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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81화 (1,27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81화

옳은 방향(1)

나는 녀석을 배신한 셈이 되었지만, 놈은 배신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마치 본인의 마지막 순간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특이한 새끼….’

이해하기 쉽지 않았지만 어째서 정진호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녀석은 본인이 이 자리에서 죽을 거라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놈은 멍청하지 않다. 가면 듀오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이후, 여단 친구들과 함께 이 장소에 고립되었을 때부터 어쩌면 본인의 운명을 직감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어린 죽음이 찾아와 정진호에게 사형선고 아닌 사형선고를 내렸으니… 놈도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이를테면….

‘아, 이곳이 내 무덤이 될 장소구나.’

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을 확률이 높다는 거다.

놈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범한 인간과는 결이 다른 놈은 죽음에 대한 특별한 철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기도 싫다.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원래부터 다르게 태어났으니까.’

미치광이 살인마에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놈의 죽음이나 철학에 대한 감상은 없다.

어차피 놈은 죽어야 하는 빌런이었고,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죽어야 했으니까.

아무튼 간에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는 계속해서 피를 토하며 김현성과 최대한 멀어지려고 하는 중, 본인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성과를 낼 수 없는 무의미한 싸움은 최대한 피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리고, 양 떼를 찾는 늑대 새끼마냥 목표를 향해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나! 어린 죽음이여!

‘보고 있어.’

-내가 네게 바치는 시와 노래가… 쿨럭… 어떤가! 흐… 흐흐흐….

‘마음에 안 들자너. 너무 구리자너….’

-아아아아아악!

-도망쳐… 아아악! 도망치라고! 괴물이야… 저건 괴물….

-으에엑….

-켁… 아아아아아악!

콰아아아아앙!

퍼어억!

-살려줘! 제길! 살… 살려줘… 제발….

-이 개자식! 정진호 이 개새끼야!!! 제기랄!

-흐… 흐흐….

-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소리가 들리나. 어린 죽음이여. 흐… 우웩… 쿨럭.

‘이 새끼 근데 말투가 왜 이래?’

뭐 16세기에서 왔어? 나르시시즘도 정도가 있지 시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진심으로 저런 말을 내뱉는다는 게 어처구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답게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을 테니, 책으로 사회를 배워 저 지랄을 하는 건 아닐까.

튜토리얼에서 봤었던 놈의 모습에서는 분명 저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던 것 같았는데….

자신을 이해해 준다고 생각하는 어린 죽음과의 만남이 놈의 텐션을 끌어올린 모양인 것 같았다. 본인조차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모습을 끌어낸 것이다.

물론 적들에게 놈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찬미니 노래니 개소리를 지껄이며 미친놈마냥 달려오는 녀석이 검을 들고 있다고 상상하면 이해하기 편할 것이다.

진짜 미친놈을 보는 것 같아 무섭다. 안 그래도 덩치도 큰 녀석이 저리 달려오고 있으니 정말로 양 떼들 사이에 늑대, 아니, 사자를 풀어놓은 것처럼 설치고 있다.

녀석의 촛불이 타들어 가면 타들어 갈수록 놈은 더욱더 자신을 한계로 내몰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 기쁘구나… 너무나도… 기쁘구나.

-아아아악!

-으아… 흐윽… 으아아아아!

‘왜 우는 거야. 이 새끼는 도대체 시바. 소름 끼치게.’

더 이상은 이 새끼의 미친 짓을 봐주기도 힘든 상황, 다시 한번 우리 패배할 줄밖에 모르는 회색 비둘기를 투입시켜야 하는 고민이 들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 곧 사그라들 목숨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발악이 너무 거세다. 이게 전부 템플러가 된 영향이라고 생각하면 미래가 꼬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김현성이나 차희라뿐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죽어가고 있는 놈들이 미래에 영향력을 끼칠 인재일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길면 한 다섯 시간 남았나.’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생명력이 꺼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희라 누나 쪽은…?’

“이미 끝났는데?”

여단원들의 하나둘씩 부작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으아… 아아아아… 우웨에에엑! 아아아아! 아파… 아파아!

하는 비명을 내지르며 말이다.

이미 빛은 사그라든 지 오래,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을 부여잡고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과묵해 보였던 멀대조차 숨을 헐떡거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바로 내가 원하던 모습이었다.

‘그래 바로 저거자너.’

어딜 시바 어린 성체와 피를 탐해?

신의 힘을 탐한 머저리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로.

차희라 역시 흥이 식었는지 의아한 얼굴로 조용히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이 새끼들… 이거 왜 이래?

-아아아아악! 언니! 살려줘요! 아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아파… 흐으윽… 아아아아악!

-…….

-아니… 아니 죽여줘… 죽여줘요! 언니… 차희라! 제발… 제발!

-…….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종국에는 말을 내뱉는 것도 힘든지 무작정 비명만 내지르고 있다.

정진호와는 조금은 다른 반응….

‘그릇이 다르나?’

아니면… 저 새끼는 그냥 저 고통을 참고 있는 건가?

놈이 지금까지 몇 명을 죽였는지 세기도 힘들다. 녀석조차 정신이 없는지 더 이상 세는 걸 멈추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빛이 사그라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살인밖에 모르는 사이코패스는 맹목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더 이상 몸도 회복되지 않는다. 놈이 아무리 강자라고 해도, 군대의 목을 벨 수는 없다. 녀석의 몸에도 상처가 쌓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이 새끼 도대체 언제 죽는 거야.’

-우웩… 쿨럭! 다음… 다음은 어디에 있나! 어린 죽음이여!

‘니 친구들 다 뒈져가는데 너는 왜 안 뒈져?’

-아직 움직일 수 있다. 움직일 수 있을 것 같구나! 하하핫!

‘아니, 시바. 이 새끼 뭔데. 왜 갑자기 시바 정의의 사도마냥 쓰러질 듯 말 듯 안 쓰러지는 건데.’

-흐… 흐흐… 쿨럭!

‘아니, 왜 네가 시바 주인공 같은 건데?’

-죽여주마. 죽… 죽여주마.

당황스럽게도, 처절하기까지 한 모습은 녀석을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만들고 있었다.

비장한 비지엠이라도 틀어준다면 악마 군단에 맞서는 빛의 용사 정도로 비춰질 정도였다.

화염구에 정통으로 맞아 불길에 휩싸였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몸을 움직여 마법사의 목을 베어낸 이후 집어 던진다.

창에 관통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 창병의 머리에 검을 꽂는다. 드문드문 회복주문을 외우기는 했지만 그것뿐이었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미 녀석이 한계를 맞이한 게 보이고 있었다.

소년만화 주인공마냥 정신력으로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지가 무슨 시바 현성이냐고.’

너한테 아무도 시바 그런 근성이랑 영혼을 불태우는 컨셉 같은 거 안 바란다고….

‘제발 죽어 이 새끼야. 시바.’

-흐흐흐… 아직이다! 아직이야….

‘이제 그냥 쓰러져서 뒈져. 제발. 시바. 할 만큼 했어. 멋있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죽자.’

-…….

‘아니, 빨리 죽으라고.’

-더… 더!

김현성 이 새끼라도 와서 정진호를 단매에 때려죽였으면 좋겠지만 이 멍청한 새끼는 중간중간 정진호가 남겨놓은 미끼에 낚여 있는 상태였다.

양심이고 감정이고 내다 버린 1회 차인 줄 알았는데 부상자한테 발이 묶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마 정진호도 그런 김현성의 성향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정을 파놓은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실제로도 김현성은 죽어가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최소한의 응급조치만 하는 것 같기는 했지만 몇 명에게 시간을 끌려도 정진호를 쫓을 재간이 없다.

‘진짜 김현성은 여기서도 김현성이네. 멍청하기 짝이 없자너.’

눈앞에 있는 몇 명을 버리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왜 모를까.

아니, 알고 있기야 할 것이다. 청소 계획에 김현성이 동의한 걸 보면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눈앞에 있는 사람들까지는 외면하기는 힘들었던 걸까.

‘얘도 참 얘야.’

그렇게,

김현성이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정진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날아온 화살이 정진호의 어깨에 박힌 것이다.

눈먼 화살이었다.

정확히 겨냥해서 쏜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 엉겁결에 던진 화살이 녀석에 어깨에 박힌다.

“뭐야… 이거….”

물론 정진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화살을 꺾은 이후에 궁수의 몸을 반으로 가른다.

“뭐야….”

등 뒤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녀석의 등에 두 발의 화살이 박혔다.

녀석들 역시 정진호가 쏘아 보낸 마법에 쓰러지고 말지만 여기저기에서 계속해서 화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미처 눈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많은 화살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그냥 양 떼가 아니라 제대로 전열을 갖춘 집단이 등장한 것이다.

“이게….”

이미 정진호가 지쳐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지만 가까이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녀석들도 인지하고 있는지, 계속해서 거리를 유지하며 화살을 쏘아 보내기에 여념이 없다.

다시 한번 정진호의 몸에 화살이 박히고 녀석은 이를 악물고 다시금 몸을 움직여 검을 휘두른다.

-왜… 왜 안 쓰러지는 거지? 저 괴물 새끼.

-흐… 흐흐하… 하하하… 이곳이구나… 흐윽… 이곳이야. 네가 나를 이곳으로 인도했구나. 어린 죽음이여. 드디어 네가 나를 데려가기로 마음을 먹었구나.

-쏴라! 쏴! 계속 퍼부어! 계속! 멈추지 마! 저 괴물 새… 아아아악!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죽여! 빨리 쏴! 거리 유지해! 지금 뭣 하고 있는 거야. 이 병신 새끼들아! 다 지친 병신 새끼 하나 못 잡고!

-흐… 흐… 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저… 저 미친 자식….

길드마스터인지 부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정진호를 보고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야 온몸에 화살이 박혀 있는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으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내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만족스러운가! 아니면 아직 부족한가! 내 목소리에 답해다오! 어린 죽음이여!

-죽여! 저 새끼 죽여!!

-네 목소리를 들려다오! 죽음이여! 아직 부족한가! 흐흐… 쿨럭. 이래도! 이래도 부족한가!

괜스레….

다시 한번 김현성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살인마 정진호는 수백 개의 화살을 맞고 숨을 거뒀습니다. 괴성을 내지르고,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다, 하늘을 바라보고 웃으며, 그렇게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남기면서요. 조금은 공포스러운 광경이었습니다.’

일이 꼬였다고 생각했지만 꼬인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게 당연했다.

그야 지금 녀석은 김현성이 말해준 최후에 굉장히 가깝게 다가서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차피 결과는 같다.

내 실수는 실수가 아니라 본래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가 1회 차로 들어옴으로써 일이 꼬인 것이 아니다.

선택지가 있었던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와는 다르다.

내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것이 옳은 미래였다는 것, 자잘한 실수나 변수도 모두 원래 정해져 있는 타임라인을 따라가기 위한 발판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사였어.”

“…….”

“이게 올바른 방향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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