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74화
여단 조우(2)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이후 정진호를 바라보자 굳은 표정을 보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
“…….”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네.’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반응이 없다. 그 와중에 안기모가 귓속말을 해온다.
“정말 이 녀석들을 도울 겁니까? 제가 캠프에서 훔쳐 듣기로는… 분명히… 정신 나간 사이코 집단이라고….”
‘아 쫌….’
팔꿈치로 녀석의 명치를 때리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헛기침을 하며 본래의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안기모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엄청나게 무거워진 분위기가 한 번은 환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고 말이다.
‘하긴… 지가 뭐 어쩌겠어?’
선택지는 없다. 우리를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순전히 녀석의 손에 달려있었지만, 우리가 불편한 상황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게 썩었는지 멀쩡한지는 관계없다. 당장 땅바닥이 무너지고 있는데 그게 뭐든 간에 일단은 붙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겠어요. 말 그대로지. 뭐 엄청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다는 건 아니에요.”
“…….”
“솔직히 고작 여기 있는 인원들로 당신들을 이곳에서 탈출시키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이해하고 계실 거예요. 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투력의 높낮이와는 관계없이 포위망이 촘촘하게 좁혀오고 있거든요. 그냥 어중이떠중이들만 온 것도 아니고… 그래도 대륙의 정예라는 모험가들이 모여 있는 상황이라….”
“…….”
“물론 실패할 확률도 높고요. 솔직히 말하면 당신들은 전부 다 죽을 거예요. 제 도움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간에 무조건 죽을 확률이 더 높겠죠.”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군.”
“당신이 죽는 걸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때요.”
김현성이 내게 해줬던 말을 떠올린다.
‘아무튼 살인마 정진호는 수백 개의 화살을 맞고 숨을 거뒀습니다. 괴성을 내지르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다, 하늘을 바라보고 웃으며, 그렇게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남기면서요. 조금은 공포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녀석이 구미가 당길 만한 제안을 말이다.
“…….”
“…….”
“갈 때는 가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데려가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아쉽다고 표현했었으니까.
싱글벙글 웃으며 한마디를 더 보탠다.
“더 죽이고 싶잖아요.”
“…….”
“이제 얼마 안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아깝잖아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오한이 느껴졌을 때, 입꼬리가 씰룩거리고 있는 정진호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 웃고 있는 것도, 찡그리고 있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표정, 히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얼굴이 거부감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잠깐이라도 쳐다보고 싶지 않다.
‘시바…..’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녀석의 입에서 즐겁다는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믿어 주시는 건가요?”
“뭐… 따로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희도 저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고…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결과는 같을 텐데…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에 들었습니다.”
“네?”
“당신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이 말입니다.”
‘은근히 사람을 잘 신뢰하네.’
물론 말만 저렇게 할 뿐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당장 뒤통수 맞고 여기까지 내몰린 놈인데… 믿기는 뭘 믿겠냐구. 내가 정진호였어도 인간불신 걸렸을 것 같은데.’
이름도 모르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상대다. 신뢰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지만 녀석이 악수를 청해왔고, 나 역시 녀석의 손을 잡았다. 한시적 동맹관계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럼… 정확한 계획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머리를 잃어버리셨죠?”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일시적이겠지만 제가 여러분들의 머리가 되어드릴 거예요. 상황이 정말로 좋지 않으면… 직접 개입할 생각도 있지만… 저희도 사정이 있는지라 그게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을지는 미지수고요.”
나를 천천히 바라보고 있는 정진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눈빛은 마치 네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재단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1기영과 1지혜의 역할을 대신 하겠다는 말이었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하겠지만 최소한 꼬맹이라서 얕보이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야 이 정도의 무력집단을 가지고 있었으니 생김새가 어린아이라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도 이미 눈치채지 않았을까. 안기모나 유아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정 길드원들이나 라파엘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뭔가 미묘했으니까.
우정 길드원들에게는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이미지가 더 강할 것이고, 라파엘 이 새끼도 왠지 모르게 이쪽을 신성시하고 있다.
마치 어떤 종교의 상징물처럼 나를 우러러보고 있었으니….
‘비밀종교집단의 교주나 성자? 같은 걸로 보이려나.’
“물론 당신의 자율행동을 제한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제가 알려드릴 것은 탈출 경로나 상대적으로 취약한 지역의 정보 정도니까요.”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사실 충분하지는 않아요.”
“…….”
“김현성이 와 있으니까요. 게다가….”
“…….”
“당신들… 중독되어 있고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진호가 중얼거렸다.
“쥐새끼 같은 사기꾼 자식이….”
당연히 1기영의 작품일 것이다.
“치명적인 독은 아니에요. 눈치채지 못하게 작업을 하려고 했을 테니… 아마 그 정도가 한계였겠네요.”
“…….”
“문제는 그게 하루 이틀로 시작된 작업이 아니었다는 거겠네요… 당신들… 꾸준히 중독되고 있었어요. 적어도 몇 년 이상… 당장 눈에 띄는 변화를 느끼지 못할지는 몰라도 이미 한계치를 들이마신 상태고요.”
이빨을 갈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그야 그럴 만할 것이다.
충동적으로, 필요에 의한 배신이 아니다. 처음 여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뒤통수를 칠 준비 중이었다는 것을 녀석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너무 밸런스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정진호와 여단 잔챙이 들이 이곳을 빠져나갈 걱정은 덜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너무 쉽게 덜미를 잡힐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시간 여행자가 무대 위로 모습을 보이며 틀어졌던 파란과 붉은용병의 관계 회복 이벤트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기왕이면 정진호가 두 녀석들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어떻게 생각해도 베스트 시나리오는 차희라와 김현성이 손을 잡고 사이좋게 정진호를 처리하는 그림 하나.
녀석들의 머리가 되어주고, 서포트 해주는 것이 그 방법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중독되어 점점 약해질 녀석들로는 그게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이쪽 파티원들을 동원할 수도 없는 노릇, 아직 사냥개 이주혁을 찾지도 못했고 이 포위망을 상대로 나 죽고 너 죽자 할 이유도 없었다.
‘중독된 거 보니까 화살 맞고 뒈질 만했자너.’
이곳을 빠져나가기는커녕, 물밀 듯이 밀어 들어오는 병력도 감당하지 못할 판이다.
후가속이 들어오는 종류인지, 라파엘과 한 번 부딪혔을 때보다 상태가 훨씬 안 좋아 보였고… 마력을 일으키거나 무리하면 할수록 결국은 녀석들의 마력회로를 망가뜨리게 될 것이다.
즉각적인 스펙업이 가장 중요했다. 아이템을 바꾸든, 단기간에 새로운 마법을 익히든, 정진호 패밀리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강해졌으면 좋겠다.
당장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기모 씨. 가서 쟤들 좀 치워주세요.”
“네?”
“…….”
“아! 물, 물론입니다. 바로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우정 길드와 라파엘이 시선 속에서 사라진 것은 당연지사.
깜짝 놀라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곧바로 날개를 펼친다. 빛으로 만들어진 날개가 눈에 띈다.
평소였다면 빛이 쏟아지는 이펙트까지 넣어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지경, 물론 그것으로도 효과는 충분하다.
“이건….”
갑작스럽게 등장한 순백색의 빛의 날개에 당황하는 얼굴이 역력하다.
존재감을 숨기고는 있었지만 이 미친 듯한 신의 존재감이 숨겨질 리 만무, 다른 설명이 필요가 없다.
녀석이 눈으로 목도하는 것은 신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였다.
정진호의 눈이 커다랗게 변한 것만 봐도 녀석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녀석은 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 모습을 보고서도 존재를 부정할 것 같은 느낌이기는 했지만….
녀석은 정말로… 어쩌면 신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시바 날개의 효과였다. 날개는 시바 무신론자도 유신론자로 바꾸는 기능이 숨겨져 있다.
허리춤에 달려 있는 호신용 단검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미동이 없다.
그냥 그 자리에서 곧바로 손목에 상처를 내고….
‘시바. 아프자너.’
뚝뚝 떨어지는 피가 보인 이후에 곧바로 포션 병에 쏟아부었다. 조금 더 그럴듯한 그릇이 있었으면 좋았을 뻔했지만 준비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문제.
그나마 이곳의 포션 병과는 다르게 우리 쪽의 포션 병의 디자인은 제법 고풍스러워 나쁘지 않은 그림이 완성된다.
‘이거 효과 있겠지?’
드래곤의 혈청도 효과가 있는 판국에 신의 피가 효과가 없을 리가 없다.
나도 시간이 없어 자세하게 연구해본 적은 없었지만 뭐가 됐든 간에 도움이 되면 도움이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송수경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체화가 진행됐을 테니 효과는 더 뛰어나지 않을까.
부작용을 피하려면 엄청난 정제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어차피 뒈질 놈들이니….
‘신경 안 써줘도 되자너.’
먹고 몸이 터져 죽어도 난 모르는 일이었다.
“마시세요. 도움이 될 테니까. 동료들한테도 조금씩 나누어 주시고요.”
무얼 믿고 이걸 먹느냐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포션 병을 잡아 든 녀석은 조심스레 자신의 입에 신의 피를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꼴깍꼴깍 목으로 잘도 넘어가는 모양, 사이코패스답게 저 역한 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걸 전부 넘기고 있었다.
‘마시란다고 진짜 마시자너.’
역시 일반인들과는 감성이 다르다. 나였으면 대뜸 마시라고 하면 미친놈 취급할 것 같은데 이 또라이들은 이걸 또 받아 마시고 있다.
정진호 다음에는 다른 놈들도 종교의식을 하는 것마냥 한 병에 든 것을 나누어 먹고 있는 광경은 왠지 모르게 기괴해 보이기는 했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뭐… 뭐야….”
문제가 있다면….
‘시바… 뭐야.’
굉장해도 너무 굉장했다는 것.
나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격변하고 있는 놈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갑작스레 자신의 가슴과 목을 부여잡고 있는 범죄자들.
“뭐야… 이거….”
폭주하듯이 튀어 오르는 마력.
‘뭔… 뭔데… 시바 갑자기 왜 그러는데. 뭐야….’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존재감을 가지게 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내 눈앞에 있었다.
‘왜… 갑자기… 진화한 건데…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