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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91화 (1,28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91화

마법사의 탑(4)

뻔하디뻔한 이야기였다. 린델 전역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던 상태였고, 정하얀의 마법이 아군만 보호해 줄 수는 없었던 상태였으니 말이다.

갑작스레 파도가 몰아치며 함선에 탑승한 녀석들도 있었겠지만, 격렬한 전투 중에 미처 몸을 옮기지 못한 모험가들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최소한의 보호장치야 분명 마련되어 있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누군가는 동료를 대신 배 위에 태우기 위해 아래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격렬한 전투에 파도가 치는 것도 잊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부상을 당해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동료를 지키기 위해 아래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했겠지.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그만큼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변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지휘본부에서도 사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난리네.’

대충 보기에도 파도에 휩쓸려 죽은 이들이 수백이 넘어 보인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포장하고 저들을 영웅으로서 대우해 준다고 해도, 여린 심성을 가지고 있었던 정하얀이 저걸 보고 어떻게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끝이다! 드디어 끝났어!!”

“흐윽… 흐으으윽… 으아아 이겼다고!”

승리의 깃발을 들어 올리고, 모두가 기분 좋은 함성을 내지르는 시간은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다.

목숨을 건 전투 이후의 그 흔적을 정리하는 것은 언제나 비참한 일이다. 린델의 삼대길드를 포함한 지휘본부가 인류가 승리했음을 알리는 사이에도 현실을 깨달은 이들은 동료들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흐윽… 흐어어어엉… 이 개자식… 눈 좀 떠봐. 제발 눈 좀 떠보라고!”

“사제! 아직 신성력이 남아 있는 사제 있나! 빨리… 빨리 여기 좀 와줘!”

“이 개자식! 죽은 거 아니지?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제발… 제발….”

동료, 가족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역시나 눈에 들어온다. 당연하게도 정하얀 역시 마탑의 위에서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전이 끝난 이후에는 모두가 시체를 치우기에 여념이 없었으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거겠지. 심지어 죽은 이들은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살아남은 이들은 사제들에게 정화주문을 부탁하고, 시체들은 모아 격리시킨 이후에 불에 태운다. 혹시나 역병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민간인들을 대피시켰다는 것뿐이었지만 그들은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미 예전의 린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롯이 마탑 만이 위태롭게 쓰러지지 않고 서 있을 뿐, 쓰레기장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뒷정리를 하는 것도 일, 전사들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건물의 잔해를 옮기기 시작하고, 당장 급한 부상자를 위한 캠프는 배 위에 마련한다.

당연히 빅보이 녀석 역시 이런 잡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다.

“뭐… 전투도 끝났으니까. 이제 혼자 올라갈 수 있겠지? 나도 슬슬 내려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여기서 헤어지면 안 되는데….’

갑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일단 녀석의 바짓자락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

“…….”

이 멍청한 덩치는 어쨌든 간에 이 작전에서 마탑의 방어를 맡은 녀석이었다. 마도길드와 어떤 식으로든 커넥션이 있는 집단일 게 뻔했다.

애초에 이기영은 마탑의 수습마법생도 뭣도 아니었기 때문에 신분을 한 번 세탁할 필요가 있었고, 그게 마도길드와 커넥션이 있는 전투 집단이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무조건 달라붙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단 이 새끼한테 비벼야 돼. 이거 어떻게 하지?’

일단은 밀어붙인다. 뭐가 어찌 됐건 간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뭐… 뭐야?”

당황한 녀석의 얼굴을 정확히 바라보며….

“저도 같이 갈래요. 형.”

라는 말을 내뱉는다.

갑작스러운 호칭정리에 조금 당황한 것 같기는 했지만 나빠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빅보이가 보기에는 이 수습 마법사가 제법 근성 있는 마법사처럼 비칠 것이고, 마도길드, 마탑의 수습마법생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다고 여기겠지. 지금은 쓸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미래를 위하면 투자할 가치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수습 마법생이 꺼낸 같이 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알아차린 것 같은 느낌, 말 그대로 아예 자신을 파티에 넣어달라고 말하고 있으니 놈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마탑에서 사람을 빼간다는 말이나 진배없었으니까.

“뭐? 미쳤어? 이 새끼야? 누구 인생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나.”

“괜찮아요. 엄밀히 말하면… 저… 마도길드 소속도 아니고… 마탑에 등록되어 있지 않아서… 이곳에 그 누구도 저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

“…….”

‘나 사연 있는 수습 마법사야.’

슬픈표정, 아련한 표정. 그 안에 살짝 독기를 감추고 있는 표정.

“뭐… 사연이라도 있는 거냐.”

“설… 설명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계속 여기에 있기 싫어요.”

“…….”

“…….”

“어떤 사정인지는 묻지 않겠지만… 나도 숟가락 하나 더 챙길 정도로 여유 있는 사람은 아니야. 까놓고 말해서 우린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네가 뭘 믿고 나한테 몸을 의탁할 수 있겠냐? 내가 네가 생각했던 것처럼 착한 놈이 아니면? 사실 나는 네가 거기에서 뒈지든 말든 상관없었어. 내 동료가 널 챙기라고 해서 챙겼던 것뿐이지. 마탑에 책잡히기 싫어서 그냥 잠깐 어울려 준 거였다고….”

“…….”

“잠깐 탑 좀 올랐다고 내가 뭐 네 친구라도 되는 줄 아는 거냐? 이 핏덩이 새끼가.”

“저… 저! 여러모로 쓸모 있어요. 형. 여러 가지 소환마법도 사용할 수 있고… 빨리 성장할 수 있고요. 잡일도 잘할 수 있고… 아무튼 시키는 일은 전부 다 할 수 있어요. 그 파티원 분들한테도 이것 저것 도움도 될 수 있고요. 이런저런 일들에 쓸모 있을 거예요.”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제길 만난 지 몇 분도 안 된 이런 꼬맹이랑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제기랄… 귀찮으니까 네 갈 길이나 가라.”

‘시바 이렇게 버리는 게 어디 있어. 네가 먼저 시바 하늘 팔았잖아.’

“지금까지 별별 황당한 일들을 다 겪어 왔는데 이건 또 참신하네. 제길. 뭔 개 같은 상황이….”

‘이 개새끼. 시바. 네가 먼저 팔았잖아. 이 새끼야. 데려가.’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빅보이 녀석. 당연히 허겁지겁 놈의 뒤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문, 문제 생기면 그때 다시 돌려보내면 되잖아요.”

“아서라. 아서. 마탑 같은 집단이랑 갈등을 일으키기는 싫으니까. 우린 마탑의 하청을 받아먹고 사는 용병이라고 이 새끼야!”

“없어져도 죽은 줄 알 거예요. 변장 조금 하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요!”

‘시바. 버리지 마. 이 새끼야.’

“제대로 검도 못 휘두르는 꼬맹이랑 뭘 하라고?”

“저… 저 마법사예요. 연금술도 조금이지만 알고 있고 포션도 만들어 드릴 수 있단 말이에요.”

“빨리 네 갈 길이나 가라. 꼬맹아.”

“진짜예요. 솔직히 마탑에서 저 같은 수습마법생 하나 사라진다고 신경이나 쓰겠어요? 제가 여기 빠져나왔는지도 모르고 있는데… 정말로 제가 중요한 사람이면 누가 절 찾으러 왔겠죠.”

“…….”

“…….”

“너 이 새끼… 진짜 수습마법사는 맞는 거냐?”

빅보이 녀석이 중얼 거린다.

‘아 이 새끼 생각보다 눈치 빠르네.’

성큼성큼 다가오는 녀석.

당연하지만 다급하게 마법을 선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것 보세요. 주여, 나 바라노니….”

“굳이 수습마법사 아니어도… 마법을 배울 수 있겠지. 안 그래?”

성큼성큼 다가온 녀석이 내 상의를 들추기 시작한다.

저항할 수밖에 없었지만 저 덩치 큰 놈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 결국에는 억센 손길이 이곳저곳을 더듬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녀석이 찾고 있는 것은 아마….

‘이거야?’

배에 그려져 있는 노예의 낙인이었다.

‘순발력 좋았자너. 곧바로 박아버렸자너. 스토리텔링 한번 완벽하자너.’

2회 차에서는 노예매매가 불법이었지만 1회 차에서는 엄연히 합법이다. 심지어 2회 차에서도 암암리에 노예거래가 진행되는 만큼, 이곳에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법사들이라면 하나 둘 정도 노예를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여러 가지 비인륜적인 실험이나 조수가 필요한 경우에도 노예를 사는 경우가 있었으니, 마법사의 노예 설정이 딱히 나쁜 것도 아니었다.

바깥으로 빠져나와 서성거렸던 이유는 도망칠 타이밍을 찾기 위해서였고… 전쟁이 끝났을 때 그렇게 기뻐하던 이유는….

‘주인이 죽었던 걸 확인했기 때문이야. 빅보이 형.’

말 그대로, 배에 있는 노예의 낙인이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을 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너… 마법사의 노예였구나.”

“…….”

“…….”

‘빅보이….’

“주인은… 죽었나? 죽었군….”

“…….”

“…….”

이제 다 틀렸다는 듯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노예의 말로는 뻔했으니 말이다.

주인이 죽었다고 해도 다시 팔려나가 새롭게 노예가 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 빅보이는 날 버리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성향이랑 기벽이 괜찮자너.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말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거짓 없이 대답해라. 대답 여부에 따라서 널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혹시나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라. 우리 파티원 중에 거짓과 진실을 판별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 놈이 하나 있으니까.”

‘구라 한번 잘 치시네요. 그런 놈이 어디 있어? 시바. 있다고 해도 너네 파티에 가 있겠어?’

하지만 겁먹었다는 듯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네… 네….”

“네 주인은 마탑 출신이었나?”

“아… 아니에요.”

“그럼?”

“제 주인님은 왕국연합의 마도왕국… 에서 왔어요. 이름은….”

“그것까지는 말할 필요 없어. 나는 모르는 편이 나으니까. 그럼 네 주인이 마탑에 체류하는 동안 네 얼굴을 본 사람은 있나?”

“없어요. 저는 주… 주인님이랑 쭉 방… 아니, 실험실 안에 있었어요.”

“마지막… 네 주인이랑 같이 온 마법사들은 있나?”

“그건… 모르겠어요. 저는 작은 상자에 넣어진 채로 이동돼서… 아무것도 몰라요. 마도왕국에 다른 귀족마법사 분들을 만난 적도 없고… 그냥 계속 실험실에만 있어서….”

“제기랄… 미친 자식….”

“네?”

“아니. 너한테 한 소리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빅보이 녀석이 분개하고 있지 않은가.

‘시바 이거 희망 있자너.’

이 새끼 의외로 정의롭다. 아니 정의롭다기보다는 이 지옥도가 된 곳에서도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마음은 거칠지만 속은 따뜻한 빅보이… 임시 고기방패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뭔가를 기대하는 얼굴로 이 새끼를 바라보자. 원래 길가에 유기된 동물들을 들이는 과정이 다 그런 법이니까.

이렇게 속이 따뜻한 놈들은 절대로 이 눈빛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짧지만 함께 모험을 한 우리 사이를 절대로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수차례 고민을 하는 녀석, 아마 이 노예를 자신의 파티로 데리고 가는 게 정말로 탈이 없을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아마….

“제길… 일단 따라와라.”

같은 말을 내뱉게 되겠지.

“네?! 정말요?!”

“조용히 하고 일단 따라오기나 해. 네 처우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으니까. 왕국연합 놈들은 슬슬 떠날 준비를 할 테니 그때까지만 데리고 있어주마.”

“빅… 빅보이 형.”

‘다행이다. 시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지만 절대로 너를 우리 파티로 들이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알아들어? 난 오갈 데 없는 애새끼 책임지는 성격이 아니라고. 그럴 능력도 없고, 위험한 일은 딱 질색이야. 마도 왕국 놈들이 떠날 때까지만이다. 알겠어?”

일단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귀찮은 일에 휘말려 버렸잖아. 씨발….”

‘절대 안 나갈 건데.’

“…….”

‘이 악물고 버틸 건데.’

아마 이 새끼들이 내가 나가는 꼴을 두고 보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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