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07화
마법사의 탑(20)
헤르엔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멍청한 새끼들이 안 좋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기도 했지만….
“전부 다 끝났어.”
“이제 끝이야.”
라는 말보다는….
“할 수 있을지도….”
“버틸 수 있는 거 아니야?”
같은 희망에 찬 말들이 더 많이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거다. 약간의 우여곡절이야 있었지만 송수경이 제법 분위기를 잘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업적이라면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
헤르엔의 멍청이들을 이끌고 수성전을 계획한 것도, 이길 수 있다, 혹은 버틸 수 있다는 분위기를 만든 것도, 모두 녀석의 수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린델과 교국에서 지원이 올 것이다, 몇 기 없었던 특수 개체가 커다란 대미지를 입었기 때문에 성급하게 영주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꺼리고 있다, 같은 헛소문으로 민심을 안정시킨 것 같았지만….
당연히 특수 개체에게 대미지를 입힌 꼬맹이 마법사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형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바 이게 바로 촉수 마법사의 힘이자너.’
“잘 부탁드립니다. 마법사님.”
“아… 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네.”
모험가들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영주성으로 피신한 민간인들도 내 손을 꽉 잡아온다. 그 와중에 송수경은 내 옆에 꼭 달라붙어 있는 중, 빅보이보다 이 새끼가 내 보호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나를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싶다는 심정은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행동이 노골적이다 보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도 가까워져야 되는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나 역시 알아봐야 할 게 있었으니 말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마법사님.”
“아, 아니요… 그냥 별거 아닌데요. 뭐… 그냥 인사하러 다니는 것 정도는….”
“마법사님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아마 저분들께는 큰 힘이 될 겁니다. 인간은 희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180도 변할 수 있으니까요.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가만히 앉아서 공포에 떨고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주체적으로 수성전에 참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노인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말입니다.”
‘그건 그래.’
“성벽을 보수하고, 보급품들을 옮기는 종류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모두가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아… 아….”
“부담스러우십니까.”
‘그럼 시바 안 부담스럽겠냐?’
“조… 조금은요. 사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도 안 나고….”
나는 그냥 시바 어디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어린아이일 뿐이라고.
물론 본인 입으로 저런 말을 내 뱉는 놈들 중에 진짜 평범한 놈들은 없다. 특히 주연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특별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국룰 중 국룰이었다.
송수경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내가 나 자신의 입으로 평범하다고 말했다고 한들, 녀석이 퍽이나 나를 평범하게 생각할까.
‘나 너무 불안하자너.’
불안할 수밖에 없자너.
‘난 그냥 평범한 꼬맹인데 사람들이 이렇게 기대감을 가지는 게 너무나도 무섭자너.’
실험실 속에서만 살아갔었던 꼬맹이에게는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 받아보는 기대감이나 호의 때문에 설레는 마음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꼬맹이가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당당할 수 있을까.
당연히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시점, 평소였다면 빅보이가 그 역할을 해냈겠지만….
지금은 송수경이 한 발자국 빠르게 입을 열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본래 빅보이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집에서 슬쩍 챙겨주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방에 들어가서 식사시간에 툭 던지듯이 말을 하면 했지 남들 앞에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회라도 잡은 것마냥 입을 열어오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조금 더 용기를 가지셔도 됩니다.”
“네?”
“마법사님의 안에는 큰 잠재력이 있을 겁니다. 제가 그 모습을 직접 지켜봤고,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마법사님을 지켜봤습니다. 그들이 희망을 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마법사님의 존재 그 자체이니… 자신감을 가지고 행동하셔도 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가 만약 실수라도 한다면….”
“그 누가 마법사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함께해 주시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되어주시는데….”
“…….”
“…….”
‘말솜씨 없는 빅보이는 꿀 먹은 벙어리 됐네.’
“보이십니까?”
‘그럼 보이지 안 보이겠냐고. 이 새끼야.’
“저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마법사님을 믿고 있습니다. 정말로 자신을 믿기 힘드시다면 저들이 믿는 마법사님을 믿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건….”
“다행히 아직은 시간의 여유가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생각할 시간도 많으실 테니… 그래도 혼란스러우시다면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송수경 이 따뜻한 새끼….’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기도 뭐 하니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습니다. 작전에 대해 자세히 설명도 드려야 하고… 현재 헤르엔 내에 상주하고 있는 마법사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게 좋을 테니까요.”
“아… 네.”
“다른 마법사분들께서도 기대가 큽니다.”
“정, 정말요?”
“네. 본인들 역시 처음 보는 마법이라고 하더군요. 아, 물론 학파나 마법에 관해서는 자세히 묻지 말라고 미리 언질을 해뒀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저 작게 교류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겁니다.”
“앗… 네!”
과하게 기쁘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옳다. 설정상 이 마법사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기대하는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당연히 학구열도 강하고, 마법에 대한 열망도 강하다. 송수경에 제안은 목이 마른 여행자에게 우물을 퍼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어떻게 기쁘지 않은 표정을 지을 수 있겠는가.
물론 빅보이의 표정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이 새끼 뭔 생각하는지 알겠네.’
“…….”
“…….”
살짝은 씁쓸하다는 표정이다. 꼬맹이를 빼앗기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좋은 보호자인지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겠지.
송수경은 누군가의 보호자를 자처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이기는 하지만 빅보이가 보기에는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말끔하기도 말끔하고 무엇보다 은근슬쩍 나를 챙겨주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왜 그래. 네가 최고야. 빅보이. 이 새끼는 누가 봐도 딴 맘 먹고 있는 거고.’
물론 지금은 빅보이의 떨궈내는 것이 중요한 타이밍이었다. 송수경과 대화해서 알아봐야 할 것도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자존감이 하락한 빅보이가 말을 걸어온다.
“그, 그럼… 잠깐 대화들 좀 나누라고… 우리는 여기 좀 도와줘야 될 것 같으니까.”
“어? 같, 같이 가요. 형.”
이라고 말해봤지만….
“됐다. 마법사들 이야기하는 거 들어봤자 머리만 아프고… 물론 근처에는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보급품 옮기는 것 좀 손봐주고… 연초나 태우고 있지 뭐.”
“왜 그래? 빅보이?”
“칼턴 너도 괜히 꼬맹이 방해하지 말고 따라와라.”
‘이 새끼 센치해졌네.’
“아… 네. 형. 그럼 금방 끝나고 갈게요.”
“그래. 너무 늦게까지 있지는 말고.”
“네!”
물론 마법사들을 만난다고 해서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송수경의 주도 아래 전술마법을 펼칠 위치에 대해서 토론하거나 각자 알고 있는 스펠들을 이해하고 마력의 파장을 맞추어 보는 것 정도가 전부였지만 즐겁다는 듯이 웃는 게 옳다.
그 와중에 빅보이 녀석은 칼턴과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 마법사들과의 대화가 딱히 재미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살짝 살짝 녀석들을 훔쳐보자 그대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뭔 일인데?
-그냥….
-왜. 이 새끼야. 왜 또 지랄이야?
-그냥 송수경인지 뭔지 하는 그놈을 보니까 말이다.
-어?
-우리가 그 꼬맹이 보호자에 어울리는 게 맞는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딱 뻔하자너.’
-뭐 그런 생각을 하고 그래? 빅보이.
-들어보니까 헤르엔에서 행정업무를 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 배불뚝이 대신에 헤르엔을 지키고 있었다는 거야. 같이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 근데도 여기 남은 거야.
-그래서 뭐.
-그냥. 저런 걸 훌륭한 어른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겠냐. 너랑 내 꼴을 봐라. 이 새끼야. 우리가 저런 꼬맹이 감당할 여력이나 있냐. 사람 죽이는 일하고, 온갖 더러운 일로 번 돈으로 저 꼬맹이 보호자를 자처하는 게 맞냐고.
‘자꾸 그러지 마. 빅보이.’
이 새끼 정체는 금방 드러나게 되어 있으니까.
워밍업으로 마력회로를 한 바퀴 돌린 훈련을 끝낸 이후, 빅보이도 떨어져 나갔겠다. 마법사들과의 만남도 대충 마무리됐겠다.
아직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송수경을 향해 은근슬쩍 운을 띄운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고 말이다.
“그런데 송수경 님.”
“네. 말씀하시지요.”
“린델이나 제국에서의 지원이 오기는 오는 건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장 지원을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아….”
“하지만 늦더라도 내일 저녁 즈음에는 알아차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아무리 헤르엔이 고립되어 있다고 한들,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면 이상함을 느낄 가능성이 크니 말입니다.”
“아아아….”
“물론 다른 외부요인이 없다는 가정하에 말씀을 드리는 거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지원 병력을 꾸리려고 할 겁니다.”
“그렇군요.”
“네. 저희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수성입니다. 아무리 마법사님이 계시고 있다고는 해도 전력의 차이는 명백하니까요.”
“린델에서 지원이 온다는 건 파란 길드마스터나 붉은용병 길드마스터, 검은백조 길드마스터도 헤르엔으로 온다는 거군요.”
“네. 분명히 헤르엔으로 와주실 겁니다.”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 새끼… 만난 적 있나 보네.’
심지어….
“지금은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지만… 분명히 헤르엔을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다른 길드마스터들의 참전 여부는 들리지도 않았는지 구태여 특정 인물을 언급하며 신나게 입을 털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뭐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구태여 놈의 머릿속을 뒤지지 않더라도 놈이 이번 회차에 김현성과 어떤 커넥션이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1회 차처럼 목숨을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단순한 팬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이딴 사이코 새끼가 김현성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부터가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솔직히 김현성에 이곳에 도착해 헤르엔을 구해내도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
‘분명히 뭔 영웅처럼 등장해서 키메라 놈들 쓱싹쓱싹 쓸어버릴 텐데. 그거 보고 메시아니 구세주니 지랄 떨면 또 일이 꼬이게 되는 거 아니겠냐구.’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기는 했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쳐내는 게 맞아.
마력회로 훈련 때문에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을 셔츠로 무의식적으로 닦은 것은 당연지사. 전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배에 있는 문신을 녀석에게 보여 버린 것만 같았다. 황급히 다시 셔츠를 내렸지만….
‘아차~ 실수했자너.’
“아….”
“…….”
‘요즘 너무 편하게 생활하다 보니 조심성이 없어졌자너. 그만 보여주고 말았자너.’
송수경의 동공이 커진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땡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마법 사용이 가능한 고급 노예를 먹을 수 있는 기회.
‘블랙프라이데이라고 젠장!’
순간적이지만 녀석의 눈빛은 분명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