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80화
배신(3)
‘이게 갑자기 무슨 난리야?’
간지 나게 등장한 희라 누나도 희라 누나였지만, 조용히 분노를 삼키고 있는 김현성의 눈빛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침착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녀석이 얼마나 화를 참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
다른 사람은 눈치 못 챌지 몰라도 나는 김현성의 저런 표정을 알고 있었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딱 배때지를 찌르기 직전, 억지로 분노를 삼키고 있을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옆에 있는 차희라가 있지 않았더라도 성을 내며 분노를 터뜨렸을 것이다. 아무래도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근데… 둘이… 화해한 거야?’
이렇게 갑자기 멋있게 등장해도 되는 거야?
최소한 희라 누나의 표정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조금 불편해 보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김현성보다는 정진호나 다른 여단 멤버들에게 더욱더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김현성 역시 마찬가지. 아니, 이 새끼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차희라에게 계속해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었고, 그 무엇보다 여단에 대한 증오가 뿌리 깊게 자리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 둘이 괜찮은 거 맞지? 그렇지?’
-아, 이거 실수한 건가? 그냥 죽게 내버려 둬야 했던 건가?
-…….
-네 표정을 보니까. 차라리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인가 보네. 어때. 네가 죽이고 싶어?
-…….
‘현성아 시바 표정 풀어….’
-나도 저 새끼한테는 빚이 조금 있기는 한데… 네가 당한 걸 생각하면… 으음… 고민이 조금 되네.
-…….
-어떻게 할까… 나는 다른 놈들한테도 볼 일이 있는데. 너 그래… 너 이 돼지 새끼야.
-차… 차희라… 싫어. 무… 무서워.
-그리고 너….
차희라의 말에 생각 없는 돼지와 움찔하는 마스크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길… 길드마스터… 아니, 언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내가 왜 네 언니야?
-하… 하하….
-그래서… 네 조원들 다 뒈지게 하고 여단으로 가서… 재미 좀 보고 있었나 보네? 운도 좋아… 길바닥에서 다 죽어가던 거 키워주고 먹여주고 다 해줬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는데… 그게 벌써 5년 전이네? 그동안 잘 빠져나갔었지?
-하…하하하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걸요. 언니도 솔직히 제 덕 많이 봤잖아요. 그나마 붉은용병에서 쓸 만한 마법사가 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래. 그래서 널 키웠지. 그러다가 배신당했고….
-대를 위한 희생이었다는 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시는 거… 아니시죠?
-뭐?
-불필요한 일로 보이시겠지만 마도의 발전을 위해서는 희생도 꼭 필요한 법이에요. 제 연구가 아니었다면 언니도 다른 단원들이 더 죽었을 거라는 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신 거 아니죠? 저는 이해하실 줄 알았거든요.
-너 같으면… 이해할 수 있겠어? 지하에 거지 같은 실험실을 만들고, 거기서 내 새끼들로 실험을 하고 있다는 걸… 내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
차희라의 지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야.
-전부 마도의 발전을 위해서였어요. 붉은용병을 위해서이기도 했어요. 그것뿐이었다고요.
-그냥. 입 다물어.
전후 사정을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충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마스크가 왜 2회 차에서 없는지 알겠네.’
내가 2회 차에 막 들어왔을 때도 붉은용병은 마법사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의 붉은용병이야 내가 쓸 만한 마법사들을 밀어줘 그 기근을 해소하고 있었지만 1회 차의 붉은 용병은 여전히 마법사가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계속해서 마법사들을 찾다가 건진 게 바로 저 마스크를 쓴 여자고, 이후 뒤통수를 맞았다는 게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야기.
실험이고 배신이고 엮여 있는 게 많은 것처럼 보였지만 확실한 것은 희라 누나가 그녀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것 하나였다.
-아… 제길… 이런 데서 언니랑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죽이면… 돼.
-입 다무세요. 용병여왕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니까.
-우리도… 괴물… 이야.
-…….
-…….
-해볼… 만한가?
-죽여줄게… 너희 버러지들 전부.
-쉽게 안 될걸요. 길드마스터.
-그렇게. 부르지… 마.
차희라가 마스크를 쓴 단원에게 쇄도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을 내디딘 짐승의 길을 돼지가 가로막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도망칠 줄 알았는데?’
아마 마스크가 당한다면 자신도 똑같이 될 거라는 것을 깨닫고 있음이 분명했다. 은근히 영악한 녀석이었으니 곧바로 차희라의 앞길을 막아선 것이리라.
키가 큰 멀대 녀석도 차희라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지만….
‘지금 저 시점에서 희라 누나를 막을 수 있어?’
어마어마한 페널티를 가지고 있지만 현시점의 차희라는 분명 김현성 보다 강하다.
지력이 7로 내려갔지만 근력은 이미 한참 전에 준신화 등급의 수치를 뛰어넘었다.
1회 차의 차희라가 붉은전신이라면 저건 붉은짐승이다. 야성과 오감은 2회 차의 그녀보다 더욱더 발달되어 있는 상태였고, 폭력과 본능에 극한까지 노출되어 있었으니까.
단 한 번의 일격으로 키가 큰 놈의 팔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으로 뒤틀린다.
눈치도 빠르고 속도도 빠른 돼지 새끼는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지만 얼굴을 보니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스크 역시 마찬가지. 다른 단원들 역시 모조리 차희라를 둘러싸고 있다.
‘진짜…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하지?”
팔로 단원 하나를 후려치자 녀석이 그 자리에서 몇 바퀴나 돌며 나가떨어진다.
-제길! 이번에는 전부 다 부러진 것 같은데! 제길! 아프다고!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요. 지금 죽느냐 사느냐가 문제니까.
발차기로 한 녀석을 후려갈기자 녀석의 몸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이며 완전히 접혀 버린다.
-우웩!
무기를 들 필요도 없다. 아니, 애초에 저 근력을 감당할 수 있는 무기가 있을까. 손에 쥐는 순간 바스라질 텐데.
-죽어요. 길드마스터.
-크르르르륵.
마스크가 날린 마법을 팔로 후려쳐 돼지에게 보내고, 한 놈의 팔을 잡아 뜯는다. 표정이 없는 것 같았던 녀석의 표정은 계속해서 일그러지고 있다.
여러 가지 공격이 날아 들어오지만 그 자리에서 팔을 뜯고, 다리를 뜯어내고, 종국에는 목을 뜯어내며 마무리, 누가 우리 편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 쓸모없는 새끼 붙잡히지 말라니까!
-거리 벌리세요. 어차피 짐승이에요. 시간을 끌면 이기는 싸움이니까. 몬스터를 상대한다고 생각하시라고요.
-몬스터 사냥?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인간이랑 달라?
-이 멍청한… 제길… 말을 말아야지. 말이 통하는 사람은 그 쓰레기 듀오밖에 없었는데. 그냥 상관없으니까 저 괴물이 나한테 못 다가오게 하란 말이야! 마법사를 지키는 건 상식이잖아!
-그게 왜 상식이야?
돼지 새끼조차 저 다혈질 녀석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둘러싸고 시간만 끌라고! 알아들어?! 어차피 지력 떨어지면 자멸하는 건 저 여자니까!
-단장은… 단장은 어떻게 하는데?
‘그래. 시바 내가 궁금한 게 그거였어. 정진호는, 정진호랑 현성이는?’
-그건 나중에 생각해!
시선을 돌려봤지만 이미 시야에 정진호는 없다. 당연히 김현성 역시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망원경을 돌린 것은 당연지사.
직후 악귀처럼 일그러진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술을 꽉 깨물어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리는 중, 핏발이 선 눈과 분위기는 김현성이 얼마나 정진호를 죽이고 싶어 하는지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개자식… 개자식….
차희라와 멀어졌으니 이제 얌전히 있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욕설을 내뱉으며 정진호를 쫓고 있었다.
-개자식!
-아아아아아악! 살려….
-이백칠십일! 이백칠십이! 하핫! 이백칠십삼!
-정진호… 정진호!
-아… 하하하핫!
-정진호! 이 개자식!
정진호를 발견한 김현성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녀석을 향해 쇄도하기 시작한다.
살기가 너무 저릿저릿해 오금이 저릴 정도였지만 김현성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모양, 기습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왔구나! 대륙의 영웅!
-죽여주마. 최대한 고통스럽게. 이 쓰레기 같은 자식.
-네게도 이 빛이 보이나?
-입 닥쳐!
-나는 드디어 완전해졌어. 너는 내가 망가진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있었어! 있었다고! 이곳에도 신은 있었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개소리하지 말고 뒈져.
‘시바… 라이벌들의 싸움이자너….’
“…….”
‘가슴이 웅장해지자너.’
1회 차 김현성의 대적자가 정진호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전해져 온다. 처음 부딪친 것도 아닌 모양인지, 서로의 검에 익숙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간헐적으로 대화를 하는 것도 그렇고, 많은 사건과 사연이 얽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1기영 1지혜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정진호 사망 이후라고 했었지?’
말인즉슨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사건들이 여단에 의해서 벌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가면듀오 보다는 눈앞에 있는 정진호에게 분노를 보내기가 더 쉽지 않았을까.
문제는 지금의 정진호가 김현성이 알고 있는 정진호가 아니었다는 것. 정진호도 만전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점은 정진호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김현성도 알고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면 이성을 놓고 싸우는 게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냉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고.’
-하하하하하하핫!
-개자식! 뒈져!
라파엘이 보여줬던 수비 일변도의 쓰레기 전술이 아니라 진짜와 진짜의 싸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싸우고 있는 희라 누나보다 더 이성을 놓고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진호는 큰 웃음을 터뜨리고, 김현성은 이를 악문 채로 검을 뻗는다.
간헐적으로 놈의 손에서 마법이 터져 나올 때마다 김현성은 그 마법을 뚫고 놈에게 접근한다.
두 놈이 몸을 부딪칠 때마다 으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이 움푹 파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개새끼!
콰드득!
힘이 실린 검이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풍압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김현성이 검 한 자루를 사용해 정석으로 돌파한다면, 정진호는 율리에나를 비롯한 여러 가지 검, 주문을 사용해 변칙적으로 전투를 이끌어나가는 편, 성향도 다르고, 가진 바 기술도 다르다.
놈들의 공통점은 무조건 서로를 죽이겠다는 의지였다.
극단적으로 검을 휘두른 만큼, 결과 역시 빠르다. 정진호의 검이 김현성의 가슴을 베고 지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제길!”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망토를 벗어 던지고 다시 검을 붙잡는 김현성이었지만… 아쉽게도 정진호는 이미 시야에서 벗어난 뒤.
-남겨진 시간이 얼마지? 얼마나 있지?
다시 망원경을 돌리자 눈에 보인 것은 계속해서 피를 토하며 달리고 있는 정진호의 모습이었다.
허겁지겁 입을 닦은 이후에는 다시금 검을 잡으며 다음 사냥감을 찾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방금 함께했었던 찬란한 빛 역시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부작용이 시작된 것이리라.
비로소 끝이 다가온 것이다.
-내가 너를 기쁘게 만들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어린 죽음이여!
“…….”
-내가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하핫!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콜록! 콜록! 흐… 흐… 콜록!
죽음을 앞둔 녀석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마치 애새끼마냥 기뻐 보이는 모습.
나는 녀석을 배신한 셈이 되었지만, 놈은 배신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