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276화 (1,27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76화

여단 조우(4)

“절대로… 용서 못 해….”

“…….”

“용서 못 해.”

“…….”

안기모가 경악스럽다는 눈빛을 보내기야 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들끓는 감정을 컨트롤해야 했다.

마땅히 보여줘야 할 감정표현에 녀석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중.

당연하게도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이걸 바라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다는 표정이었다.

평행세계고 이방인의 개입이고 나발이고 이 멍청한 놈들이 그딴 걸 알 리가 없었지만 대략적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이런 사건에 개입하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으니 입장상 쉽게 나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하지만 여기 모여 있는 새끼들은 저 살인마들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당장에라도 달려나가 정진호 패밀리에게 다진 고기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리라.

“형….”

으득….

입술을 너무 강하게 깨물었는지 피가 흘러내린다.

“괜찮으세요?”

꽉 쥔 주먹이 괜스레 떨려왔다.

그 모습을 본 라파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형… 참지 않으셔도 돼요.”

“…….”

“솔직히 저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 일의 결과가 어떤 식으로 돌아오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형의 마음이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니가 뭔데 훈수야 이 새끼야.’

“라파엘 님….”

국민지 역시 조용히 말을 보탰다.

“위험한 일이겠죠?”

이철우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위험한 일이라기보다는… 필요하지 않은 일이겠지… 그리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르고… 이곳은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니야.”

김태건 역시 중얼거린다.

“그저… 희생과 부활의 성자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여러분”

“…….”

“…….”

“엄밀히 말하면….”

“…….”

“싸워야 할 이유는 없어요. 아니, 싸워서는 안 돼요. 이 세계의 균형을 위해서라면 개입하는 것은 최소화해야 해요. 그게 맞아요. 저는… 저는 이 세계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했어요.”

“이기영 님….”

“하지만….”

“…….”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가 없네요. 여러분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지만… 저희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해결해야 하는 일도 아니지만… 이 싸움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저들을 용서할 수 없어요. 그저 개인적인 감정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저들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순식간에 가라앉는 분위기. 고개를 숙이며 파티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디… 부디 힘을 빌려주시겠어요?”

물론 열화와 같은 응원이 쏟아진다.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세요.”

“형….”

“싸움이군… 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싸움이야.”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감동의 눈물이라도 쏟고 싶은 타이밍이었지만….

‘일단 할 건 해야지.’

잠깐 멈춰선 파티는 전열을 가린다. 인식저하 마법을 걸고, 붕대로 얼굴을 조금씩 감는다.

약간은 허술할지도 모르는 변장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기도 했고, 어차피 적은 명확했으니까.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안기모가 조심스레 말을 이어왔다.

“하하하. 이렇게 비밀리에 움직이니까. 재미있군요.”

‘뭐가 재미있어?’

“비밀 집단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

“달을 지키는 자. 더 문 프로텍터.”

‘더 문 브레이커야 뭐야.’

조심스레 녀석을 불러 중얼거린다.

“지금 상황 감동적인 거 안 보여요?”

“아… 그게… 죄송합니다.”

“갑자기 더 문 프로텍터는 뭐에요? 쌍둥이들이라도 만났어요?”

“아! 혹시 부길드마스터도 아시는 겁니까? 하긴… 지혜 씨를 통해 소개를 받았으니 당연히 아시겠군요. 사실 덕구 씨와 예리 씨가 좀 바빠지는 바람에… 최근에는 종종 그녀들과 어울려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이요?”

“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한 명은 남자잖아. 이 새끼야.’

아무래도 쌍둥이들이 이상한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았지만 구태여 진실을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 새끼 요즘 은근히 비호감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언제나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아, 아무튼 간에 앞으로는 입조심 하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 그런데 정말 어떻게 하는 겁니까? 제가 몸을 사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녀석들… 그거 괴물 아닙니까? 아! 물론 부길드마스터가 괴물을 만들어냈다고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주얼 자체는 무슨 타락한 빛의 용사 같았으니까요. 만약 의도하신 거라면… 인정합니다. 완벽하게 제 취향이었습니다. 멋있더군요. 물론 제가 그렇게 되고 싶다는 건 아닙니다만….”

“…….”

“옛날에 길드마스터가 괴물로 변하셨을 때랑 비슷한 느낌이 들었지 말입니다. 솔직히 저도 대륙에서 한 가닥 하는 성기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그런 놈들과 부딪히는 건 조금… 아. 무섭다는 게 아니라… 저는 부길드마스터의 안전도 챙겨야 하는 입장이니.”

“저는 리안 씨가 지켜주면 되니까. 문제없어요.”

“물론 박리안 님이 계셔서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아영 씨도 있어요. 그리고 기모 씨는 전방이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역, 역시 그렇군요. 하하하핫. 뭐, 뭐… 전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풀이 죽어 있어?’

“물론 크게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할 거예요. 우린 조력자 입장에 서야 한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아아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지휘본부가 있다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소통 자체가 힘든 상황인 것 같은데… 여기 있는 사람들이 부길드마스터의 생각이 닿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게 왜 불가능해?’

출혈이 조금 크기야 하겠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신의 힘을 탐한 이들의 최후(0/1)]

[해당 지역에 있는 플레이어 모두에게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해당 지역의 플레이어들은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되지?’

많은 설명을 쓰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이야기가 설명이 된다. 살인여단이 어리석게도 이름 없는 신의 힘을 탐냈다는 간단한 스토리텔링.

저런 모습으로 갑작스럽게 진화한 것도, 분노에 찬 정체불명의 존재가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게 경위도 모두가 그럴듯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이 세계에서도 여기저기서 퀘스트를 받고 해결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모험가들도 아마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깜짝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안기모 녀석. 당연히 놀란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여기저기에서 희미한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퀘스트다!”

“뭐야… 퀘스트라고 갑자기?”

“제기랄… 살인여단 놈들….”

“그 미친 자식들… 도대체 뭘 건드린 거지? 근처에 던전이라도 있어? 아니면 신단이라도 있는 건가? 조각상 같은 건? 이상 반응 확인했는지 알아내고 보고하라고 전해! 남아 있는 레인저들은 있나?!”

‘저런 게 정상적인 반응이자너.’

“저 부대장.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여기까지 와서 여단 놈들을 놓칠 거야?! 뭐가 됐든 간에 퀘스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나쁜 일은 아니야. 그냥 변수 하나가 더 생겼다고 생각하면 돼.”

‘경계하는 사람들도 있네.’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찌 됐건 간에 퀘스트가 발동되었다는 건 해당 지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보통 던전, 혹은 대륙 서사에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에 퀘스트가 내려지는 만큼, 혹여나 이 퀘스트로 인하여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마당에 쉽게 몸을 뺄 수 있을 리 만무.

퀘스트를 내려보낸 무언가가 자신들이 아니라 여단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한몫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 이상으로 여단을 이 자리에서 내보내기 싫었을 것이다.

심지어 정체불명의 힘을 가지게 된 녀석들이라면….

‘절대로 내보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다시 한번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3번 진영이 완전히 뚫렸어! 제길!”

“제기랄… 후퇴해야 하나?”

“개소리하지 마. 무조건 잡아 죽인다. 그 쓰레기 새끼들.”

“움직여! 움직여! 거기 너희들! 뭣 하고 있어! 얼른 움직이라는 소리 안 들려?”

안기모가 능글맞게 입을 열어온다.

“저희는 붉은용병의 직속입니다.”

“시발….”

“…….”

“붉은용병 개자식들은 일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굳이 편 가르기를 하겠다는 건가?”

“아니요. 차희라 님께서 당신들에게 도움을 달라고 하셨으니….”

“뭐 그 말이 정말인가?”

“네. 용병여왕님께서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깨닫고 계십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럼… 지원을 부탁하지.”

“…….”

관계회복 이벤트도 시작해야지.

제멋대로 입을 놀린 안기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제가 실수한 겁니까?”

“아니요. 잘하셨어요. 그럼 라파엘 님 저희도 출발하도록 하죠.”

“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날개는 꺼내지 마세요.”

“네. 형.”

“세세한 디테일을 전투 중에 직접 전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신나게 죽이고 있으니까.’

“그럼 형은 어디에….”

“아영 씨와 리안 씨는 저와 같이 대기하도록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조금 불안해 보이기는 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라파엘과 우정 길드원들, 졸지에 녀석들과 함께하게 된 안기모는 불만은 있지만 차마 말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며 녀석들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본인도 함께 꿀을 빨고 싶다는 얼굴이었지만….

‘시바 내가 꿀 빠는 걸로 보이냐구….’

서둘러 망원경을 확대한 것은 당연지사. 아직까지도 학살극을 멈추지 않고 있는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해서 마법과 화살들이 떨어져 내리지만 녀석들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일부는 빛의 막으로 보호하고 있었고 혹시나 직격당한다고 하더라도 상처들이 곧바로 회복되고 있었다.

시바 나한테도 없는 기능들이 놈들의 몸을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

‘이러니까 시바. 내가 이럴 줄 알았겠냐고.’

정진호의 상태는 아까와 비슷했다. 계속해서 검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검으로 목과 배를 찢어발기고 그 피를 맞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마치 황홀경에 젖어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입이라도 풀렸는지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개소리들을 지껄여 대고 있었다.

사이코 같다. 이기영의 템플러가 된 효과인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이 원래 미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길을 열어준 것인지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누가 봐도 놈의 정신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핫! 신이여!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있나! 네가 준 힘이다! 네가 내게 더 많은 죽음을 선물한 만큼 나 역시 네게 기쁨과 피를 선물할 것이다!

‘이 미친 중2병 걸린 새끼.’

-나는 결국 보답받는다! 하하하하핫! 하하핫! 콜록! 콜록! 하…크하아… 콜록! 하하하핫!

‘이 새끼 완전히 사이코 됐자너.’

-죽어! 죽어어어! 하하! 죽어! 죽어라! 죽어! 죽어라! 죽어어어어어어!! 흐…흐흐흐흐… 콜록!

‘이 미친 살인마 새끼! 이 시바 소름 끼치는 새끼.’

-이해받았다니!! 이해… 할 수 있다니!! 정말로 이해받을 수 있다니!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 좋아! 좋구나! 너무… 너무나… 크…흐…흐흐…흐하핫!

“…….”

“…….”

“이… 이 미친 새끼가 도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

“이… 새끼 완전… 또… 또라이 아니야? 이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