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08화
마법사의 탑(21)
“…….”
“…….”
“아….”
“…….”
“혹… 혹시.”
“네?”
“혹시….”
“네. 무슨 일이십니까? 마법사님.”
“아!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조건 낚일 거야.’
배때지에 그려진 문신을 못 본 척하는 것만 봐도 녀석이 낚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노예 마법사의 처지가 딱하기 때문이라거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어린 마법사의 배에 그려진 낙인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음흉한 생각 하고 있을 게 뻔하자너.’
그렇지 않아도 김현성의 옆에 서고 싶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 있었던 녀석이었다.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향상심과 야심을 가지고 있는 송수경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을 리 만무.
만약 이 노예를 손에 얻는다고 했을 때 녀석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본인에게 부족했던 부분을 완전히 채워줄 수 있다. 노예매매가 이상한 일이 아닌 배경이었으니 흠이 될 것도 없다.
송수경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거다. 2회 차에서도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며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눈과 심장을 탐하지 않았던가.
어린 노예에게 악랄한 손길을 뻗는 것 정도야… 녀석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처럼 비칠 것이 자명했다.
겉으로는 분명 친절해 보이기는 했지만….
“조금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네… 네.”
“마력 탈진으로 기절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오늘 조금 무리하신 것이 아닌지.”
“아, 아니에요. 그런 게… 피곤하기는 하지만….”
“이만 들어가서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아, 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요.”
‘누가 봐도 얼빠진 거 보이지? 막 들켰으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행동하는 거 보이냐구. 허둥지둥 기영이 보이냐구!’
제 삼자가 보기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혹시나 들켰으면 어떻게 하지 같은 불안감이 행동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마치 얼이 빠진 것처럼 말이다.
본인이 본 것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송수경에게 확신을 담아주는 무빙이었다.
다시 한번 나를 빤히 바라보는 녀석은 정리를 마친 듯 이쪽을 조용히 직시하고 있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것을 보니 실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모양, 아마 본인 나름대로 계획을 재정립하고 있지 않을까.
“빅보이 형!”
“이 새끼. 왔냐.”
“어디 계셨어요?”
“칼턴이랑 보급품 좀 옮기고 연초 한 대 피우고 있었지.”
“연초는 끊는다고 하시더니… 냄새 난다구요.”
“딱 마지막이었어. 그것보다 어땠냐? 다른 마법사들이랑 만남은.”
“그냥… 다 좋으신 분 같더라고요. 이런저런 질문을 하시는 바람에 좀 놀라기는 했지만 재미있었어요.”
물론 빅보이 녀석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 또한 국룰이다. 그 와중에 녀석 역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조금은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꼬맹이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쯧. 그래서 혹시 이상하거나 건방진 질문을 하는 놈들은 없었고?”
“전부 착한 분들이었다니까요. 마력의 파장을 맞추는 연습도 했고요. 저도 처음 배우는 것들이 참 많더라고요.”
“재미는 있었냐?”
“재미있었죠. 그래도 형이랑 같이 있는 것보다는 아니었어요. 헤헤….”
“…….”
“…….”
“이 실없는 꼬맹이 새끼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지나치게 부끄러워하고 있자너.
“오늘은 배 터질 때까지 햄비어다.”
“진, 진짜요?!”
“그래! 이 자식아!”
그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우악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는 빅보이 녀석의 씁쓸한 미소를 보니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것 같기도 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송수경에게 나를 맡길 생각은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녀석을 살펴보거나 나랑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테면….
“그 자식 말이다.”
“네?”
“송수경. 어떤 놈인 것 같냐?”
“그냥 좋으신 분 같아요. 착하고요. 듣기로는 헤르엔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책임감 때문에 남아 있는 거래요. 이곳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부터…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하나.”
같은 질문을 던지며 송수경을 파악하려고 한다거나,
“오늘은 혼자 있을 수 있지?”
“네에?!”
“이 새끼야. 내가 언제까지 너랑 붙어 있어야 돼? 나도 나름대로 할 일이 많다니까! 내가 너 나이 때는 인마….”
같은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내뱉으며 사회화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물론 빅보이의 머릿속에서도 이 프로젝트는 장기 프로젝트고, 임시보호하던 꼬맹이를 제대로 된 곳으로 입양 보내는 것보다 헤르엔 수성전을 잘 치르는 것이 먼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겠지만 쓸데없는 정에 휘둘리는 이 녀석이 어떻게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미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꼬맹이의 보호자에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한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당장 눈앞에 있는 수성전은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모습.
‘이 새끼 누가 보면 시바 지금 전쟁 중 아닌 줄 알겠어.’
당장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 임보한 꼬맹이가 뭐라고 이렇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술까지 처먹는 모습을 보고서는 이 새끼의 멘탈이 은근히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막 나가네. 뭐 인생 끝났어?’
“끄윽… 꺼윽….”
“아니, 형.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드셨어요? 칼턴 형. 빅보이 형 왜 저래요?”
“몰라. 이 자식. 술은 또 어디서 구한 건지… 제기랄… 이 멍청한 새끼.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마시고 말이야. 전쟁이 코앞이고, 키메라들이 언제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병신 같아 가지고….”
“뭔 소리야. 칼턴 꺼윽. 아직 멀쩡한데. 어차피 저 녀석들 지금 움직이지도 않는다며… 조금 즐기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 끄윽.”
“으휴… 술 냄새… 일단 들어오세요. 형.”
“이 꼬맹이가. 어른이… 응? 술 좀 먹을 수 있고 그러는 거지. 건방져 가지고… 처음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녀석이… 응? 이제는 꼬박꼬박 말대꾸나 하고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괜히… 끄으윽… 주워왔다니까. 젠장.”
“아… 왜 그러세요. 형. 진짜.”
“쯔읏! 저리 꺼져. 귀찮게 달라붙기나 하고….”
‘뭐 세상 멸망했냐고.’
칼턴도 할 말이 없다는 듯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빅보이 녀석을 바라보기도 했다. 약간의 동정을 섞어서 말이다.
“네가 이해해라. 저 녀석 요즘에 은근히 마음고생이 심하거든… 전쟁 때문에 부담감도 있는 모양이고….”
“제가 이해 안 하면 누가 이해하겠어요.”
“어휴. 저 멍청하고 미련한 새끼 진짜.”
“요즘 마음고생이 심한가 봐요. 혹시 형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별일 아니야. 그냥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 그래. 저 녀석. 맨날 센 척해도 은근히 약한 놈이잖냐. 그냥 이번 수성전 자체가 불안한 거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많겠지.”
물론 합리적인 이유야 있다. 이번 전쟁에서 혹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면 말이다.
‘저렇게 형편없어질 만하지.’
당연히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아무리 내 곁을 지킨다고는 했지만 빅보이는 어쩔 수 없는 전위였고, 가장 사망률이 높은 직군에 위치해 있었다.
그동안은 기지를 발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겠지만 이번 수성전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나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매번 속으로 하고 있던 생각이 송수경이라는 외부적 요인과, 성안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환경적 요인이 뒤섞인 결과물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더 혼란스럽고 두려운 것이 분명했다.
떠맡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애초에 할 필요도 없었던 걱정이었을 테니까.
‘어차피 너 안 죽어요. 시바.’
일단 칼턴과 함께 놈을 침대에 눕힌 이후에 다시금 말을 이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회의는 어떠셨어요?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죠?”
“뭐. 나야 거기서 자리 지키고 있는 게 단데 무슨 말을 하겠냐. 원래 그런 회의에 참가하는 성격도 자격도 없고… 그냥 또 쓸데없는 이야기 했지. 저 키메라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뭐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심지어 숫자도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까. 목적이 뭔지, 왜 저러고 있는지 이야기할 게 많겠지.”
‘그거 니들이 데리고 온 거잖아. 이 새끼들아.’
빅보이 일행 말고도 관계자들이 몇 있었지만 죽어도 지들이 가져온 것처럼 느껴지지 않은 모양이다.
“지하에 땅굴 같은 게 있는 거 하수도 같은 거… 아닐까요?”
“뭐? 참… 헤르엔에는 하수도가 없어. 제국의 수도나 린델 같은 곳에나 있는 거지. 성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지하통로 같은 게 있는 모양인 것 같기는 한데… 안 그래도 레인저들이 한 차례 정찰을 하고 왔다고 하더라고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고 말이다. 당연히 그곳으로도 병력을 파견할 모양인 것 같고….”
“그럼 키메라들은 소환 마법진 같은 걸로 온 거겠네요?”
“소환 마법진?”
“네.”
“잠깐… 너 그러고 보니까… 무슨 마법진 같은 걸로 마법을 사용한다고 했었나?”
“네.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운데 소환마법의 종류라는 것 같아요. 주인님께서도….”
“주인님?”
“아… 아니, 전… 주인… 그러니까….”
“힘들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도 비슷한 마법을 사용했던 것 같았거든요. 악마 소환 마법진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어요. 그렇다고 워프 마법진 같은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럼 찾아봐야지. 시바.’
김현성한테 조혜진을 보내려면 한번 2회 차로 들러야 되는데.
송수경이나 빅보이 등등 복합적인 것들이 모두 맞물려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쟁점은 김현성이 헤르엔으로 오는가 오지 않는가였다.
키메라들이 현재 헤르엔 영주성을 계속해서 압박하고 있는 것 역시 가면 쓰레기가 김현성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김현성의 각성은 거의 끝난 작업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또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2회차 조혜진이 합류하던, 덤혜진이 합류하든 간에 지금 이 상황이 조혜진이 귀환하고, 김현성이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타이밍이라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
“네. 일단은 성안에 마법진들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요. 만약 성안에서 특수 개체들이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지겠네.”
“네. 그렇지 않을까요.”
“키메라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그럼….”
“네. 물론 제 말이 맞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틀릴 가능성이 더 높고요.”
“아니다. 아마 위에서도 도움이 되는 정보라고 판단할 거다. 뭐 말만 해놓으면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어쨌든 간에 생각할 게 많아지네. 그럼… 나는 잠깐 위쪽에 다녀오마.”
“네. 칼턴 형. 잘 다녀오세요.”
“그래. 저 멍청이 말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전혀 신경 안 써요.”
칼턴이 방을 나가고 난 이후에 슬쩍 침대를 바라보자 널브러져 있는 빅보이 녀석이 시야에 비친다.
‘이 새끼 진짜 형편없자너.’
하지만 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쓸데없는 고민이나 하고 말이야.’
“꼬맹이… 너… 이 새끼… 끄윽….”
“…….”
‘잠꼬대도 하자너. 아주 살판 났자너.’
“햄비어….”
‘그놈의 햄비어 진짜.’
“미안…하….”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냐. 이 멍청한 새끼야.’
쿠웅!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계속해서 빅보이 녀석이 널부러진 꼬라지를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어….”
“습격이다! 키메라 새끼들이 몰려온다!”
‘시바. 벌써?’
“전투 준비! 전원 전투 준비해!”
여기저기서 커다란 고함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벌써?’
“빅보이형! 빅보이형!”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난 녀석이 나를 부여잡고 바깥으로 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