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24화
1하얀(7)
널뛰기마냥 들쭉날쭉하던 감정이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생각해 보면 동요할 필요도 없는데 말이야.’
“헤… 헤헤헤….”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기도 하고….’
“오, 오빠. 전부 말해봐요. 전, 전부요.”
‘확실히 어려져서 그런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이상해.’
막상 내가 이 정도 나이대에 있었을 때는 조금 더 성숙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지도 받은 적도 없다.
그런 상황에 놓인 적이야 있었던 것 같기도 했지만 타인에게 달려가 안기는 것 같은 이상한 행동을 한 적은 결단코 없었다.
어쩌면 어렸을 때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리려고 하는 보상심리 같은 것이 무의식 속에 깔려 있을 수도 있다고 느껴진다.
그때와 다르게 지금은 비빌 수 있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어린 이기영이 스스로 깨닫고 있는 것이다.
명백한 실수, 지금 애기영은 그 실수에 대한 결과를 온몸으로 누리고 있었다.
“…….”
“…….”
‘몇 시간째냐구.’
평소답지 않아 보이는 이기영의 모습이 더 극적으로 다가온 것일까.
애기영이 겪고 있는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 줘야 한다고, 오빠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포용해 주어야 한다고 의식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시 한번 말을 이어 온다.
“그,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글쎄. 갑자기… 시야가 흐릿하게 변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아… 아아아… 그, 그래요? 우리 오빠 무, 무서웠겠다.”
‘상담해 주지마.’
정하얀은 그리 좋은 상담사가 아니다.
계속 똑같은 이야기만 하고 있다. 정하얀은 나름대로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애기영이 느꼈던 심리적 불안감에 대해 공감해 주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튜토리얼에서도 분명히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상황이 역전되어 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뒤에서 나를 꽉 안고 놓아주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
안 그래도 작은 정하얀에게 안겨 있으니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게 된 것 같았지만 정하얀은 어떻게든 그 작은 몸에 나를 욱여넣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평소에 내가 정하얀에게 하던 행동 중 일부를 학습한 것이다. 자꾸만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바로 그렇다.
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안정되어 가는 걸 느끼고 있다는 것.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나, 구토감 같은 것은 없다.
불평불만을 쏟아붓고 있기는 했지만 심신은 차분해진 지 오래였다.
“그… 그래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어요?”
‘다시 반복이야?’
“그러니까….”
“너, 너무 무서웠겠다.”
슬슬 정하얀도 한계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이미 정하얀의 작은 몸에 구겨 넣어진 채로 식사까지 마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다시 돌아가야 되자너.’
미래의 내가 정하얀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면 그건 1회 차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조혜진처럼 2회 차의 정하얀을 1회 차로 불러올 수도 있었지만 그것만큼 위험한 행동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정하얀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고,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가 없는 세계관 최강자를 1회 차로 떨구는 것보다 멍청한 일은 없다.
무엇보다….
‘살려야 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본데….’
분명 1하얀을 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이번 사태로 인해 몇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제한적이지만 1회 차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 그게 어느 정도까지 허락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육망성 마법진이 어느 시기로 떨구어 주느냐에 따라 충분히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건.’
2회 차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
약간의 불안감을 가지고 다시 2회 차로 넘어오기는 했지만, 정하얀의 이른 퇴장에도 2회 차는 변하지 않았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2가지.
1. 정하얀의 이른 죽음은 정상적인 회귀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정하얀 없이 대륙을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지 나조차도 막막해 보이니 말이다.
2. 애기영이 미래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
‘이쪽이 더 가능성이 많아.’
행복회로를 돌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2회 차가 예전의 2회 차와 별다른 변화가 없다는 것은 결국에는 1하얀이 작금의 죽음에서 벗어나 본래의 궤도로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미래의 이기영은 1회 차로 돌아가 잘못된 것을 되돌리는 것에 성공한다. 지금 내가 그 결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정하얀을 살릴 수 있는지, 아니면 예정되어 있는 죽음을 겪게 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이미 예정된 성공이었으니 초조해할 필요도, 흔들릴 필요도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최선이라는 것은 부정할 여지가 없다.
“오, 오빠 그럼….”
“잠깐 파란 길드로 다녀와야겠어.”
‘일단은 조혜진부터.’
“아… 아. 네.”
“여기서 기다릴 수 있지?”
“네… 네! 물론이죠.”
“저녁에 다시 찾아올 테니까.”
“네… 네! 혹, 혹시 모르니까 마법진은 가까이하지 마세요! 방, 방금과 같은 일이 있으면 꼭 다시 달려오거나 연락해 주셔야 해요? 제, 제가 곧바로 달려가서 구, 구해드릴 테니까.”
“…….”
“…….”
“든… 든든하네. 고마워 하얀아.”
“뭘, 뭘… 뭘요. 저야말로 오빠의 힘이 돼서 기… 기쁜걸요.”
나를 혼자 내버려 둔 한소라에게 한 번 눈치를 준 이후에는 곧바로 파란 길드로 향한 것은 당연지사.
이후에 할 일 역시 정해져 있었다.
린델에 있는 육망성을 파악한 이후에, 라파엘이 전달한 문어 촉수 괴물 새끼들의 촉매로 조혜진을 1회 차로 보내야 한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길드로 방문한 터라 정신이 없지만 조혜진을 호출하자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선이 뒤죽박죽이니까 너무 헷갈리는데.’
정확히 말하면 2회 차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상태였지만 말이다. 1하얀의 모습을 본 영향인지는 몰라도 그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폐허 속에서 꽂혀 있는 창 한 자루가 떠오른다.
“…….”
“…….”
“무슨 용무 있으십니까? 아니, 그 전에 요즘에 대체 무슨….”
“혜진 씨?”
“네?”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네?”
“헤르엔으로 가주세요.”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헤르엔으로 가서 저를 구해주시면 됩니다. 그 이후에는 마탑으로 보내주셔야 하고요.”
“…….”
“혹여나 제가 이유를 묻거든, 하얀이를 살려야 한다고만 이야기해 주세요. 그럼 대충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부길드마스터.”
“…….”
“부길드마스터?”
“그것만 알고 있으시면 돼요. 혜진 씨는 지금부터 평행세계로 가시게 될 거니까. 라파엘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으시면 됩니다.”
“아… 네? 네…? 잠깐 부길드마스터? 부길드마스터?”
슬쩍 시선이 조혜진에게 향한다.
‘시바. 진짜 느낌 이상하자너.’
이미 스스로 느끼기도 했지만 다시금 가슴이 진정되지가 않는다.
‘그래. 시바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좋겠네.’
이 몸, 그리고 이 정신은 불안정하다. 어느 정도는 타협점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한번 안아줘 봐요.”
“네? 그게 무슨 징그러운 소리입니까? 아니….”
‘혜지니한테 합법적으로 어리광 한번 부려봐도 되자너. 좋은 기회자너.’
못 이기는 척 이쪽을 꽉 안아주는 조혜진을 바라보니 그나마 기분이 괜찮아진다.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간 이후에는 곧바로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 물론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어차피 이 새끼는 식당에 있겠지.
“어? 형님!”
“돼지 새끼.”
“거 마주치자마자 돼지 새끼는 너무 하는 거 아니요?”
“언제 들어왔어?”
“방금 전에… 들어오기는 했는데… 형님. 혹시 식사는….”
“하얀이랑 먹었어.”
‘돼지 새끼 얼굴도 봤고.’
“이리 와봐.”
“……?”
“고개 숙여봐라. 덕구야.”
“……?”
의문부호로 가득 찬 박덕구의 머리를 쓰다듬자 실실 쪼개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이건 뭐… 칭찬해 주는 거요? 하긴 내가 요즘에 좀… 활동을 열심히 하기는 했지.”
“…….”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네. 시바.’
기왕 쓸데없는 짓을 한 김에 하나만 더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금 고민을 해봤지만 몇 사람이 더 남아 있으니까.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실제로도 효과를 보고 있으니 구태여 피할 필요가 없다.
천천히 망원경을 돌리자. 굉장히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 새끼 잘하고 있나 보네.’
언제나처럼 잘생긴 김현성이었다. 확실히 1회 차와는 다르다. 조금 더 차분하고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얼굴, 조금 더 성숙해 보이는 느낌은 덤이다.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했는지, 돌팔이 정신과 의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는데, 진전이 있었는지 조금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 비쳤다.
-요즘 어떤 기분이십니까?
-글쎄요… 딱히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기분입니다만… 조금 안정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불안하다거나, 특별히 우울하다거나 같은 기분을 느끼신 적은 있으십니까?
-글쎄요.
-…….
-언제나 불안한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생각들을 자주 하십니까?
-그냥 평소에 말씀드렸던 대로… 물론, 이전처럼 극단적인 내용들은 아닙니다. 저 스스로 느끼기에…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잠은 어떻게 주무시고 계십니까?
-새벽에 몇 번 깨는 것을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주기적인 상담이었던 내용으로 보였기 때문에 별 쓸데는 없는 내용들이었다. 어차피 식사 시간의 탈을 쓰고 김현성의 상태를 체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들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나저나 이런 식사를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성 씨.
-매번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한 번 즈음은 보답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둘의 대화는 사무적이기도 하고 사적이기도 했다. 김현성도 그간 돌팔이 의사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지 꽤 적절하고 정상인처럼 보이는 대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에 들어가게 되면 꽤 오랫동안 체류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곧바로 문자를 보낸 것은 당연지사.
[현성 씨? 잘 지내고 계신가요?]
진동을 느꼈는지 움찔거린 김현성의 손이 살며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슬그머니 문자를 보고서는 미소가 보이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당연히 곧바로 답장이 올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그런데 말입니다.
-네… 네. 박사님.
녀석이 여신의 손거울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네?
“…….”
“읽….”
“…….”
“읽씹?”
이번 사건이 2회 차에 무언가 영향이 있었나 진지하게 고민을 해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그냥 씹었다고?”
난 시바 대륙을 구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걸 그냥 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