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82화
옳은 방향(2)
언제나 그렇듯 섣부르게 이게 정답이라 확정 지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쳤을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가능성이야 높아지겠지만 정진호의 최후가 화살을 맞고 죽는 것이라고 해서 1회 차와 완전히 같다고 보기도 애매하다.
‘아니야. 사실은 애매하지 않아. 시바.’
하지만 갑자기 대륙에 튀어나온 이기영이라는 이레귤러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보다는 덜 황당하게 들린다.
1기영이 2회 차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지만 2회 차 또한 1회 차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는 건 마치 너무나도 잘 짜여진 각본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내가 뭐라고 시바. 내가 시바 이 대륙을 위해 태어나기라도 했냐고….’
물론 희생과 부활의 신은 이 대륙을 관장하는 주신 중에 하나다. 벨리알, 베니고어와 함께 이 대륙을 관통하는 신화를 만들어냈고, 현 대륙의 독립화에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2회 차였고… 이미 일어난 일인 1회 차와는 연관이 없다.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는 베니고어가 알타누스를 배려한 서사의 마지막 종장이었지만 이번 1회 차로의 시간여행은 던전도 뭣도 아니었고, 우리 쪽 인력들도 모르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차라리 베니고어나 벨리알이 일을 꾸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쪽 인선들은 이번 일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 문어 촉수 괴물 새끼들이 꾸민 이야기라는 거다.
어쩌면….
‘완전 독립절차를 밟은 문제가… 이제야 생기고 있는 건가.’
시스템으로부터 인증을 받은 독립이어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기실 문제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완전독립 전 이 대륙은 윗놈들에게 관리받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루키페르가 사라지고 알타누스라는 새로운 관리자가 대륙에 자리를 잡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녀는 그냥 철의 처녀에 갇힌 성녀에 불과하다.
대륙 운영을 위해 베니고어처럼 이곳저곳에서 신성을 빌려 오거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안 봐도 뻔할 뻔 자.
갑작스러운 독립에 대륙을 관통하는 서사 중간중간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 더 합리적인 추론이 아닐까.
문어 촉수 괴물은 시스템의 채권자들이고, 이제는 대륙의 주신이 된 내가 대신 대륙에 뚫린 구멍을 막고 있다는 게 더 합리적이다.
과거에 이 대륙이 진 빚을 이쪽이 갚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촉수 괴물 새끼들이… 그냥 대륙을 좀 먹으려고 하는 거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로 이기영이라는 인물이 이 모든 일에 시발점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어떤 게 정답이라고 하더라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미 내 의지와는 다르게 정사는 진행되고 있었다.
미치광이 살인마 이야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녀석이 인간들을 도축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물론 쉽지는 않다. 쉬울 리가 없다.
놈은 이미 지쳐 나가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상대하고 있는 이들도 린델의 정예길드라고 불릴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발버둥 치고 주문을 외우고, 몸을 움직이며 손을 놀릴수록, 놈의 몸에는 화살들이 계속해서 박히기 시작했다.
-답해다오! 답해다오! 아직도… 만족스럽지 않은가! 흐… 우웩… 쿨럭….
‘답하면 어떻게 될까.’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다른 명령을 내린다면 녀석의 죽음이 달라질까.
-하…흐…흐흐윽… 하하하핫!
다시 한번 녀석의 가슴에 화살이 박힌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든지 무릎을 꿇는 계획적인 살인마의 모습이 보였다. 이후 쥐죽은 듯이 쓰러지기까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괴… 괴물 새끼… 죽… 죽었나?
‘아니… 살아 있는데….’
-죽었나?
잠깐 동안 멈칫했을 때,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정진호가 가까이에 있는 녀석의 목을 부여잡는다. 다시 한번 마법과 화살들이 쏟아지지만 녀석은 자신이 잡은 모험가를 방패로 삼은 채로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씨발! 도대체 왜 안 죽는 거야! 개자식! 불사신이라도 되는 거냐고! 제기랄!
-시이발!
-그냥 쏴! 화살 아끼지 말고 아무렇게나 쏘라고! 조금이야! 이제 조금만 있으면 죽는다. 놈도 인간이다. 인간이라고! 물러서지 마! 도망치지 마!
-흐… 으으… 흐아아….
‘어차피 죽을 거야.’
최소한의 확인 작업을 위해 작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설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기쁘구나. 하지만 네가 살아남았으면 한단다. 나의 기사여.(0/1)]
[정진호에게 전설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합니다.]
[보상을 확인합니다.]
[붉은 하늘]
‘확인해야 돼.’
정진호가 죽는 장소가 바뀐다고 해도 미래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던질 수 있었던 한 수였다.
퀘스트가 해결된 염려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진호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미 몸은 죽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몸을 부여잡고 있는 게 뭔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놈은 한계를 맞이한 상황이다.
솔직히 화살을 날리고 있는 린델의 머저리들이 그냥 후퇴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가만히 내버려 둬도 몇 분 지나지 않아 죽을 테니 말이다.
물론 그걸 알 리가 없는 녀석들은 계속해서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대항하고 있는 중, 메시지를 받은 정진호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흐…으…윽… 하…하하하… 내 목소리가 닿았구나….
어처구니없게도….
놈은 도망치지 않았다.
‘포기한 건가?’
-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핫!
오히려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겠다는 듯이 등을 돌리지 않고 화살들을 받아내고 있었다. 더 이상은 화살도 뽑지 않는다. 출혈 때문에 의식이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치 고슴도치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녀석은 비틀비틀거리면서도 착실히 목표물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김현성이 도착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래. 시바. 현성아 그냥 아주 목을 날려 버려. 아님 그냥 끌고 가!’
-손대지 마라! 김현성! 제기랄!
-…….
-우리 거야. 우리가 잡은 거라고! 김현성!
-…….
-간 보지 말고 저리 꺼져!
‘아니, 시바 욕심 뭔데.’
-하지만….
-이미 다 뒈져가는 거 막타라도 치시려고? 와서 낼름 먹을 생각 하지 말고 당장 꺼지라고! 아니면 그냥 구경이라도 하든가. 거의 다 잡았어. 거의 다! 잡았다고! 계속 쏴! 쓰러질 때까지 계속 갈겨!
-흐…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냥 쏴 갈기라고! 개새끼들아! 도대체 뭣들하고 있는 거야! 도망치지 마! 어차피 죽는다! 어차피!
-기쁘구나! 흐으으윽… 너무나… 기쁘구나! 어린 죽음이여! 내가 너를 생각하듯 너 역시 나를 생각하는구나!
-계속 쏴! 계속!
-우… 우웩… 이보다 더 완벽한 마지막이 어디 있을까! 이것보다 내게 더 어울리는 죽음이 어디 있을까! 흐… 쿨럭….
-멈추지 마라! 거리 똑바로 유지해! 대형마법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캐스팅 외워!
-이보다 내게 어울리는 무대가 또 어디 있겠나! 고맙구나… 흐… 쿨럭….
‘아니, 시바 죽을 때 죽더라도 좀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죽어보면 안 돼?’
-아아아아… 흐으윽… 흐어어어엉… 너무나도 기쁘다. 너무나도! 내가 어떻게 너를 외면할 수 있을까… 하하…하하하하핫! 네가 나를 이리도 기쁘게 만드는데 나 역시 죽음이여! 너를 기쁘게 만드는 것이 옳지 않은가!
얼음의 가시가 계속해서 쏟아지며 정진호의 온몸에 꽂히기 시작한다.
마력의 효율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말 그대로 사이코패스 살인마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대형살상마법이 발현되는 순간이었다.
녀석은 주문을 외우지 않았다.
온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며 움직일 리가 없는 몸으로 주문을 외운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피가 형태를 갖추고 검이 되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율리에나 역시 마찬가지.
김현성이 그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며 달려들려 했지만 공에 눈이 먼 멍청한 놈들은 계속해서 김현성에게 끼어들지 말라 외치고 있었다.
‘멍청한 것도 저 정도면 재능이야.’
-아아아아아악!
-사제… 사제… 빨리… 빨리!
-뭣 하는 거야… 뭐… 뭣들….
정진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다시 한번 흩뿌려져 있는 피가 형태를 갖춘다.
화살들이 날아들어 오지만 놈은 얼굴만 막은 채로 다시 한번 주문을 사방으로 뻗어냈다.
마법 수준 역시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신성을 벗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놈이 붉은 피를 토해낸다. 이제는 말을 제대로 할 기력도 없어 보였지만….
-흐… 흐흐흐….
하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새어 나갔다.
콰드드드드드드드!
피슉! 피슉! 피슉!
-아아아아아악!
-제기랄… 도망치지 마라! 도망치지 마!
-흐… 우웩… 쿨럭. 우… 죽음….
-하… 흐….
-흐… 흐… 으….
-놈의 힘이 다했다! 놈이….
-하…흐… 흐흐흐흐… 아쉽….
-뭐?
-아쉽구나… 으… 흐윽… 흐어어어어엉… 흐으…으으윽….
‘시바 소름 끼쳐. 시바. 아니, 덩치도 산만 한 놈이 무슨 애새끼마냥… 울어.’
-흐윽… 흐으으… 흐으으으윽… 아쉽구나! 아쉬워… 조금이라도 더 데려가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쉽구나! 겨우 이것밖에 죽이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하구나… 흐… 아아아아아아악!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죽여야 했…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
-…….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이 몸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흐…으윽… 흐으어어어엉….
소름 끼쳐 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시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진짜 광기’의 등장에 주변도 조용해지고 있었다.
제대로 미친놈이다. 내가 보기에도 절대로 엮이기도 싫은 진짜 미친놈처럼 느껴진다. 아예 다른 일반인들과 생각과 사상 자체가 다르다.
놈이 보여주는 광기에 질린 듯한 얼굴들이 눈에 띈다. 심지어 놈을 두려워하는 녀석들도 보인다.
다 죽어가 움직일 수도 없는 정진호에게 공포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화살 한 발, 그 한 발을 날리지 못한 채로 놈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놈들이 이 자리에 모두 모여 있었다.
김현성조차 분노나 복수심을 잊어버린 채로 조용히 녀석을 바라보는 중.
아마 그동안 김현성이 봐왔던 정진호와도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내 기억 속에 있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던 것과도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한참이나 놈이 오열하는 모습을 지켜봤을 때, 이유 모를 공포에 사로잡힌 한 녀석이 석궁을 쏘아 보내는 것이 눈에 보였다.
-으… 으아아아… 죽… 죽어! 이 악마 새끼야!
생각하고 쏜 것이 아니다. 그냥 발악하듯 화살을 쏘아 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정진호의 이마에 너무나도 쉽게 화살이 틀어박힌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있는 정진호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놈의 눈에 고인다.
-붉은… 하늘… 흐….
-…….
-흐…하… 붉은… 하… 하…늘….
-…….
-흐… 흐…하…느…. 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히히히히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직후.
놈의 웃음소리와 함께 놈의 숨도 함께 멎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
‘저… 저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