핑이 특기인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아무 이유 없이 할 정도로 피곤한 성격도 아니야.]

‘…….’

[구태여 이런 귀찮은 자리를 만들면서까지 내 몸을 부풀리고, 감정을 담아서 초월 신을 연기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나 봐? 어째서? 도대체 왜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 되지? 이미 게임은 끝났는데 굳이 왜? 정신 차리세요. 전부 다 뒤집어버리기 전에.]

진실의 귀걸이가 반짝거리는 게 눈에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깨닫는 것이 조금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녀석의 귀걸이에 집중하기보다는 녀석의 행동 그 자체를 보고 있었으니까.

노을빛에 계속해서 반사되고 있는 진실의 귀걸이가 눈에 띌 정도로 불을 밝히는 것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거짓?’

“더미월드를 원상복귀시켜 준다는 건 진실인가?”

[맞아. 그건 의심할 필요 없이 계약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사실 굳이 그렇게 해주지 않을 이유도 없고… 많은 자원이나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니니 말이야.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해결될 문제니 굳이 해주지 않을 이유도 없지.]

이번에는 반짝이지 않는다.

“네가 애새끼가 되었다는 건 진실인가?”

[…….]

“…….”

[대답하지 않을래.]

“너와 내가 맺었던 계약 내용 중에는 계약 기간 중, 네가 진실의 귀걸이를 달고 있어야 한다는 특약이 있었나?”

[노코멘트 할게요.]

“그렇다면.”

[전부 대답하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여기는 네 궁금증을 풀어주는 자리가 아니야.]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진실의 귀걸이에 대해 눈치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조금 생뚱맞은 이야기였다. 어린 이기영의 호칭이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라니.

어째서 진실의 귀걸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기영에게 단연코 제일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진실이라는 단어였다.

‘그럴 만해.’

이 새끼가 사기꾼 새끼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더미기영이 이기영에게 요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계약서 문제부터, 계약이 이행되는 것까지. 그 과정에서도 어떠한 속임수가 사기로 인해 계약이 변질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놈의 말대로 놈이 더미월드를 업데이트하는 것은 손가락 흔들기보다 쉬운 일이겠지만 눈앞에 있는 사기꾼은 그 쉬운 일을 위해서도 얼마든지 거짓부렁을 내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프로그램이라면 더욱더.

어째서인지는 모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분명 지금 이기영이….

‘여기에 나와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구나.’

이곳에서 자신과 입씨름을 벌여야 할 이유가 있다.

당장 이유를 추리하거나 찾을 수는 없지만… 아니, 백번 말해 녀석이 궁지에 몰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뭐가 어찌 됐건 간에 놈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분명히 그 이유는 존재한다. 조금이라도 이 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는 이점이 꽃기영에게 있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합의점을 다시 찾고 싶은데. 가능할까?”

[…….]

“부탁… 드립니다.”

[…….]

“…….”

[후우….]

“…….”

[좋아. 이야기는 들어볼게. 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다면…….”

[그건 안 돼.]

“하지만…….”

[생각할 여지는 있어.]

“이건…….”

[안 돼.]

“…….”

[좋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협상이 끝난 뒤에….

눈앞을 환하게 덮고 있는 노을빛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는….

어째서 애새끼영이 나타났는지, 녀석을 불편하게 하던 게 뭔지… 왜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했던 건지 전부 깨달을 수 있었다.

“…….”

“…….”

“하… 하하… 시바….”

이겼구나.

“시바… 이겼구나… 효열아. 네가… 이긴 거였구나.”

우효열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녀석의 반대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모습이 틀림없이 시야에 들어왔다.

김현성이 만들어놓은 것보다 더욱더 큰 구멍이 말이다.

물론 반쪽짜리 승리였을 것이다.

아마 김현성이 중간에 출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역소환됐다는 게 가장 합리적인 생각일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고… 반쪽짜리라고는 하더라도….

“네가… 이겼구나. 이 멍청한 꼴통이 해냈구나.”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성과였으며 성취였다. 녀석뿐만이 아니라 나에게도 말이다.

후련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더라면 더 좋게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었을 테지만… 분명 만족스러운 협상이었으니까.

사기꾼에게 당했다는 생각보다는 묘한 만족감이 전신에 감돌고 있었다.

미련은 없다.

나는 녀석과 마지막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이후에 입을 열었다.

기절해 있었지만 분명히 목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잘 있어라. 새꺄.”

꽃기영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 * *

“오빠치고는 많이… 양보했네요?”

“글쎄… 딱히 내가 손해 본 건 아닌데?”

“아니긴….”

“그보다 누나. 나 커피 한 잔만….”

“말 돌리지 말고 조금 더 지켜봐요. 후일담은 지켜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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