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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43화 (1,24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43화

파란 유소년 교육시설(12)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진 군사가 이쪽을 돌아보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려준 것은 당연지사.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겠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녀석이 돌발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꼬맹이들에게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변명을 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확실히 진 군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또 여기서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이기영’이라고 말하는 선택지도 정답이 아니다.

현성이가 치료받고 있는 병원에 함께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순응하거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일이라고 말해놓기도 했으니까.’

깽판을 치고야 싶겠지만 일이라 이미 선을 그어 놓았으니, 서로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는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당장은 나쁜 아버지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별다른 리액션을 취하지 않는 놈이 보인다. 두고 보자는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쏴대고 있는 것이 전부.

결국에는 ‘제길’이라고 중얼거린 이후에 빠르게 밖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

“…….”

-네놈.

-조심히 들어가세요. 진 군사님. 덕분에 큰 힘이 됐네요.

-뭐 같지도 않은 같잖은 짓을…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하는 게 좋을 거다.

-유치하게 왜 그러세요. 저는 지금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상태라고요. 진 군사님도 똑같이 나오면 안 되죠. 어린애랑 싸우고 싶어요? 그리고 우연이 일어난 일을 저한테 떠넘기시면… 욕한 것도 군사님인데…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

-우연? 퍽이나 우연이겠군.

-아무튼 들어가세요. 실적평가 기대하고 있을 게. 결과 좋으면 예산도 팍팍 밀어주고….

이미 차단했다고 했었던 통신 채널을 열어놓은 것을 보니 녀석도 이죽거리고 싶기는 한 모양.

한 달 후에 있을 회의에 정말로 무지개 솜사탕이 올려져 있을 것 같은 불안감이 있기야 했지만 당장은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다소 충격을 받은 듯한 김명원과 아릴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원래 사연 있는 빌런은 세탁이 국룰이자너.’

싸가지 없게만 보였던 그 녀석,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오만하고 자만심 강해 보였던 그 녀석, 공화국에서 자라 인간미 따위는 없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묻지 않을 것 같았던 그 녀석이 숨기고 있었던 작은 비밀.

녀석이 정말 나쁜 녀석일까? 모든 것이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발버둥은 아니었을까?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흐름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한 단락의 막이 내려가고 다음 막이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세상 모든 일이 예상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김명원의 피에 파란의 DNA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둘러 퇴장하려던 진청을 김명원 꼬맹이가 붙잡는다.

“당신….”

“…….”

“그게 할 소리입니까!”

‘아니… 시바. 명원아. 당찬 건 좋은데….’

“당장 사과해.”

“뭐…?”

“지금 당장 그 말을 취소하고! 진영에게 사과하란 말입니다.”

이글이글 불타는 김명원의 눈빛에 나조차도 민망해진다. 웬만하면 진청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반성이라는 걸 하게 된다.

-제길. 이기영. 이 자식 좀 어떻게….

-잠… 깐만요.

장담하건대 진 군사는 어린아이들이랑 그다지 친하지 않다. 녀석이 어린아이와 단둘이 있는 장면은 상상하기 힘들다.

뭔가 생리적으로 거부한다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진 군사의 소매를 붙잡고 어김없이 파란의 DNA를 폭발시키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며 당황스러워하는 진청의 얼굴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온다.

웬 꼬맹이가 갑자기 분노를 담아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으니 이 새끼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아니… 이건 예상 못했는데. 진짜… 진짜로 미안해요.

-제길 지금 사과가 문제가 아니라 이 꼬맹이 좀… 제기랄! 이 자식 좀 어떻게….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이건….”

“어떤 사연인지는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장 사과하세요. 단순히 아버지라고 해서 폭언을 할 권리는 없습니다.”

“일단 나는 저 녀석의 아버지가….”

“으윽! 웃기지 마! 그런 식으로 회피할 생각이야? 저게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1차 시도 실패.

“제길. 설명하는 것도 지겹군.”

“당신!”

-그냥 뿌리치고 나가요. 괜히 어리바리 타지 말고.

-제길. 이기영 이 개자식. 제기랄….

-이, 이번 거는 미안해요. 내가 진짜 예산 많이 챙겨 줄게. 진짜.

하지만 2차 시도에서는 그냥 힘으로 김명원을 뿌리치는 것에 성공할 수 있었다.

“거기 서!”

라는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마냥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사라져 버렸다.

-제기랄! 이 개자식!

-이건 예상 못 했어요.

-웃기지 마라! 제길! 제기랄! 이런 거지 같은 꼴을 겪게 하다니. 네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상관없다만 제발 이런 개 같은 짓거리에 나를 끌어들이지 마라!

-군사님이 여기 찾아왔잖아요! 딱히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는데….

-그걸 말하는 게… 제길! 말을 말아야지. 제기랄. 찾아오는 게 아니었다. 제길.

-일, 일단 이건 없었던 일로 해드릴게.

이후에는 아무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색함이 감도는 장내. 김미영 팀장, 아릴과 함께 산책을 나온 녀석이 조용히 침묵하는 것이 보였다.

뭔가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을 본 것 같았으니 말을 걸기 어려울 것이다. 심지어 사이가 좋지도 않았으니 위로하거나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겠지.

조금 더 성숙했다면 올바른 방법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녀석들은 아직 어린아이들이었다.

김미영 팀장만이 “도련님….”이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침묵을 깬 것은 김명원도, 아릴도 아닌 진영. 이해할 수 없는 독기와 자기혐오로 얼룩진 얼굴로 녀석이 입을 열었다.

“누가 네놈에게 끼어들어도 된다고 했지?”

조금은 차가운 말에 아릴이 크게 외쳤지만….

“뭐?! 말이 심한 거 아니야? 명원이는 어디까지나 널 위해서….”

“도대체 뭐가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주제넘은 놈들이… 나를 동정하는 거냐? 이제… 속이 시원한가? 이런 꼴을 보게 되었으니 기쁘겠군. 더러운 교국놈들.”

“그게 아니라….”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그리고 오늘 본 것 역시 잊어라… 이건 경고다. 혹여나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면… 기필코 네놈들을 부숴버리겠다.”

진군사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죄였다.

“그런 말을 듣고서도….”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도… 도련….”

“너도 마찬가지다. 리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은 것은 당연지사. 사실상 더 이상의 대화를 하기 싫다고 표현한 셈이었다.

이 이후는 김미영 팀장님에게 달려 있다. 친해지라고 말은 해놨지만 정말로 나름 가까워진 것 같은 모습이었으니 이후의 전개는 맡기는 게 흐름상 맞는 것 같았다.

미리 이야기를 해놓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야기를 짜맞출 능력이 있을 것이다.

침대에 누워 여신의 손거울을 켜자 아니나 다를까 김미영 팀장과 꼬맹이 두 명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는 모양인데 할 말을 잃고 있는 녀석들. 심지어 김명원은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남 일인데도 불구하고 진 군사의 폭언에 저리 분노해 주고 있다니….

‘쟤는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네.’

아들내미의 모습에 김미영 팀장님도 꽤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애가 드라마틱한 것은 걱정이 되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공화국 꼬맹이들에게 비하면 녀석은 양반이었다.

적어도 어둠의 마력 같은 것에 지나치게 흥분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계속되는 조용한 침묵이 부담스러웠을까.

아릴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칫. 우리가 보고 싶어서 본 것도 아닌데….

-…….

-괜히 미안하고… 찝찝해지게… 차라리 안 보는 게 좋을 뻔했어… 방금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다니까. 내가 들은 게 정말 맞는지도 모르겠고… 그, 그렇지 않아? 명원아?

-응….

-짜증 나… 공화국의 상징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

-그림자의 영웅이라면서… 상징이라면서… 어떻게 자기 아들한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그렇게 공화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진영이 불쌍해… 세상에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녀석이 조금 얄밉고 싸가지 없다고는 해도 그 누구도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돼.

-…….

-이래서 미디어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는 믿으면 안 되는 거야. 분명히 나쁜 사람일 거야. 가족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랏일을 할 수 있겠어. 공화국의 영웅? 흥. 아동학대범 주제에… 내가 진영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야.

계속해서 혼자 횡설수설 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계속되는 수다도 이 침묵을 환기시켜주지는 못했다.

조용히 자리를 옮기며 녀석들만 사용하는 비밀장소에 도착했을 때. 김명원이 김미영 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리나.

-네.

-혹시 무슨 일이 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네가 알아서 뭘 어쩌려고 그래.’

어른들의 도움 없이 청소년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거나 나서는 것은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일이다.

이 새끼가 사연을 들어서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본인 나름대로는 들을 각오를 마쳤는지 조금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장착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당황하는 것은 오히려 김미영 팀장 쪽. 무슨 사연을 말하라는 건지 도대체 뭘 이야기해 줘야 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부탁해. 리나. 어렵겠지만 꼭 말해줬으면 좋겠어.

-죄송합니다.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부탁이야.

-명원이 말이 맞아. 리나.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야. 솔직히 우리가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 멍청이를 이해해 보고 싶어.

‘이해하지 마.’

일단 김미영 팀장은 묵비권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꼬맹이들의 뜨거운 성원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몇 번의 고민 끝에… 결국에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자세한 것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어디까지나 저는 도련님을 모시는 사람일 뿐이니까요.

-…….

-도련님께서는 그저… 군사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게 말이 돼? 그 녀석이 인정을 안 받으면 도대체 누가 그 군사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건데? 조금 짜증 나기는 하지만 그 녀석은 천재야. 신이 내려주신 재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천재. 정하얀 님이 하신 말씀 기억 안 나?

-그것은 재능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악몽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김미영 팀장이 침을 한 번 삼켜 넘긴 이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도련님의 어머님… 그러니까 주인마님은….

-뭐?

‘뭐?’

-도련님에 의해, 도련님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아니… 그건 너무 급발진….’

완전히 처음 듣는 이야기.

-도련님께서 견뎌내셔야 했던 저주받은 힘, 그것을 품고 있는 일족의 이야기입니다.

-…….

-…….

‘팀장님 무슨 작가세요?’

급변하는 스토리텔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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