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53화
파란 유소년 교육시설(22)
클라이막스로는 조금 이른 타이밍이었지만 전장의 분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트라오레 교수의 뒤로 불길한 검은색 빛 여섯 개가 튀어나온다.
각각 육망성의 꼭짓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악마소환의 전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불길했다.
물론 악마가 실제로 튀어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면 간단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대륙멸망의 날.
콰아아아아아아 하는 귀를 때리는 굉음과 함께 검은색 기둥이 하늘을 꿰뚫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음울한 마력이 사방으로 요동치고 엄청난 풍압 때문에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다.
마치 몸이 밀려 나갈 것 같은 느낌에 모두들 서로를 붙잡고 의지하고 있었다.
여느 멸망물이 그렇듯 이미 배경이 회색으로 뒤바뀌어 있다.
꼬맹이들의 표정 또한 절망으로 물들고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
수많은 사선을 뚫고 마침내 트라오레 교수의 앞에 당도했지만 예정된 멸망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과 절망감,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뒤덮을 만한 본능적인 공포와 두려움, 파란 DNA의 주인공 김명원도, 그렇게 자신감 넘쳤던 펠리스 하네스트도, 패기 있었던 샤슬갈 트리오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도, 멍하니 세상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끝났어.”
“정말로… 끝난 거야.”
“흐윽… 흐으윽….”
마음 약한 놈들은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하고 모두들 절망이 가득한 대사들을 중얼거린다.
“어떻게… 하지….”
모두가 포기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로 자신들의 손을 떠나갔다고, 자신들의 역할은 여기서 끝이 난 거라고, 열심히 했지만 결국에는 대륙의 멸망을 막을 수 없었다고 말이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는,
모두가 포기하고 있었다.
그래. 단 한 명, ‘그 녀석’을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시바 그게 바로 나자너.’
진영은 어렸을 때부터 포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어머니를 잃은 그 순간에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도, 자신이 저주받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도.
이 캐릭터는 포기라는 것을 학습하지 못했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있었을 때, 녀석만 유일하게 꼿꼿하게 서 있다.
모두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을 때, 세상 억울한 운명을 지닌 채로 태어난 그 녀석 하나만 유일하게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딘다. 거친 풍압과 불길한 마력의 앞을 향해 걸음걸이를 옮긴다.
물론 쓴소리는 덤이었다.
“언제까지 거기에 자빠져 있을 생각이냐. 모자란 놈들.”
“…….”
“겁을 집어먹은 모습이 꼬리를 내린 강아지 같구나.”
“…….”
중요한 캐릭터는 원래 뒈지기 전에 주조연들에게 한마디씩 하고 가는 것도 국룰이었다.
“…….”
“…….”
“빅토르 갈리아. 날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그 기개는 도대체 어디로 갔나?”
그 대사에 빅토르 갈리아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새끼 여우 슬라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꼴이라니, 공화국의 여우가 그 꼴을 보면 퍽이나 좋아하겠군. 그 어떤 상황에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 네놈의 가문이 가진 가치가 아니었던가.”
슬라바 역시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샤오 란. 일어나라. 절망하는 모습은 네게 어울리는 모습이 아니다. 네 어머니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웃으며 달려들었을 거다.”
샤오 란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교국의 위대한 24가문, 희생과 빛의 성자의 축복을 받은 66명의 아이 중 하나. 하네스트 가문의 이름이 울겠군. 멍청한 펠리스 하네스트.”
“누… 누가 멍청하다는 거냐.”
“포기하지 마라. 일어서서 네 가치를 증명해라. 하네스트의 꼬리표를 떼고도 네놈이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 달란 말이다.”
펠리스 하네스트는 분한 얼굴이었다.
“언제까지 거기에 앉아 있을 생각이지. 김명원. 파란에서 도대체 뭘 배운 건지 모르겠군.”
“진영… 너….”
“멍청한 낙제생. 투지 정도는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만… 지금 보니 형편없는 모습이로군. 내가 널 잘못 본 거였나.”
녀석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리나. 뒤를 잘 부탁한다.”
“도… 도련님.”
김미영 팀장의 연기력은 그다지 성에 차지 않았다.
다소 말도 안 되는 타이밍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사실상 샤슬갈 트리오라면 몰라도 김명원과 펠리스 하네스트와는 저런 멘트를 칠 만할 시간과 서사를 쌓지 못했다.
예정되어 있었던 여러 가지 이벤트를 갑작스레 스킵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김명원이랑은 그다지 친하지도 않다.
내 기준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꼬맹이들의 사회에서는 함께 싸우면 친구가 되는 것이 국룰 아니었던가.
말 몇 마디를 주고받고, 서로의 슬픈 과거를 알고만 있어도 이 새끼들은 금방 친구가 된다.
심지어 싸우고 난 바로 다음 날에도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을 느끼고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 녀석들과 나는 베스트프렌드였다.
녀석들을 자극시킬 수 있을 만한 몇 마디를 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소년만화를 통째로 들이켠 것 같은 녀석들은 두려움을 이겨내려고 하고 있다.
본능적인 공포에 움직이지도 않은 다리를 두드리며 진영과 함께 나아가고 싶어 하는 놈들이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는 내가 주인공이었다.
‘어딜 감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태풍 속으로 스스로 걸음을 옮기는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지만 진영의 얼굴은 의연했다.
진영이 뭘 하려고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 이 꼬맹이들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저곳으로 향하는 짓보다 멍청한 짓은 없을 거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너… 이 자식 뭘 하려고 하는 거야.”
“진영!”
“진영 님! 저희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진영 님!”
“흥.”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열화와 같은 성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느덧 육망성 검은색 빛은 악마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설정상 아직까지 완전히 소환된 상황이 아니었지만 초월자의 편린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돕겠다고, 함께 하겠다고 소리치던 이들 역시 필멸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특히나 진영의 몸에서 거대한 검은 불꽃이 용의 형상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완전히 자신들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무대는 옮겨졌다. 녀석들과 트라오레의 싸움이 아니라 진영과 소환되기 직전의 군단장의 싸움으로, 필멸자들의 싸움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이들의 싸움으로 말이다.
검은 불꽃의 용과 군단장의 편린이 뒤엉킨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던 군단장의 편린이 상처 입고 커다란 소리를 외치고 있다.
[어리석구나….]
“…….”
[마력의 저주를 받은 아이야. 어찌하여 나를 막아서는 것이냐. 너와 나의 힘은 결국 같은 곳에서 태어났거늘….]
“쓸데없는….”
[길을 열어라. 그리하면 네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리라. 복수를 원하느냐. 아니면 아비에게 인정받는 것을 원하고 있느냐. 재미있구나. 네놈의 마음은 이토록 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니….]
“대답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로군.”
[어차피 네 힘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저주받은 아이야. 이 싸움의 끝을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느냐.]
“…….”
[가치 없는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저버리는 것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가치 없는 짓이 아니다. 내 친구들을 지키겠다. 라는 오그라드는 대사는 치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을 테니까.
공화국의 어린 천재가, 저 오만방자하고 재수 없기 짝이 없는 녀석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저 초월적인 괴물과 마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처음 검은 불꽃의 용을 목도했을 때만 해도 주먹을 꽉 쥐고 흥분했던 꼬맹이들이 지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연극의 장르가 소년물이 아니라 유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말 그대로 검은 불꽃의 용을 소환하기 무섭게 진영의 한쪽 팔의 피부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내부를 태우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신체에도 그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눈에 띌 정도로 급속도로 망가지지는 않고 있었지만 내 몸이 무너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저주받은 아이야.]
“네놈이 다시 밑바닥 속으로 기어들어 갈 때까지.”
[그 기세는 참으로 좋구나. 아쉽구나. 아쉬워. 조금이라도 소환이 온전했더라면 내 직접 너를 품었을 것을….]
“웃기는… 군….”
[쓸데없는 저항이다. 어린 나이에 저주받은 마력을 다루는 힘은 놀랍기 짝이 없다만….]
검은 용이 놈의 팔을 물어뜯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 다시… 한번 지껄여 봐라.”
[굳이 벌주를 마시겠다는 것이냐!]
‘아직 미성년자라서 술 못 마시자너. 웬 무협풍이야. 이거.’
“나는 네놈을 다시 지옥 밑바닥으로 처박아 놓을 거다. 멍청아….”
처절하고도 처절한 전투였다.
그 말밖에는 이 전투를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의 사정상 피가 튀기고 신체가 절단되고 내장이 여기저기 나 뒹굴고 있는 싸움은 아니었지만 흑염룡과 군단장의 편린이 부딪치는 모습은 입을 크게 벌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감독 작품 중에서도 특히나 손에 꼽을 만한 퀄리티였기 때문에 도대체 언제 이렇게 특수기술이 발전했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정도.
내가 하는 일은 그냥 가만히 서서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젓거나, 약간 힘든 척하고 아픈 척하는 것뿐이었지만 이 특수효과들은 현 대륙의 마법증강현실이 상상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덧 인간의 현상을 벗어나 괴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군단장의 편린이 검은 용의 날개를 움켜쥐고 찢는다.
용은 놈의 남은 팔을 다시 물어뜯고 허공에서 나뒹군다. 점점 더 명확하게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검은 용의 입에서 커다란 숨결이 쏟아지고 군단장의 편린은 그 숨결을 그대로 뒤집어쓴다.
[네놈이! 감히!!]
“…….”
[감히! 주제도 모르고 이 몸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네놈을 지옥 밑바닥에 처박아 놓을 거라고.”
[이 건방진 필멸자가!!! 네놈이야말로 지옥 밑바닥까지 처박아 주마!!!]
“웃기는 소리, 나는 네놈보다 강하다.”
‘멋있는 대사였어.’
그 말대로 잠깐이지만 용이 편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런 놈들에게 비열함은 필수 덕목, 꼬맹이들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것마저도 흑염룡에 의해 무위로 돌아간다.
물론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입에서는 자꾸만 검은색 피가 울컥울컥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본래는 붉은색을 연출해야 했지만 이마저도 어른의 사정으로 검은색으로 분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소중한 어린 팬들은 자지러진다.
“진… 진영 님!”
“진영… 진영!!”
“꺄아아아아악! 진영 님!”
“호들갑 떨지 마라.”
펠리스 하네스트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분량을 톡톡히 챙기고 있었다.
“죽지 마라. 네놈. 이런 곳에서 죽으면 절대 용서 안 할 테니까.”
‘전형적이네.’
“내가 네놈을 쓰러뜨릴 때까지 절대로 죽지 말란 말이다! 내 말 알아들었나? 알아들었냐고! 진영! 흐윽… 끄으윽….”
딱 라이벌이 할 법한 대사였다.
질질 짜는 것만 빼고 말이다.
“제길… 움직여… 움직이라고! 움직여! 내 다리…야! 제발….”
한쪽에서는 김명원이 열심히 자신의 다리를 내려치는 중, 그렇다고 해도 움직여질 리가 없었다.
군단장의 파편의 피어 때문에 몸이 굳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상은 마비가 걸려있는 것뿐이었으니까.
어차피 녀석들이 도움을 주더라도 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가만히 보기 어려웠겠지. 친구가 고군분투하는 걸 보고 싶은 녀석들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꼬맹이들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
아무리 성장통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꿈과 희망을 가져야 할 나이에 이런 피폐물을 보면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리고 만다.
검은 불꽃이 시야를 꼬맹이들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리고, 여러 가지 특수효과와 음향이 쿵쾅거리고 있었을 바로 그때였다.
-이… 이 개자식! 지금 당장 멈추지 못해?
“…….”
“…….”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