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92화
마법사의 탑(5)
“빅보이 형! 오셨어요?”
“어? 어….”
“목욕부터 하실래요? 아니면 식사부터? 일단 짐들 저한테 주세요. 빨래할 거 있으면 여기 바구니에 넣어주시고요.”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냐.”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해요? 집이 이 모양 이 꼴인데. 헤….”
“어차피 다 쓰러져 가는 집인데… 이렇게 관리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그래도… 집은 집이잖아요. 일… 일단 빨리 작업 도구부터 주세요.”
“아니, 이건 닦을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어차피 더러워질 물건이라고 젠장!”
“그런 말씀 하지 말고 일단 주세요.”
“이 귀찮은 꼬맹이 새끼.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니까. 이런다고 내가 널 계속 돌봐줄 줄 알아?”
“일… 일단 주세요! 더럽잖아요!”
“제길… 귀찮은 걸 주워왔어. 귀찮은 걸 주워왔다고. 제기랄.”
짜증 난다는 듯이 장화를 벗고 침대에 누워 버리는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바로 놈의 장화를 집어 들자, “아니, 닦을 필요 없다고 했잖아! 이 새끼야! 어차피 장화라고 장화! 내일이면 또 더러워진다니까!”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들은 척할 리 만무, 곧바로 밖으로 나간 이후에는 오물로 얼룩진 장화를 벅벅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걸 모를 줄 알고? 이 새끼야?’
현재 린델은 복구 작업에 한창이었다. 전투가 끝난 이후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 모든 인원들이 총동원되어 흔히 말하는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는 거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고, 시체를 수습하고, 정리가 마무리된 지역부터 임시로 사용할 지역의 기초를 닦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투입되어 그나마 빠른 작업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그게 인력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 되는 것이 아니다.
중장비가 존재하더라도 인력은 반드시 필요했고, 빅보이 같은 체격 좋은 전사들이나 기술자들은 이런 작업 현장 일선에 투입되기 십상이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내가 바보도 아니고 내일이면 또 더러워질 것이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시바 다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자너.’
아직까지도 바닥에는 바닷물이 흥건하다. 2회 차와는 다르게 도로가 제대로 닦이지 않은 1회 차의 린델 바닥은 이미 갯벌처럼 되어버렸다.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바닥이 내려앉은 상황이었으니 내일이면 장화가 다시 더러워질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당연히 녀석의 작업 도구 역시 마찬가지다.
삽과 곡괭이 같은 작업 도구를 닦는다는 것부터가 애초에 어불성설이었고, 녀석의 작업복 역시 굳이 빨 필요가 없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10분도 지나지 않아 진흙투성이가 될 테니 말이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오갈 데 없는 꼬맹이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발악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게 안 먹힐 리가 없자너. 무조건 먹히자너.’
헌신하다가 헌신짝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헌신할 수 있는 상대를 잘 고른다면 버림받을 일은 없다.
적어도 빅보이처럼 속이 따뜻한 새끼한테는 무조건 먹힐 수밖에 없다는 거다.
‘딱 우리가 살고 있는 곳만 봐도 답 나오잖아.’
“…….”
“…….”
‘그렇지 않냐구.’
그나마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다른 곳과는 다르게 이곳은 물도 새지 않는다.
당연히 다른 지역보다는 치안도 좋다. 사실상 마탑 안이나, 린델 밖에 세워진 함선 위를 제외하면 가장 살기 좋은 장소였다.
어떻게 생각해도 빅보이가 머물 만한 장소는 아니다.
애초에 빅보이의 파티 하우스는 이 곳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었고, 마탑의 하청 파티의 입장상 이 지역에 들어올 신분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형 길드와 사회 지도층은 함선에서 생활하고, 마법사나 그 외 중요한 인물들은 마탑에서, 나름 입김이 센 파티가 피해가 적은 지역에서 생활한다.
빅보이는 어느 곳에서도 해당되지 못하는 녀석이었지만 어찌 됐건 간에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다.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어디 뇌물이라도 뿌린 거겠지 뭐.’
마탑의 하청을 받는 파티인 만큼 어느 정도 연줄은 있을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돈깨나 쓰지 않았을까.
심지어 이 상황에서 젠과 살던 곳보다 훨씬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햄비어 고기를 안 처먹어도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우유는 나름 신선했고, 고기도 질이 나쁘지 않다. 심지어 야채도 있다.
물론 내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했다. 이 새끼 하루 일당을 전부 식자재에 사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 새끼 나름 진국이라니까. 말만 틱틱대지. 은근히 잘해준다고.’
슬그머니 망원경으로 녀석을 지켜본 것은 당연지사.
아니나 다를까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는 진흙을 닦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이냐고. 제길! 짜증 나 죽겠네.
쿵쿵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어이 빅보이! 빅보이!
-아이씨! 누구야?
-나야! 문 열어! 이 새끼야!
-칼턴?
그날 빅보이와 함께 있었던 궁수였다.
빅보이가 문을 열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칼턴과 단발머리의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야야! 신발 신고 들어오지 마! 신발 신고 들어오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어이 칼턴! 유진! 신발 신고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제기랄!
-왜 이렇게 유난이야? 빅보이!
-바닥 더러워지잖아!
-제기랄… 별것 가지고 유난이네. 평소에는 제일 더러운 새끼가 왜 이렇게 깔끔을 떨어? 바닥은 원래 신발 신고 돌아다니는 곳이야, 이 새끼야… 어차피 다 무너지는 집에서 말이야.
-아니 벗으라면 벗으라고! 이 새끼들아!
-더러워서 벗는다. 새끼야.
-바닥 더러워지면 꼬맹이한테 바가지라도 긁히나 봐 빅보이?
-뭔 개소리야. 유진. 내가 그 꼬맹이가 뭐라던 신경 쓸 것 같아?
-…….
-…….
-제기랄… 말을 말아야지 제기랄.
-근데 그 꼬맹이는 어디 있어?
-몰라. 안에서 장화랑 작업 도구 닦는다고 지랄하고 있는 중인데 귀찮아서 살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왜?
-왜긴 왜야? 오랜만에 한 잔 걸치자고 찾아왔지. 조지랑 캐넌 알지? 그놈들이 쓸 만한 럼주를 구해왔다고 해서… 뭐 긴히 할 이야기도 있는 모양인 것 같고….
-누구? 삼류도박사랑 난봉꾼? 그 새끼들 아직도 살아 있었어?
-원래 목숨 하나는 질긴 새끼들이잖아. 쓸 만한 건수가 있다고 하더라고 중개수수료 좀 잘 챙겨달라는 거겠지 뭐겠어? 너도 돈 필요하잖아. 그리고 술 못 마신 지도 좀 오래됐고…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실 기회야. 빅보이.
순간적으로 얼굴에 화색이 도는 빅보이 녀석의 표정이 눈에 띄었다. 공짜 술에다가 괜찮은 건수까지 잡혀 있다고 하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수중에 모아둔 돈이 새어 나가고 있을 테니 돈이 급한 만큼 땡기는 제안 일터, 하지만 놈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드리운다.
-뭐 해, 준비 안 하고? 빨리 나가자. 빅보이.
-아… 제길….
아마 어린 꼬맹이를 혼자 두고 나가는 것이 신경 쓰이는 것이리라.
-안 나가?
‘나랑 같이 저녁 먹어야 되자너. 이미 식사도 다 차려놨자너.’
-아 그 꼬맹이 때문에 그래? 내가 대신 말해줘?
-입 닥쳐 유진. 꼬마는 상관없으니까.
-이 새끼 더럽게 잡혀 사네. 야. 몸에 땀내 나도록 작업했으면 술 한잔할 수도 있지. 뭐가 문제야? 어이! 꼬마야! 꼬마야!
-부르지 마! 이 새끼야!
유진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는 당연히 튀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순진한 미소를 장착하고 말이다.
“어… 네? 아! 유진 누나! 칼튼 형!”
“그동안 잘 지냈냐?”
“오신다고 말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아니, 오늘은 밥 먹으러 온 게 아니고 말이야. 빅보이 좀 빌리려고 왔는데.”
“아… 네?”
“오랜만에 한잔하려고 하는데 빅보이가 네가 신경 쓰여서 못 나가겠다고 하더라고. 푸…흐하하하핫.”
“앗….”
“칼턴 이 새끼야! 입 안 닥쳐? 저 꼬마는 상관없다고!”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하루만 빅보이 좀 빌려주면 안 될까? 다른 게 아니라 일적으로 해야 되는 이야기도 좀 있고 말이야… 어쩌면 큰 건수일 수도 있거든.”
“아….”
왠지 모르게 빅보이가 이쪽 눈치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이 새끼 나가서 놀고 싶구나.’
“빨리 꺼져! 이 새끼들아! 제길!”
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은연중에 나가서 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 너도 스트레스 풀고 싶겠지.’
책임감과 미안함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뿐이다. 주방이라고 부를 수 없는 곳에서 약불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스튜 냄새와 내 안전이 신경 쓰일 뿐이다.
아무리 치안이 좋은 지역이라고 하지만 반파된 도시에서 어린아이를 홀로 집에 내버려 두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특히나 낮이 아니라 밤이라면 더욱더 말이다.
원래였다면 택도 없는 소리이기는 했지만 할 일이 많은 희생과 부활의 성자는 관용의 아이콘이다. 애초에 내 허락이 필요하지 않은 일에 허락을 구하려고 하는 모습은 절로 빅보이 녀석의 지지 선언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거다.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제 허락이 필요한가요. 빅보이 형이 가고 싶으면 가는 거죠.”
‘이래도 찝찝해 보이자너.’
“그리고 일이 관련되어 있다면서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저도 혼자 잘 있을 수 있어요.”
“들었지? 빅보이? 꼬맹이가 괜찮단다. 푸하하하하하핫!”
“당장 여기서 꺼져! 칼턴! 제길!”
“빅보이 오늘 외출 허락받은 거야?!”
“그 입 안 닥쳐?! 유진?! 일단 네놈들 전부 꺼져 있으라고!”
발악하는 것 같은 외침에 유진과 칼턴이 후다닥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얼굴이 붉어진 빅보이는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지만 이내 나를 슬쩍 바라본 이후에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어왔다.
“…….”
“…….”
솔직히 아직도 뭔가 찝찝해 보이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어쩌겠는가. 술 이전에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좋은 일자리를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 그렇게 된 것 같은데. 일단 나갔다가 세 시간 후에 들어오마.”
“네.”
“혹시 누가 문 두드려도 절대로 열어주지 말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마라. 그나마 이 지역은 안전하고 경비들도 많이 돌아다녀서 범죄자 새끼들이 돌아다니기는 힘들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낮에도 계속 혼자 있었는데요. 뭐. 여기 사람들은 전부 착한 것 같고… 제 한 몸은 간수할 수 있어요. 빅보이 형이나 너무 많이 마시지 마요. 술은 몸에 안 좋다고요.”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스튜는 혼자 먹고 내 건 꼭 남겨라. 다녀와서 먹을 테니까.”
“네!”
‘빨리 꺼져. 이 새끼야. 나도 할 일 있으니까. 울 하얀이 좀 살펴보자.’
우물쭈물하던 빅보이가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제기랄. 이럴 게 아니라 그냥 같이 가는 게 좋겠다.”
“네?”
어디에선가 그럴듯한 로브를 가져온 빅보이가 내게 옷을 입혀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이거 쓰고 따라와라.”
“…….”
“…….”
솔직히 따라가기 싫었지만….
‘시바 그 주점 더러울 거 아니야… 위생 개에바일 것 같은데….’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