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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68화 (1,26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68화

1회 차 희라(2)

물론 아예 불안한 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회 차 희라가 어린 꼬마를 학대하는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별별 일이 전부 일어나고 있는 회차였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었지만… 최소한 차희라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누나는 심지가 강하니까.’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삶의 방향성이 뚜렷한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김현성이야 이것저것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그녀는 아니다. 내가 아는 차희라는 그 누구보다도 정체성이 뚜렷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으니까.

자잘한 것들이 달라졌다고 한들 큰 물줄기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이 맞자너.’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이 온 것도 아마 오늘 있었던 행사를 망쳤기 때문이 아닐까.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만큼 그게 아니라면 나를 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적당히 시간 때울 만한 이벤트가 필요하다는 거겠지.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희라 누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라파엘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니다.

붉은용병의 단원들이 지나간 이후에도 연신 불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미 확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설득하고 싶어 하는 것이 보였고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이어왔다.

“형. 진짜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괜찮지.’

“저도 걱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세계는 이상해요. 형.”

‘그건 나도 공감해.’

“2회 차의 붉은용병 길드마스터는 어떨지 몰라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방금 붉은용병 단원들이 하는 행동 보셨나요? 여기 있는 녀석들은 정상이 아니에요. 저를 분명히 죽이려고 했어요. 분명히요.”

‘나도 깜짝 놀라기는 했어.’

“이곳의 붉은용병 길드마스터도 놈들과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만약 형이 실수한다거나 반, 반항하거나 한다고 하면 안 좋은 일을 당할지도 몰라요. 최악의 경우에는….”

“괜찮습니다. 라파엘 님. 저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 몇 마디 나누는 것뿐입니다. 당연히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행동이고요. 최소한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테니 믿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소리를 지르면 되니까요. 그럼 라파엘 님이 달려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

“…….”

“네. 당연히 그럴 거예요.”

‘그래, 자신감 좀 가져.’

뭘 그렇게 쫄아 있어. 너는 산전수전 다 겪고 거기 있는데. 맘만 먹으면 나 하나 데리고 도망치는 건 일도 아닐 거 아니야.

날개도 달려 있자너, 여기 애들은 날개 없어요. 날개도 없다고. 날아가면 못 잡아요.

“제가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건 라파엘 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혀… 형.”

“사실 그렇게 무모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살짝 웃어주기.

“무엇보다 시간이 없으니 말입니다. 파티원분들이 어떤 고초를 겪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조금 위험해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

‘김현성도 날 못 말리는데 시바 네가 날 어떻게 말리겠어.’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애초에 이 새끼가 납득하고 말고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적어도 이런 작업을 사전에 쳐놓는 것이 좋다. 갑자기 천막 안으로 난입하거나 하는 개짓거리를 감행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라파엘은 제법 얌전하기는 했지만 한번 뚜껑이 열리면 은근히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김현성 때처럼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죄송해요… 괜, 괜히 저 때문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빨을 털어놓지 않았더라면 난입할 수도 있을 뻔했다.

자신의 무력함을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 슬슬 목이 메어 오는지 내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너무 드라마틱하다. 요즘 대륙에서 유행하는 드라마에 빠진 것일까.

“저… 더 강해질 거예요.”

“…….”

김명원과 펠리스 하네스트와 함께 있어도 별 위화감이 없는 대사를 진심으로 던지는 모습에 이 새끼와의 인연을 끊고 싶어질 정도였다.

“약속드릴게요. 형.”

“…….”

그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 이 새끼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겠다. 손으로 자꾸 얼굴을 닦는 것을 보니 눈물이라도 닦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강해지겠다고 다짐하는 라파엘이었지만 내가 봤을 때는 저 새끼는 이미 성장 한계치에 다다른 지 오래됐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못 박을 수는 없겠지만 아마 눈에 띄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약속… 지키지 못할 것 같자너.’

냉정하게 지금은 녀석과의 약속을 곱씹는 것보다는 희라 누나와의 약속이 더욱더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흙먼지에 한번 나뒹군 상태였기 때문에 이대로 누나를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깔끔한 모습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제대로 된 꽃단장을 하고 싶었지만 씻을 곳도 없어 보이는 이 쓰레기장에서 뭘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대충 흙먼지를 털고 최대한 깔끔한 모습으로 대기하는 것이 전부, 파티원들 역시 여기저기서 정보를 얻기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약속했던 시간에 천막으로 향하자 붉은용병 길드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 1회 차 희라 누나를 별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피부가 참 곱네요.”

“아.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상냥하신 분이니….”

같은 소리들도 들려온다.

물론 제대로 듣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밖에서는 커다란 목소리들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아 계시면 돼요.”

“네.”

기다리고 기다리던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중, 작전 중에 이래도 되나 싶기는 했지만….

‘뭐 지들 일은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실제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은 희라 누나를 포함해 몇몇밖에는 없다.

현재의 캠프가 안전하다고 판단을 내렸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 있을 수 있는 거겠지.

나름대로 규율을 중요시하는 차희라가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일 리는 없을 테니 나름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싸구려 럼주를 동이째로 들이붓고 마시고 있는 인간들이 보인다.

고기를 쌓아놓고 으적으적 뜯어먹는 꼴이 마치 산적 집단처럼 보일 정도, 서로 떠드는 소리가 워낙 커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고 그 누구도 내게 신경 쓰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차희라 역시 마찬가지, 커다란 의자에 기대듯이 누워 계속해서 벌컥벌컥 술을 들이켜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럴 거라면 왜 부른 건지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단언하건대 내가 10년만 더 늙었더라면 이런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거푸 술을 들이붓고 있는 쫄따구들과 그녀의 차이는 옆에 사람을 한 명 더 끼고 있었다는 것.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저 여자가 차희라의 잔을 채우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복장을 보니 희라 누나가 키우는 종자 같은 느낌처럼 보였다. 물론 희라 누나는 기사가 아니었겠지만, 이런 배경에서는 한둘 데리고 다니는 게 이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뭐 제자나… 후계자… 아니면 그냥 시중들어주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무튼 아끼는 사람이라는 건 알겠네.’

당연하지만 질 수 없었다.

‘시바 내 자리야.’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고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이미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술 마시면 저 여자보다 먼저 희라누나의 잔을 채우고.

‘내가 먼저야. 시바. 내가 용병여왕의 정부야.’

입이 심심한 것 같으면 곧바로 입에 안주도 넣어주고.

것도 희라 누나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내가 할 거야. 다 내가 할 거야. 시바.’

당연하지만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하지만 차희라가 단원들에게 내뱉는 농담에는 수줍은 듯이 웃어주는 것은 기본 소양이었다.

“내가 오늘도 허탕 칠 거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지? 검은백조 이 개자식들이 원래 그렇다니까. 언제나 엿 먹일 생각밖에 없는 거야. 그 비열한 정신병자들은… 10일 이내에 끝난다고 말했던 작전이 벌써 89일이나 가고 있는데… 대륙에 쓸 만한 레인저들이 그렇게 없나? 몇 달이 넘게 이 지랄을 떨고 있는 게 우습지도 않냐고. 이러니까 정진호 그 개자식이 기가 살아서 미쳐 날뛰지.”

‘우리 희라 누나 많이 힘든가 보다….’

화를 낼 때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해 주기.

“고작 분대 단위의 여단을 잡으려고 대륙에 내놓으라는 길드들이 다 모인 것도 씨발… 우습고… 참….”

분위기가 씁쓸해질 때는 술잔 가득 채우기.

“곧 성과가 있을 겁니다. 여왕님.”

“꼴이 우습잖아.”

“네. 그 말씀이….”

“씨발. 꼴이 우습게 됐다고!”

갑자기 화난 희라 누나가 거칠게 잔을 집어 던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술잔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감돈다. 아니, 저걸 술잔이 깨지는 소리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몇 미터나 될 것 같은 기다란 테이블 한가운데가 움푹 찌그러질 정도였으니까.

‘누나… 왜 그래. 왜 그렇게 화가 많이 났어….’

떠들썩했던 회식장에 침묵이 감도는 것은 순식간, 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근육돼지들의 꼴이 우습게 보이기는 했지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분위기가 험악해 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화들짝 놀란 여자는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눈치만 보고 있는 중, 저 근육돼지들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쭈구리처럼 조용히 바닥만 보고 있는데, 그녀라고 뭐 어쩌겠는가. 폭군이 화를 내면 당연히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나는 다르자너.’

새로운 술잔을 세팅한 이후에는 다시 가득 따라드려야지.

쥐새끼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간에서 졸졸졸 술이 잔을 채우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다시 한번 차희라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

“…….”

“이 꼬마 빼고 다들 꺼져.”

“…….”

“…….”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인자에게는 눈빛을 쏴주도록 하자. 이제 내가 일인자가 되었다고 직접적으로 알려야 하니까.

분한 눈빛으로 자리를 옮기기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지만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가장 총애를 받는 건 이제 난데.

환한 미소를 띠고 다시금 희라 누나를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그 이후에도 연거푸 술을 들이켜는 희라 누나의 잔에 술을 채우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차희라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것은 시간이 꽤 많이 흐른 이후였다.

“너…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어려졌구나.”

“…….”

“참… 신기하단 말이야.”

‘이 누나 많이 취했나 보네.’

“이제 지껄여봐. 자칭 시간여행자.”

“…….”

“내가 어떻게 죽는다고?”

“…….”

당황하기는 했지만 판단을 내리는 것은 빠르다.

“…….”

“…….”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 온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내가, 지금 보다 더 과거의 시점을 방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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