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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23화 (1,22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23화

로헨에서(1)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뜨자 평소와는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깨어나셨군요. 윌리엄 님.”

“…….”

“…….”

“에밀리아?”

“네. 에밀리아입니다.”

“…….”

“…….”

“제가… 제가… 살아 있었군요.”

천천히 몸을 내려다본다. 분명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몸뚱어리가 의외로 튼튼했던 것 같았다.

온몸이 붕대로 감겨 있고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기적 말이다.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겁니까.”

“정확히 한 달하고도 12일이 더 지났습니다.”

“정말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군요.”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단 이곳은 어디인지부터 시작해서, 그날의 전투가 어떻게 되었는지, 왜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건지….

그리고… 꽃과 풍요의 성자는 어떻게 된 건지… 자신처럼… 혹시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마 에밀리아의 표정이 어느 정도 답을 해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오랜 시간 병상에 누워 있다 일어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정이라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다.

말을 아끼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보이는 게 당연했다.

“일단 조금 더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윌리엄 님.”

“아니요. 괜찮습니다. 에밀리아 님. 이렇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얼굴을 들기 힘들 정도로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안정을 취하고자 현실을 피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받아들일 게 있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

“마지막 싸움은 어떻게 됐습니까?”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조금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에밀리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숨기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겠지. 어쩌면 자신에게 의지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홀로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를 지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많은 게 변했다. 무언가가 확실하게 변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효열 님이 노을빛의 군주를 이겨내셨습니다. 윌리엄 님께서 정신을 잃으신 이후 그다음 날 21군단 모두가 역소환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인류가 승리했습니다. 네. 하하….”

‘해냈구나.’

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걸… 녀석이 해냈구나.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전히 에밀리아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기 때문일까. 기쁘기는 했지만 조금은 기분이 이상했다.

누군가의 희생 끝에 쌓아 올린 승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표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복잡해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서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겁니까?”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꽃과 풍요의 여신님이 느껴지십니까?”

자신은 알 수 없었다. 분명 마지막에 여신을 저버린 것만 기억에 남아 있었으니까.

“윌리엄 님께서 노을빛의 군주에게 향하시던 그때. 꽃과 풍요의 여신님께서는 윌리엄 님을 잘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언제나 윌리엄 님의 앞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하신 것을 마지막으로….”

“…….”

“로헨에 있는 모든 게니우스들과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에밀리아가 조용히 꽃과 풍요의 여신의 조각상을 꺼내 드는 것이 눈에 보인다.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조각상을 보면 여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제들이나 직접적으로 힘을 받고 있었던 이들의 경우에는 미약하게 그들의 힘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정확히는 존재만 느껴질 뿐, 여신님에 대한 그 어떠한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다른 게니우스들 같은 경우에도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님을 비롯한 몇몇 게니우스들의 희미하게나마 흔적을 느낄 수 있지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은 게니우스들도… 분명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 통계적으로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지만… 그 수가 결코 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

“로헨의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직도 계속해서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 말뜻은….”

“로헨 곳곳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윌리엄 님.”

“…….”

“특정 게니우스의 신전의 대지가 오염되어 썩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저희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부에는 눈 폭풍이 몰아치다 갑작스레 땅이 말라 비틀어지기도 하고… 커다란 싱크홀이 곳곳에서 생겨나거나 하늘이 갈라지기도 합니다. 남부에는 커다란 해일이 도시를 강타했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 바닷물이 모두 다 말라버렸습니다.”

“…….”

“학자와 신학자들은 게니우스들이 사라진 여파가 대륙에 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실정입니다. 종말론자들은 계속해서 종말을 노래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정확히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런 이상 현상들이 마치 무너지고 수복하고를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뭐라고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대륙의 멸망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마 밖을 직접 보신다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렇다면….”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고개를 끄덕인다. 움직이기 조금 불편하기는 하고, 몸이 무겁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다.

입술을 꽉 깨문 뒤,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자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마차 안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바깥으로 나간 이후에 보이는 것은 끝없는 인파의 행렬이었다. 과장하지 않고 로헨의 인구의 1/5이 한 번에 모인 것과도 같은 광경에 커다랗게 입을 벌리게 된다.

“이건….”

“피난민들입니다.”

그들의 뒤로 천지가 개벽하듯 변하고 있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벼락이 떨어지거나 공간이 찢어진다. 마치 하늘이 블록이라도 된 것 같이 겹겹이 쌓였다가 겹겹이 흩어진다.

어느 곳에서는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고 있었고 또 어느 곳에서는 눈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낱 인간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었다.

정말로 종말이라도 닥쳐온 것 같은 광경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에밀리아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름답다.’

너무나 위험해 보이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광경이었다. 커다란 오로라와 무지개가 하늘을 수놓고 있다.

조화롭지 않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 누군가가 찰흙을 주무르는 것처럼 점점 형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천지창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정도였다.

이 현상이 무엇이든 간에… 어째서 인지도 설명할 수 없지만… 위대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분명 파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들어지고 있는 것과 같다. 부서지고 있었지만 수복되고 있는 것과 같다.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이 너무나 작게 느껴진다.

“하하….”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습니까?”

“네.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네.”

“어째서 저희가 무사할 수 있는 겁니까?”

저 광경이 어떤 것이든 간에 저런 혼돈 속에 몸을 던진다면 분명히 몸이 찢겨 가루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건 그 어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째서… 어째서 자신들은 무사할 수 있는 걸까.

많은 인파가 걷고 있는 이 땅과 이 길은 어째서 저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일까.

멀리서 보이는 혼돈과는 다르게 가까운 곳은 너무나도 평안하다. 사람들의 얼굴 속에는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언뜻 보이기는 했지만 평안함도 보인다.

굶주리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에서는 담소들이 들려왔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뛰어가는 소리마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기! 대열에서 빠져나가면 안 된다니까요!”

“죄송합니다!”

“꼬맹이들 진짜 혼나볼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채령….’

분명 우효열 파티에 있었던 도둑이었지. 그녀 역시 같이 있구나.

“으휴! 내가 이 나이에 벌써 엄마 노릇을 해야 된다니… 아빠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람. 쳇.”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들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 위화감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해진다.

어째서 이럴 수 있는 것인지… 어째서 이런 게 가능한 건지….

“누군가가 길이라도 인도해 주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는데.’

“네. 윌리엄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네?”

“이 피난민들을 이끌고 있는 건 우효열 님이십니다.”

“네?”

“우효열 님께서 주도적으로 이 피난민들의 행렬을 이끌고 계십니다. 지금 이 그룹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 체류하거나 묶여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말입니다. 지휘본부는 계속해서 유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고… 운이 좋게도 지금까지 이탈자나 낙오자는 없었습니다. 플레이어들뿐만이 아니라 로헨의 원주민들도… 함께 이동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효열 씨가….”

“글쎄요.”

“…….”

“제가 보기에는 윌리엄 님께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조금은 씁쓸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마차에 붙어 있는 창문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 보자 천천히 빛나고 있는 한쪽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

조금씩 조금씩 반짝이고 있는 그 빛은 말 그대로 길을 안내해 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니, 확실히 자신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어떤 이정표를 그리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꽃과 풍요의 성자. 그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낙원이다!”

“신이시여… 낙원이에요!”

“낙원이다! 도착했어. 드디어….”

여기저기에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자신은 아직까지 그 낙원이라는 장소가 보이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낮은 성벽이 쌓여 있는 장소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저런 것이 로헨에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이해할 수 없는 규모의 도시.

커다란 호수를 앞에 지고 있는 장소는 피난민들이 낙원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장소였다.

황폐한 주변과는 다르게 여기저기에 커다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호수에는 물고기들이 튀어 오르고 있다.

동물들이 모여 호수의 물을 나누어 마시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저게… 도대체….’

낮은 성벽은 넝쿨에 가려져 있어 여기저기에 꽃이 핀 것이 보였을 정도였다.

당황스럽게도 눈앞에 있는 도시 또한 재해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오아시스처럼, 지옥의 정 중앙에 있는 낙원처럼 말이다.

너무나도 현실적이지 않은 광경에 눈을 커다랗게 뜬다.

마중을 나오고 있는 수인들이 사람들을 부축하는 것 역시 시야에 들어왔다.

“곰 수인 베둠이라고 합니다. 멀리서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당신은….”

“혹시… 윌리엄 님이십니까?”

“네.”

“그렇군요. 이기영 님께 언젠가 찾아오실지도 모른다는 연락을 받았었는데. 이렇게 늦게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기영 님께서 말입니까?”

“네.”

“그렇다면….”

“저희들은 오래전부터 이기영 님께 이 장소를 만들고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가 만든 낙원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대부분은 이기영 님께서… 아! 이 장소의 이름은 ‘파라디소’라고 합니다.”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재해도, 처음 보는 도시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모든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계셨던 것이었을까.’

노을빛의 군주와의 마지막 전투를 기점으로 대륙에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걸까. 이 모든 것을 만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게 밝은 얼굴로 언제나 웃는 얼굴로… 아픔을 담은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것들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자기 자신을 결코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이들을 위해… 이런 것들을….

눈동자는 천천히 빛나고 있었다.

괜찮다는 듯이 말이다. 자신을 위로하듯이 말이다.

“좋은 분이셨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자. 꾸역꾸역 눈물이 눈을 비집고 나왔다.

낙원이라 불리는 장소의 앞에서 허물어져 그만 어린아이처럼 엉엉 눈물을 쏟고 있었다.

“흐윽… 흑….”

“윌리엄 님.”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치 강둑이 무너진 것처럼 떨어지는 눈물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담담한 척했던 것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사실은 마차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엉엉 눈물을 흘리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괜찮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니었다.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그의 희생과 헌신을 존중해 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었다.

슬픔을 억누르는 것이 자신이 보여줘야 할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했지만 윌리엄이라는 인간은 그렇게 성숙하지 않다.

아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 감정의 성벽은 모래성처럼 너무나도 쉽게 허물어진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는 가운데 자신 혼자만 엎드려 오열하고 있었다.

“아… 흐윽… 흐으으윽….”

이 장소는 성자가 남긴 유산이었으며.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성소였다.

고전 속에 나올 것만 같은 성인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충족감과 이 장소가 주는 경건함이, 이 신성하고도 아름다운 대지가 너무나도 자신을 슬프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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