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87화
외로운 베니고어(4)
“현성이도 1회 차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글… 글쎄….”
베니고어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우, 우리도 확실한 건 모른다고 했잖아. 그야 물론 노을빛의 검신이 1회 차로 가서 큰 사건에 개입해 준다면 이 이상현상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겠지만… 글쎄… 나도… 확실하게는….”
“그럼 문어 촉수 괴물이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채권자라는 가설이 맞다고요?”
“정… 정황상 그럴 확률이 높겠지? 물론 시스템 이외에 누군가가 개입하고 있을 확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어. 아니, 어쩌면 정말로 누군가 개입하고 있는 걸지도….”
“그게 내가 놈들을 조사를 해봐야 한다는 이유다.”
“아아… 뭔 소리인지 알겠네요.”
“그렇지? 이기영 후배가 로헨에 새로운 신화를 부여한 것처럼, 시스템이 아닌 다른 존재가 개입할 가능성도 있다는 거야. 도움을 주려는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우리 대륙을 노리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마 후자인 경우에는 조금 일이 귀찮게 될 확률이 높을 거야. 안 그래도 우리는 여기저기에 적이 많은 상태니까.”
“말인즉슨 시스템이 개입을 허락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요.”
“응. 아마 그럴 거야. 최소한 내가 알기로는 우리 차원의 방위 프로그램이 뚫린 적은 없거든, 균열이 열린 적도 없고… 어디에서도 외부의 개입이 있었던 흔적도 없어. 만약 외부의 개입이 있다는 게 맞다면 시스템과 우리 대륙을 노리는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는 거겠지. 알고 있잖아. 이기영 후배. 시스템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라는 거.”
베니고어의 표정은 꽤나 심각해 보인다. 입가에 크림이 묻어 있지만 않았었다면 아마 그녀의 경고가 더 와닿았으리라.
그녀의 입가에 묻어 있는 크림이 신경 쓰인 게 나뿐만이 아닌 모양인지, 벨리알이 얼굴을 구기며 그녀의 입을 손수건으로 훔치는 것이 보인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악마가!”
“…….”
“쳇. 아무튼 이 대륙의 합법적인 독립을 인정한 것 역시, 시스템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야. 외부가 개입하더라도 시스템의 입장에서는 전혀 거릴 낄 게 없지. 자신의 할 일을 대신 해준다는데 거절할 명분이 뭐가 있겠어? 이기영 후배가 로헨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 역시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시스템과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이해는 한참 전부터 하고 있었어요. 그냥 납득할 수가 없을 뿐이지.”
‘시바….’
차라리 시스템이 자연스럽게 명분을 만들었다는 게 더 반갑게 느껴진다. 만약 외부의 개입이 있다고 한다면 누군가 우리 쪽을 노리고 있다는 소리가 되니 말이다.
“시스템이 먼저였고, 외부의 개입이 후자일 가능성도 있겠네요.”
“응….”
“처음부터 이걸 설계하고 들어왔다는 것보다는 이미 시스템이 설계하고 있는 곳에 와서 분탕을 쳤을 가능성도 있고요.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만약 정말로 개입이 있었던 거라면… 반갑지는 않네요.”
‘시바 이런 일을 겪기 싫어서 독립선언까지 했던 건데….’
아직까지 대륙의 서사가 정리되지 않았단다. 물론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나쁜 상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외부의 개입이든, 아니면 시스템이 준 퀘스트이건 간에 지금 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나와 김현성을 이 대륙의 합법적인 관리자로 인정하는 과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반갑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특히 김현성이 1회 차로 넘어가 여기에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안 그래도 문제를 겪고 있는 게 김현성이 아니었던가. 이미 이 새끼의 머릿속에서 가면 쓰레기는 은근슬쩍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정황상 내가 가면 쓰레기라는 것을 의심하고, 아니,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는 상태처럼 보였다.
그야 둠기영 사건도 있고, 배때지 사건도 있었으니 일종의 자기세뇌마냥 계속해서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김현성은 이미 이 건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걸 포기하고 있었다. 자의적으로 1회 차를 잊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과거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민하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미래를 바라보겠다는 거겠지. 녀석의 1회 차 기억이 묶여 있는 것 역시 아마 그런 연유일 것이다.
아주 조금은 불안정하다고 해도 딱히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는 거다.
‘그런 상황에서… 김현성을 1회 차로 모시고 간다는 건….’
암만 생각해도 개 오바자너.
필연적으로 1기영과 마주칠 수도 있었으니 놈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리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분노가 터져 나올 수도 있고 말이다.
시스템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굳이 이쪽이 따라줘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그렇게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요… 벨 이사님, 만약 이걸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가정한다면….”
“글쎄… 딱히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 아마 대가를 받겠지. 어쩌면 네가 이 대륙의 관리자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고… 최악의 경우에는 차원이 붕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데 말이야.”
“그 정도까지요?”
벨리알이 베니고어를 흘겨보며 입을 열어왔다. 그새 베니고어의 입가에는 컵케이크 크림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슬그머니 손수건으로 크림을 닦아주자 그제야 만족했는지 다시 한번 말을 이어나간다.
“마땅한 대가다. 관리자가 없는 차원은 존재할 수가 없어. 이건 적법한 이야기야.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는 없지. 지금의 네가 이 대륙을 만들고 설계하고 운영하고 있는 만큼 이곳의 시작과 끝에 네가 자리해야 해. 온전한 네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물론 원하지.’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도 돼. 아직 딱히 무엇이라 정답이 나온 게 아니니까. 외부의 개입이 있다면 상황이 조금 복잡해질 수 있겠지만 이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놀랄 필요도, 기겁할 필요도 없어.”
“맞, 맞아, 이기영 후배.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 위쪽에 도움이나 협력을 요청해도 되고… 따지고 보면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야. 차원이 붕괴되니 뭐니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그게 그렇게 단기간 내에 일이 터지는 것도 아니잖아.”
“…….”
“현세와는 다르게 차원의 역사는 길고, 또 느리게 변화해.”
“…….”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해. 우리한테는 그걸 해결할 능력도… 인력도 있고.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하면 돼. 이기영 후배가 언제나 해왔던 것처럼… 그, 그러니까 일단은 마음 좀 추스르자. 계속 스트레스받을 수는 없잖아?!”
“두 분 말씀도 맞아요. 여기에서 이렇게 머리 감싸 쥐고 있어봤자 해결되는 건 쥐뿔도 없으니까. 일단 다른 게이트들을 찾는 게 먼저고, 그 문어 촉수 괴물 새끼들이랑 접촉하는 게 두 번째….”
“…….”
“두 분은 외부 방위 프로그램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시고… 아! 벨리알 님은 따로 조사한다고 하셨죠?”
“그래.”
“궁금증이 전부 해결된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채워졌네요.”
“그, 그래? 그럼 이제….”
“다시 내려가야겠네요.”
“여기서 조금 쉬어.”
베니고어보다 내가 한 박자 더 빨랐다.
‘아니, 얘 진짜.’
말이 겹치기는 했지만 내 입 밖에서 나온 대사가 베니고어의 달팽이관을 강타한 모양이다. 곧바로 억울하고 불쌍해지는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이 상황에 이러고 싶냐구….’
“역, 역시 그렇지? 이기영 후배는 바쁘니까… 어… 어쩔 수 없지.”
“…….”
“그… 그럼 저녁이라도 먹고 가는 게 어때? 아, 아니, 그보다 내가 궁금한 게 있었는데… 혹시 이… 이것 좀 봐줄 수 있을까?”
“…….”
“잠… 잠깐만 기다려. 여기서 잠깐만! 어디 가면 안 돼!”
이후에는 후다닥 어디론가 들어가더니 서류뭉치들을 가지고 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얼마나 많았는지 베니고어의 얼굴을 가릴 정도,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베니고어가 책상 위에 서류뭉치는 내려놓은 이후에 땀을 훔쳤다.
“내, 내가 조금 멍청하잖아. 이기영 후배. 안 그래도 이기영 후배가 여기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었거든… 혹시라도 실수 할까 봐… 물론 지금 급한 문제가 있는 건 알지만… 이, 이것만 봐주고 가면 안 될까?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만 다른 업무들도 전부 스탑 할 수는 없잖아. 그렇지?”
“…….”
“일, 일단 이것 좀 봐.”
‘넘… 짠하자너.’
슬쩍 살펴보기는 했지만 문제는 없는 것들이다. 딱히 내가 손봐줄 것도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 심지어 진 군사가 한번 살펴보기도 했는지 사실 그대로 통과시켜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상에 꼭 달라붙어 나만 바라보고 있으니 부담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
“…….”
“어… 어때?”
“조금…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겠네요. 저녁도 먹고 가야겠는데요?”
“그래?! 역… 역시! 그렇지!?”
‘사실 이럴 시간이 없기는 한데….’
아무래도 그동안 베니고어를 혼자 내버려 뒀다는 사실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얘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래.’
기대감에 부푼 듯한 얼굴, 억울하고 불쌍한 표정은 어느새 무척 밝아져 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서류 뭉치들을 점검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후다닥 소리를 내며 회의실에서 나가버렸다. 벨리알 역시 못 이기겠다는 듯이 슬쩍 몸을 일으키며 한마디를 더 얹는다.
“고생이 많군.”
“뭐, 별거 아니에요. 베니고어 님 말대로 지금 당장 내려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도 없고요. 여기서 잠깐 시간 보낸다고 한다고 뭐 달라질 게 있겠어요.”
“…….”
“그것보다는… 베니고어 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딱히. 그냥 섭섭해하는 것 같다는 것 외에는… 나는 베니고어가 왜 저러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 말이야.”
“뭔데요? 그게.”
“아마 베니고어는 이미 너를 현세가 아니라 이곳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야.”
“…….”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질투하고 있다는 거지. 나 역시 사실 그녀의 생각에 일부 공감하고 있고 말이다. 물론 네가 이곳을 억지로 배제하는 그 심정도 이해가 가지만 격이 높은 이는 그에 걸맞은 책임, 그리고 권리를 피할 수 없는 법이다.”
“…….”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겠나?”
‘무슨 소리기는 무슨 소리야. 쓸데없는 소리지.’
“네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너는 이곳에 걸맞은 인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다. 어쩌면 혹시 모르지, 살아 있는 신의 존재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나?”
“그럴 가능성은 있고요?”
“가능성을 따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지 않나. 네가 이지혜나 진청처럼 적당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나도 구태여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넌 너무나 현세에 매몰되어 있어. 네게 그곳에서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지만….”
“…….”
“베니고어가 질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지.”
“…….”
“게다가 언제나 그렇듯….”
“…….”
“현세에 너무 집착한 신들의 끝은 그다지 좋지는 않아. 딱히 너를 질타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는 거다.”
“…….”
“알타누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테지. 결국에는 적당한 거리감이라는 게 중요하다는 거지….”
의뭉스러운 말을 남기고는 베니고어가 남긴 컵케이크 잔해물을 치우는 녀석, 한 번 손짓하자 부스러기들이 한자리에 뭉쳐서 사라진다.
그 이후, 베니고어가 다시 등장한 직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것은 당연했다.
주제는 다양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베니고어의 어리광 아닌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이 대부분, 와인을 마시고는 취했는지 당장 천마와 우화등선한 신선들을 심판하자고 고성을 내 지르지만 않았다면 꽤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
“…….”
새로운 게이트를 찾았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이후였다.
장소는 마탑.
당연하지만 누구를 만나게 될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