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70화
1회 차 희라(4)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우리 희라 누나가 어린아이를 목 졸라 죽이는 무뢰배일 리가 없다. 엄밀히 말해 그녀는 광증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 본능에 먹히고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강한 것을 열망한다. 정확히는 강한 개체를 쓰러뜨리는 것을 열망한다.
이 꼬맹이가 희라 누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야 있겠지만 아마 그녀에게 나는 먹음직스럽지 않게 보일 가능성이 크다.
투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더더욱 말이다.
도발하거나 의연한 척하며 그녀를 비웃어 줬다면 모를까.
애초에 지고 들어가며 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를테면 죽일 가치도 없는 녀석의 포지션으로 들어간다면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럴 거지? 그래 줄 거지?’
일단은 최대한 살려달라는 스탠스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답이라고 믿고 있기도 했고, 실제로도 정답이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손에 쥐고 있는 힘을 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부터 힘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까보다 숨을 쉬기가 편해지고 있었다.
‘시바 까딱했다가는 목숨 날아갈 뻔했자너.’
아마 적당히 경고를 해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말마따나 희라 누나가 나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면 복수해 주세요, 누나! 하고 외치기가 무섭게 때려죽였을 테니 말이다.
“켈록! 콜록! 켈록! 하아… 하아… 하아….”
“…….”
“고, 고마워요. 누나.”
“…….”
“서… 서로 간에 조금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희라 누나와 시간여행자의 관계는 호의로만 만들어진 게 아닌 모양, 과거에 어쩔 수 없이 실수를 저지른 전력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그때의 일은 사과드릴게요. 이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과거의 사건은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시간 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쩔….”
“뭐?”
“물, 물론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없죠. 네. 분명히 제 실수가 맞겠죠.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나요. 제가 누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이 시간 선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난 거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제가 왜 누나를 배신하겠어요? 배신한 게 아니라니까요.”
“자꾸만 애매모호한 말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게 네게 좋게 작용하지는 않을 거야. 꼬맹아. 눈으로 보여지는 게 있으니 네가 시간여행자 뭐시기라는 걸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대륙의 시간 선이 붕괴되든 말든지 상관없고… 네가 항상 말하는 대륙의 마지막이 그다지 와닿지도 않으니까.”
“그…렇죠.”
“협력자라는 말도 웃기고 말이야. 엄밀히 말하면 일회성 거래를 몇 번 한 것뿐이지. 나는 네 동료도 뭣도 아니야. 내가 널 살려둔 이유는 어디까지나 네가 내게 뭘 줄 수 있느냐 때문이지. 이해하고 있는 거지?”
“네. 네. 물론이죠. 이해하고 말고요.”
“물론 네가 속과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꼬맹이라는 사실도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글쎄… 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 말에 황급히 희라 누나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 귀엽게 보여서 나쁠 거 없자너.’
하는 심리가 기저에 깔렸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주고받을 때마다 외줄을 타는 것 같은 느낌.
이런 대화는 꽤 익숙하기는 했지만 상대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차희라도 힐끗 나를 바라본 이후에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말해봐. 네가 내게 줄 수 있는 게 뭔지.”
‘미래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건 조금 그렇다 치더라도….’
고민해 볼 수밖에 없는 발언이었다.
당장 유용한 정보가 뭔지 알 수 없으니 제대로 입을 털 수가 없었다.
너무 미래에 대한 정보는 그녀에게 쓸모가 없을 테고, 모든 걸 세세하게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정진호가 어떻게 궁지에 몰리는지도 모르고 있다.
녀석들의 위치도 알지 못하고 있는데, 도대체 뭘 알려줄 수가 있을까. 그냥 아무렇게나 이빨을 털어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했지만….
‘너무 위험부담이 큰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이 시점보다 미래로 타임워프 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붉은용병 전체를 적으로 만드는 건 무리수였다.
사실상 첫 번째 실수를 눈감아준 것만 해도 그녀로서는 내게 많은 것을 양보한 셈이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누나의 증상을 지연시킬 수 있는 포션을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라는 말이 정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치료할 수 있다는 건 아니에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미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으니까요. 하지만 적어도 증상을 늦출 수는 있을 거예요.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아마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시간은 조금 걸릴지도 몰라요. 당연하지만 이 시간 선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 비밀로 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고요.”
“기왕 미래의 물건을 가져다줄 거라면 더 좋은 물건들은 없나?”
“그건 무리예요, 누나. 지금 제가 가지고 있지도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에요. 현시점에서 지나친 영향을 줄 수 있는 물건들을 풀면 단기적으로는 어쩔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거예요. 그게 누나한테 도움이 될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 확신할 수도 없고요.”
“…….”
“그나마 위험도 E등급으로 분류된 물약 정도라면 괜찮지만… 솔직히 이것도 윗분들의 허가를 받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요. 하지만 누나를 위해서라면 힘써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귀여워해 달라고?”
“누나가 귀여워해 주시면 저는 좋죠.”
“…….”
“…….”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쁘지는 않네.”
“그렇죠?”
“요즘 들어서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있어서 걱정되던 차였으니까. 그럼 이 건으로 네 친구들의 신원은 보장해 주도록 하는 게 좋겠네.”
“역시! 감사해요. 누나!”
“그럼 이 건은 이걸로 해결하는 걸로 하고… 남은 빚을 계산해야겠네.”
“…네?”
“거래잖아. 그때 우리를 여단에 팔아넘긴 거… 보상받아야 하지 않겠어?”
“아… 그러니까 그건….”
차희라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진호를 데리고 와.”
“…….”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내 앞으로 데리고 오라고. 어차피 그 새끼. 여기서 뒈진다며.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죽을… 확률이… 있다는 거지… 미래는 언제나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머리 아픈 말은 됐고, 그냥 데리고 오라고… 아니, 장소는 상관없으니까. 그 개자식이랑 나랑 싸울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봐. 어차피 뒈질 놈. 누가 죽이든 상관없는 거 아니야? 네가 쉴 틈 없이 중얼거리던 시간 선이니 균형이니 그런 거에도 영향이 가지 않을 거고. 그렇지 않아?”
‘그건 그럴 수도 있지만….’
본래 수백 발에 화살에 맞고 뒈지도록 예정되어 있는 운명이기는 했지만, 차희라에게 죽는다고 하더라도 큰 영향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 시점의 정진호는 모든 쓰임새가 끝난 이후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녀석을 차희라가 있는 곳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 외에 협상의 여지는 없어. 솔직히 너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고….”
‘충분히 어려운 일이야. 시바.’
“저도…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요.”
“그래? 그럼 찾으면 되겠네.”
‘시바 말이 안 통하네.’
“한번 노력해 볼게요.”
“아니야. 노력이 아니라 무조건 해결해 줘야 돼. 파란 길드보다 먼저 말이야.”
“파, 파란 길드도 여기 와 있나요?”
“캠프는 다르지만 어딘가에 있겠지… 이런 이벤트에 그놈들이 빠질 것 같아? 특히나 우리 김현성 백작님. 그 새끼는 정진호랑 여단이라면 이를 갈고 있을 텐데… 뭐가 어찌 됐든 간에 나는 내 먹잇감을 뺏기기 싫다는 거야. 이해하지?”
“네. 이해는 하죠….”
“그럼 나가봐. 대충 대화는 끝난 것 같으니까. 그리고….”
“…….”
“기대할게. 꼬맹아.”
축객령이었다. 여기서 된다, 안 된다로 입씨름하기도 그렇고, 더 이상 협상할 마음이 없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해야 할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냥 무시해도 상관은 없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차희라를 피해 도망 다녀야 하겠지만 말이다.
일단 원하는 건 얻어냈다. 확실한 신원을 얻었으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한 셈이었다.
곧바로 천막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다가오는 라파엘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이 새끼는 귀찮게.’
당연히 곧바로 선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또 이것저것 물어올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지금 생각해 볼 게 조금 있어서… 일단 원하는 건 얻어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라파엘 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형?”
“회의는 내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서 쉬세요.”
“아… 형!… 형 잠깐!”
‘시바 이거 머리 아프자너.’
라파엘을 가볍게 무시한 이후에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눈치채기 전에 세팅을 해놓는 게 가능한 일이기는 한가?’
여러 가지로 고민해 볼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내가 알기로 김현성은 직접 정진호의 죽음을 지켜봤었다.
조금은 공포스러운 광경이라고 직접 평하기도 했었으니 여신의 거울도 없는 이곳에서는 직접 지켜보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현성보다 먼저 일을 처리해 줬으면 하는 희라 누나의 주문은 나와도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내가 김현성이랑도 마주친 적이 있을까?’
“당연히 없겠지.”
차희라와는 다르게 김현성은 그 누구보다도 회귀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건 많은 위험성을 가지게 된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무턱대고 접촉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김현성은 1회 차의 시간여행자 꼬맹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2회 차에서 시간여행자를 찾아보겠다고 설친 적도 없다.
만약 내가 김현성이었다면, 아니, 그 누구라도 시간여행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회귀한 직후에 시간 여행자를 찾아보려고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내 모습을 직접 보고서도 시간 여행자를 떠올리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비밀리에 도움을 준 정체불명의 꼬맹이로서 활동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김현성은 바보가 아니다. 그냥 조금 멍청할 뿐이다.
‘김현성이랑 마주치는 건 무조건 피해야 돼.’
만약 맨 얼굴로 녀석과 마주친다면….
2회 차의 시작과는 상관없이 미래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빨리 돌아가야겠어.’
이미 라파엘 파티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니, 육망성이 발견되었을 때부터 일이 꼬여가기 시작했다.
타이밍 좋게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파란 길드다!”
‘시바.’
“파란 길드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