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71화
김현성 백작(1)
반사적으로 몸을 숨겨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시바.’
뭐가 됐든 간에 눈에 띄는 게 별로 이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여기는 왜 와?’
심지어 마주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때 목소리가 들려오니 당황스러워 참을 수 없었을 정도.
잘 생각해 보면 언제나 내게 엿을 선물해 주는 것은 파란 길드 놈들 아니었던가.
1회 차에 놈들도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만큼 일단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1회 차의 녀석들이 궁금했기 때문에 일단은 더러운 모포를 뒤집어쓰고 괜스레 주변을 서성거린다.
이미 파란 길드가 왔다는 소식에 캠프는 무척 떠들썩해지는 중.
그동안 다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인파들이 갑작스러운 파란 길드의 방문을 지켜보고 있었다.
붉은용병도 예외는 아니다. 방금 전까지 놀고 있었던 놈들이 어느새 대열을 갖추고 야밤에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기를 들고 경계하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니, 시바 분위기 왜 이러냐고.’
때마침 붉은 용병의 간부로 보이는 녀석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꽂혀온다.
“언제든지 전투에 들어갈 수 있도록 대기해.”
‘전투 준비를 왜 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는 거야. 개 같은 놈들이….”
“레인저는 씨발 도대체 뭘 하고 있었어? 저 새끼들이 여기까지 들어오는 동안….”
자세히 보니 파란 길드원인지 뭔지 모를 놈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합동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경계하는 것이 느껴진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1회 차의 파란은 지금과 같이 소수정예가 아니었던 모양인지 수준이 낮아 보이는 녀석들도 눈에 띈다.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지금의 파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기 때문에 녀석들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로 정규군을 보고 있는 듯하다. 빽빽하게 인원을 채운 것 같은 모양새도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진다.
깃발에 그려진 심볼이나 인장도 지금과는 차이점이 있었고, 장비도 획일화되어 있었다. 몇몇 간부를 제외하고는 다들 같은 장비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길드 내에 있는 등급에 따라 차별화를 둔 건가?’
나쁜 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나름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지금과 방향성은 다르기는 했지만 파란은 저 나름대로 길드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무려 제국의 백작위를 받은 김현성이 길드마스터였으니 인기가 많을 만도 했지만 저 많은 인원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당연하지만 김현성이 컨트롤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혜진 말고도 다른 유능한 행정 인원이 포진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간에 녀석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차희라가 있는 붉은 막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
당연하지만 붉은용병이 그 꼴을 두고 볼 리 만무했다.
이 새끼들의 태도는 동맹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부터 사이가 안 좋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사이가 좋지 않은 건 확실한 것 같았다. 심지어….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이 개자식들이!”
웬 부랑자처럼 보이는 놈이 파란 길드원들을 향해 오물을 집어 던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시바 뭔데. 이게 뭔데?’
“당장 꺼져! 이 배신자 새끼들!”
“이 염치도 없는 구역질 나는 새끼들이!”
‘아니, 뭐야. 분위기 왜 이래?’
“역겨운 새끼들! 퉤! 이 죽일 놈들!”
한 사람뿐만이 아니다. 분위기에 취했는지 여기저기에서 파란 길드를 향해 오물을 집어 던지기 여념이 없다. 파란 길드는 또 그걸 아무 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샤를롯트의 개들이 오셨단다! 하하하하핫!”
“꺼져! 이 개새끼들아!”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시바 내가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자너. 현성이가 이야기도 안 해줬었자너.’
“당장 꺼지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저 개자식들이….”
그래도 같은 편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칼을 들고 설치고 있지는 않았지만 표정만큼은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들 것만 같다.
‘린델 내에서 여론이 별로 좋지 않은 건가?’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른 건 다 둘째 치고 일단 샤를롯트의 개라고 표현한 부분만 들어도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뻔한 이야기다. 소환자들과 제국 간의 분쟁도 있었다고 이야기를 직접 전해 들었으니, 정황상 제국에게 손을 들어준 김현성이 좋게 보일 리 만무하지 않은가.
물론 시기상 그 분쟁은 끝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악감정들이 쌓였을 테고, 거기에다 가면 쓰레기들이 장작을 집어넣었을 거라고 가정한다면 녀석들이 고립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 당시에는….
‘지혜 누나가… 제국 쪽에 붙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어쩌면 김현성을 백작으로 임명한 것 역시 지혜 누나가 그린 그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이 장소가 붉은용병과 그 산하에 있는 길드 클랜이 관리하는 곳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두 길드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 정도 적의를 보인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갈등의 골이 깊어질 만큼 깊어진 것이다.
‘근데 우리 현성이는 어디 있냐고….’
심지어 녀석은 인파 속에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안 그래도 녀석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 터라 사람들 사이에 꾸역꾸역 얼굴을 비집고 넣어 파란 길드원들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혜진이는 없네. 이미 죽고 난 이후인가?’
어? 황정연은 있다.
후방에 안경을 쓴 마법사가 눈에 띈다.
‘아니, 그래서 김현성 어디 있냐구요.’
파란 길드원들이 척척 소리와 함께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인파 속에서 한 인형이 걸어 나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현성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걸어 나오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검은색의 긴 모피 망토를 입고 등장한 것은 회귀하기 전의 1회 차 김현성.
조용히 가라앉은 눈이 괜스레 눈에 띄었다.
겉모습은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장담하고 말하건대 차희라 보다 더욱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마치 아무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은 눈. 표정을 보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차갑다.
‘김현성 백작님 포스 오지자너.’
계속해서 오물들을 집어 던지던 녀석들도 일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귀족모독죄로 잡혀갈까 걱정하는 것보다는 그냥 김현성에게 압도당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독기와 악의로 가득 차 있는 종류가 아니다. 지금의 둠현성이 불같은 느낌이었다면 저건 마치 얼음 같은 느낌이었다.
서브컬쳐에서 흔히 말하는 북부 대공 같은 모습인지라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이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바라봤을 정도였다.
‘그 지랄을 겪고도 얼굴에 상처 하나 없는 것도 신기하네.’
차희라처럼 눈에 띄는 상처는 없어 보였지만 아마 망토 안쪽은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
갤러리들이 녀석의 등장에 조용해졌을 때, 김현성이 조용히 말을 이어왔다.
“차희라 님.”
“…….”
“차희라 님.”
“…….”
“차희라 님.”
그 목소리에 붉은색 천막이 열리며 용병여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바. 이 집 드라마 한번 꿀잼이자너.’
흥미진진해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종류는 조금 다를지는 몰라도 다른 갤러리들 역시 침을 꼴깍꼴깍 삼켜 넘기며 현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군가 검을 뽑는다면 너도나도 검을 뽑고 주문을 외울 듯 분위기가 터질 것만 같다.
“…….”
“…….”
“우리 제국의 자랑. 린델의 천재 검사 김현성이 여기서 왜 이러고 계실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글쎄 난 모르겠는데…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의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우리 김현성 백작님께서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게 맞는지 몰라… 그것도 이 수많은 병력들을 데리고 말이야.”
“…….”
“누가 보면 전쟁이라도 하자는 줄 알겠어. 일종의 무력시위… 뭐 그런 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저… 잠시 후에 작전이 진행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차희라 님.”
“그걸 누가 몰라? 나도 참가하고 있잖아. 그 작전.”
“제가 보기에는 단독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단독행동이라니… 섭섭하네. 나도 검은백조를 비롯한 다른 길드들과 엄연히 상호협력이라는 걸 하고 있는데 말이야. 또 네 작전에 참여하라는 개소리할 거면 지금 당장 꺼져, 이 새끼야. 사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
“…….”
“녀석들의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 말을 몇 번째 듣는지 모르겠네. 그럼 잡으면 되잖아. 안 그래? 네가 잘하는 거잖아. 사냥개 짓거리….”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릅니다.”
“개소리.”
“소환자들과 린델을 위해 딱 한 번만 협력해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지난 일을 덮자고 하지 않겠습니다. 서로 잘잘못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때라는 걸… 어째서 이해해 주지 못하는 겁니까.”
“…….”
“살인여단에게 빚이 있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함께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목적을 위해서 힘을 합쳐 달라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흠….”
“녀석들을 살려 보낸다면 결국에는 큰 화가 돼서 돌아오게 될 겁니다. 차희라 님. 반드시 오늘 일을 후회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새끼 진심이자너.’
모든 사정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대충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지금은 서로 협력해야 할 때라는 것을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바로 원정을 할 채비를 마치고 이쪽에 온 것 또한 그녀를 설득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시바… 설마 이거 화해 이벤트였나?’
서로 찜찜한 관계였던 두 집단이 여단을 청소하며 서로를 인정하고 훈훈해지는 이벤트였나?
제발 희라 누나가 현성이에게 협력해 줬으면 좋겠다.
‘제발….’
아마 평소였다면 그녀도 김현성의 제안을 받아들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아마 내가 없었다면 김현성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따로 믿는 구석이 없었다면 분명히 김현성의 말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을 것이다.
갑작스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 대답은 이거야.”
“…….”
“꺼져, 이 새끼야.”
당연하게도 붉은용병의 캠프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그래! 꺼져, 이 새끼들아!”
“여기서 사라져라! 제국의 개들! 퉷!”
‘시바.’
“네 도움 없이 내가 그 개자식들을 잡을 수 없을 거라 생각하지 마. 김현성 백작님.”
“…….”
“누가 먼저 잡나 한번 해보자고.”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것은 당연했기 때문에….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기모 씨. 안 기모!”
“네? 네? 부길드마스터. 저건… 길드마스터….”
“지금 나갈 거니까. 준비해요.”
“네?”
“애들 전부 불러요. 바로 밖으로 나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