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11화
마법사의 탑(24)
‘이… 이 미친 새끼. 시바. 이… 돌은 새끼….’
“계속… 계속 걸으세요.”
‘와…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진짜. 이거 진심이냐구.’
이미 예상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갑작스럽다. 애초부터 송수경의 목적이 헤르엔 수성전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손절하는 것을 보니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누구보다 전세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몸을 빼는 것이 옳은 선택이기는 하겠지만, 이미 탈출 루트를 마련했다는 건….
‘확실히 소름 돋자너… 그래도 이 새끼. 1회 차 때는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었는데.’
빛의 성자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대국적인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기본적으로 김현성을 숭배하고 희생과 부활의 성자에 대한 질투로 미쳐버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일원으로서 나름대로 대륙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물론 녀석의 성향이 이렇게 막장으로 변한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2회 차와 1회 차의 송수경이 다른 사람이듯, 2회 차와 1회 차의 김현성 또한 다른 사람이다.
김현성을 둘러싼 환경은 달라졌고, 어쩔 수 없이 잔인해져야 하는 김현성을 봐왔을 수도 있다.
그 모습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면 녀석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메시아고 나발이고 시바….’
놈은 여기서나 저기서나 김현성에게 영향을 받았다.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
‘이 새끼 진짜 마음에 안 들자너, 김현성 이 새끼도 갑자기 마음에 안 들자너.’
배때지 사건도, 누더기 사건도 생각해 보니까 점점 짜증 나자너.
“히….”
하는 웃음을 내보이는 송수경의 눈을 바라보니 더욱더 빡이 칠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시바.’
어차피 송수경은 김현성과 마주해서는 안 된다. 2회 차 김현성은 송수경을 모르는 것처럼 보였고, 헤르엔에서 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고 말한 적도 없다.
지하실로 내려간다는 건 녀석이 스스로 뒈질 곳을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 대충 녀석이 마음대로 설치게 내버려 둔 이후에….
“정말로 노예가 맞았네요?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 다행입니다.”
“…….”
“인장은 처음 보는 인장인 것 같은데… 어떤 종류의 노예였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신기하고 예쁜 낙인이네요. 어떻게 하다가 마법을 배우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장난감이었군요? 당신.”
“…….”
“이 쓰레기통 같은 곳에서 당신 같은 보물을 발견할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배에 붙어 있는 날붙이가 신경 쓰인다.
심지어 이 미친 새끼는 가학적인 취미라도 있는지, 혹은 경고의 의미인지 계속해서 칼날로 배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바늘로 배때지를 긁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놀랍다. 수경아. 진짜 놀랍다.’
그게 마음이 드는지 자꾸만 히죽히죽거리는 낯짝만 보더라도 놈이 살짝 고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는 와중에도 천천히,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기 여념이 없는 녀석.
슬쩍 눈치를 보고 속으로 주문을 외우려고 했을 때.
당황스럽게도 놈을 따르는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
“…….”
‘시바.’
역병군주나 색기영으로 폼을 전환할 수 있다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1기영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 심지어 헤르엔의 마법사와 기사는 놈에게 충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먹은 거냐구….’
배불뚝이 영주는 애초에 꼭두각시고… 이 새끼가 헤르엔 영주성을 지배하고 있었던 거냐구.
마치 녀석을 호위하며 나아가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도망치거나 주문을 외울 가능성을 원천차단하고 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맞네. 이 새끼가 죽였구나.’
지하통로 한쪽에 뭉쳐 있는 썩어가는 시체들이 눈에 보였다.
“…….”
“…….”
배불뚝이 영주, 그리고 녀석의 심복, 혹은 가족으로 보이는 놈들.
배가 남산만 한 녀석이 누워 있다. 심지어 다른 시체들도 시야에 비친다.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찰 지경, 무슨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진다.
대부분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이들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뒤엉켜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기괴하다. 마치 쓰다 버린 물건처럼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
차라리 정진호가 죽인 시체들이 더 나을 지경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진호의 경우에는 그냥 목적 그 자체가 살인이라고 한다면, 녀석에게는 수단이다.
이 망가진 사이코패스 녀석은 고깃덩어리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녀석은 정진호와는 다르다. 시신들은 무관심 속에서 계속해서 썩어가고 있었다.
‘이 새끼… 너무… 음흉하잖아.’
저절로 그런 생각을 들게끔 했다.
그렇게 녀석의 말대로 지하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 시체들이 어떻게 쓰였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
중앙에 자리한 것은 피로 그려진 마법진, 누가 보더라도 주종계약을 맺는 종류의 마법진처럼 보였다.
“올라가세요.”
“…….”
“올라가세요.”
“저… 저는 노예가 아니에요.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이건… 그러니까.”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셔츠를 단검으로 완전히 가른 이후에는 낙인에 손을 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순간적으로 마력을 인장 쪽으로 보내는 것이 느껴지자 갑작스레 아랫배를 중심으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노예가 아니라고요? 다시 한번 말해보세요.”
“…….”
“당신에게 새겨진 인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교육을 잘못 받았나 보군요.”
‘무슨 교육 이 새끼야.’
“어떠세요? 당신의 새 주인이 눈앞에 있어요. 어떻게 하라고 배웠나요?”
‘나도 몰라 이 미친 새끼야.’
당연히 꼬맹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몸은 반응하고 있었지만 따뜻했던 빅보이와 김현성을 생각하면 굴복할 수 없는 것이 정석적인 행동이 아니었던가.
“저는… 노예가 아니에요!”
“다시 한번 말해보시죠.”
“나는… 노예가 아니란 말이….”
“다시 한번 말해봐.”
‘이 사디스트 새끼 신났자너.’
가스라이팅의 프로답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굴복시키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쥐꼬리만 한 마력을 계속해서 인장으로 보내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점점 더 배가 뜨거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열병에 걸린 느낌에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가 않다.
꿋꿋해져야 한다고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설정상 점점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노예가 아니야!”
‘강한 정신력!’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네요.”
“이이익… 이익….”
‘하얀이 추임새! 시즌2!’
“마법진 위로 올라가.”
“…….”
“그렇지 않으면 찌르겠습니다.”
“…….”
“그렇죠. 그렇게 말을 잘 들어야. 사랑받는 도구가 될 수 있답니다.”
‘이미 지 것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자너.’
물론 그 자신감의 원천은 급조된 마법진일 것이다.
보통의 노예계약은 저런 마법진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전문 노예 상인에게 공증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수준 높은 마법사에게 의뢰를 맡길 수도 없었을 테니 녀석의 입장에서는 저런 걸 준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효과적이다. 언제나 인신공양은 효과적인 수단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이 단점이었고, 노예가 스스로의 의지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단점이 존재했지만 그만큼 억제력이 강하지 않을까.
그 직후,
마법진 위에 자신의 팔목을 그어 피를 뚝뚝 떨어뜨리는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진은 빛나기 시작하고 그 빛의 크기만큼 인장 역시 빛나고 있었다.
희생자들의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 꿈틀거리며 서서히 형태를 만들어가고 내 몸을 타고 올라온다.
‘뭐야. 시바. 이거 뭐야. 뭐야. 뭐야?’
점점 낙인이 있는 곳에 혈액들이 덮어 씌워진다.
‘시바. 뭐야. 불안하자너. 불안하자너.’
물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피의 맹약이든, 희생자들로 만들어진 마법진이든 간에 나는 이 계약에 동의한 적이 없었으니까.
신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것은 듣도 보도 없고, 애초에 불가능한 위업이다. 몇만 명을 인신공양 해도 모자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비주얼이 주는 충격 때문이리라.
일반적인 노예를 만드는 것과 다르다. 그 짧은 시간에 준비한 게 그리 많았는지 송수경과 함께 온 마법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주문을 외운다.
앞으로의 헤르엔 탈출 계획에 내가 필요할 테니 목줄을 쥐여주고 싶은 것이리라.
“…….”
“…….”
‘빅보이 시바. 오고 있는 거지? 그렇지? 우리 화해해야지.’
아니나 다를까 빅보이가 나를 찾고 있는 모습이 망원경에 비쳐왔다.
-뭐야. 제기랄… 꼬맹이 어디로 갔어! 제길! 어디로 갔냐고 칼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빅보이 이 새끼야! 내가 뭐 물어보면 대답 나오는 자판기인 줄 알아?!! 제길….
-제길… 제기랄!
-내가 말했잖아. 씨발! 그 새끼 믿을 만한 거 맞냐고! 튀었어. 방위마법이 사라지자마자 꼬맹이 데리고 도망친 거야. 애초에 헤르엔은 안 중에도 없었던 거라고… 너 빅보이 이 새끼야. 네가.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건지 이제 알겠어? 네가… 네가 이 새끼야!
-제길… 꼬맹아.
-어쩌면… 꼬맹이가 노예였다는 거.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처음부터 접근한 거일 수도 있다고.
-꼬맹아… 꼬맹아! 제길… 칼턴… 칼턴… 어떻게 하지? 어? 어… 어떻게 하면 좋지? 우리 꼬맹이… 어떻게 하면 좋은 거냐고. 흔적은… 읽을 수 있는 거지? 칼턴. 너 궁수잖아. 응? 이런 거 잘할 수 있잖아.
-입 닥쳐. 빅보이. 지금 집중하는 중이니까.
-제발… 제발 부탁한다. 제발….
-이 영악한 꼬맹이 자식.
-왜… 왜?
-움직이자.
-어?
-꼬맹이가 흔적을 남겼어.
의식이 끝났는지 타이밍 좋게 송수경이 입을 열어왔다.
“자. 이제 알아보실 수 있으시겠죠. 제가 누구인가요?”
“주인… 주인님.”
* * *
“길드마스터. 그런데… 헤르엔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시는 겁니까?”
“사실은….”
“네.”
“제가 이곳에 있었을 때 도움을 준 작은 친구가 있습니다.”
“아. 혹시 길드 차원에서… 보상을….”
“아니요. 아마 부담스러워할 겁니다. 이상하게 독립적이기도 하고… 그런 걸 싫어하니까요. 아직은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같이 지낸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지만… 할 수 있다면 그를 린델로 데리고 오고 싶습니다.”
“…….”
“제게는 은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
“아니, 틀림없이 은인입니다.”
“…….”
“꼭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것뿐이에요.”
“길드마스터.”
“…….”
“헤르엔이….”
“…….”
“헤르엔이 공격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