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26화
1하얀(9)
“이 누나도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난리야.”
“…….”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확대 해석 해서….”
“…….”
“…….”
그래도….
‘조금 아쉽기는 하네.’
텅 빈 공간에 혼자 남겨져 있으니 더욱더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물론 지혜 누나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숨 돌릴 시간을 준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자너.’
어쩌면 지혜 누나가 한 말이 들어맞았을 수도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악재가 겹쳤다는 게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누나의 말대로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연결이 희미해진 것도 영향이 있을 수도 있고, 거기에 몸까지 어려졌으니 정신과 마음이 지친 것도 사실이다.
힐링이라는 게 웃기는 말이기는 하지만 재충전을 해서 나쁠 건 없다.
‘근데 뭐….’
“…….”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괜스레 미리 써 놓은 문자를 계속해서 눌러봤지만 당연히 보내지지 않는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있지만 이게 닿고 있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
딱 일시적인 통신장애에 걸린 듯한 느낌이라 찝찝하기는 하지만 안심할 수는 있었다.
‘연결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고… 나보다는 김현성이 문제자너.’
누나 말대로 현성이한테는 찰나일 테니까. 혹시 불안해하지는 않겠지. 상태도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사고는 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선다.
돌팔이 박사 놈과 즐겁게 하하호호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녀석도 이런 일시적 통신장애에는 많이 익숙해진 게 아닐까. 어느 정도 차도가 있으니 괜찮겠다 싶다가도….
녀석이 이런 감각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돌아가면 박사 새끼부터 어떻게 좀 해야겠어.’
물론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지만 말이다.
“…….”
“…….”
슬그머니 주변을 두리번거려본 것은 당연지사.
눈앞에 보이고 있었던 첨단화 된 마탑은 없다. 다시 한번 예의 그 눅눅하고 기분 나쁜 곳으로 몸이 이동되었다는 게 느껴진다.
폐쇄적이고, 어두운 공간, 정말로 흑마법사들이 사용할 것만 같은 회색빛의 탑이 자리해 있었다.
이제 문제는 어느 시점으로 이동되었냐는 것.
정하얀이 죽기 전인지, 정하얀이 죽은 이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정하얀이 죽기 전으로 이동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반대일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들이 전부 정답이라고는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서둘러 정하얀과 내가 만났던 곳으로 향한 것은 당연지사.
“…….”
“…….”
그리고,
후다닥 뛰어나가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쳐왔다. 심지어 콰당 넘어진다. 애기영과의 대화가 끝난 이후 도망치듯 사라진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었던 시점으로 이동한 것이다.
‘되돌아왔어.’
회귀한 거야.
‘진짜로 회귀했어.’
종류는 다르지만 회귀한 것만은 확실했다. 이걸 회귀라고 불러도 될까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어디 있지?’
한 시대에 두 명의 이기영이 공존할 수 있나?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른 이기영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방금 전까지 정하얀과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멀어지는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었던 이기영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곳으로 들어온 이후에 곧바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존할 수 없는 건가.’
그것 역시 확신할 수 없다. 이번 마법진에서는 공존할 수 없었지만 다음 마법진에서는 공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1회 차로 가는 수단인 줄로만 알았던 육망성 마법진이 이번에는 짧은 회귀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그저 그런 통로가 아니다. 베니고어와 벨리알의 말처럼, 마법진은 구멍 난 1회 차의 서사를 메우기 위한 수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이상현상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나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시점으로 회귀했다는 건, 1회차 역시 지금의 정하얀이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어쩌다가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지, 도대체 이 마법진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여유가 없다.
아무리 짧은 회귀라고는 하지만 이건 시스템의 의지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방법이 어찌 됐건 간에, 뭐가 어떻든 간에, 이건 1회차의 사라진 구멍을 메우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라는 거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서둘러 그녀를 쫓은 것은 당연지사.
“정, 정하얀 님! 정하얀 님!”
“…….”
“정하얀 님!”
하고 그녀를 불러봤지만 그녀는 답하지 않는다. 애기영의 머리를 14분간 쓰다듬다 도망친 그녀는 더 이상 작은 마법사를 볼 면목이 없는 모양, 오히려 더욱더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정하얀 님!”
‘시바 쟤 이속 왜 이렇게 빨라.’
당연히 이럴 때는 꽈당 넘어지는 것이 국룰.
“으윽!”
발이 꼬여 우당탕 넘어지며 나 넘어졌다 온갖 티를 내기 시작하자.
“…….”
“…….”
“괜… 괜찮으세요?”
언제 가까이 다가왔는지 나를 내려다보는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 놀라움이 서린다.
온갖 액션을 보여주며 우당탕 넘어진 애기영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결계를 뚫고 자신을 쫓아온 작은 마법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서둘러 작은 마법사를 일으켜 세운 이후에는 정하얀은 자신을 쫓아온 마법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확인해도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넘어진 무릎의 상처를 확인하고는….
“어, 어떡해….”
“…….”
“많, 많이 아파요?”
라고 말해며 포션을 발라주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본인이 자주 넘어지니 포션을 가지고 다니는 것일까.
이후에는 간단한 치유주문. 신성력이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에 효과가 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중이떠중이 사제들이 외운 주문보다는 낫다.
“죄송해요. 미… 미안해요.”
‘미안할 거 없자너. 애초에 너 때문에 넘어진 것도 아닌데.’
“그, 그런데 대단하시네요.”
“네… 네?”
“이 마법미로와 결계를 금방 뚫고 들어오셔서… 그, 그런 사람은 그동안 없었거든요.”
“아… 아….”
“…….”
“…….”
‘수준이 높은 게 몇 가지 보이기는 했는데.’
그건 정하얀의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한 사람밖에는… 아, 아니, 분명히 풀 수 있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아… 어떻게 알고 계셨나요? 분명히 느끼기 어려운 주문들도 있으셨을 텐데… 마, 마력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민감한 걸까요?”
“그… 그냥 눈에 보여서… 느껴지기도 했고요….”
“아!”
“파… 파훼하는 건 어렵지만 통과하는 건….”
“아! 아아… 아아아… 헤…헤헤… 그렇구나. 보이는군요. 작은 마법사님의 눈에도.”
“…….”
“그, 그런데….”
‘왜 불렀냐고?’
시바 나도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 하자너.
당장 몇 시간 후에 목을 매달려고 하는 것을 막으러 찾아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방금 전에 회귀했고,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말이나 무언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야 말 몇 마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고통이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줄 수가 있을까.
애초부터 그녀와 가까웠던 사람이었으면 몰라도 지금의 애기영은 그녀와 별다른 서사를 쌓지 못했다.
그냥 잠깐 마주쳤던 것이 전부였고, 논문에 관해 토론 아닌 토론을 했던 것이 전부다.
그녀가 처해 있는 현실에 공감한다느니 위로가 되어주고 싶다느니 힘이 되어주고 싶다느니 하는 말들도 하등 쓸모없는 말들이다.
적어도 내가 정하얀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그런 말 몇 마디로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잘 모르겠자너.’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지, 어떤 대답이 정답에 가까운 것인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답이랄 게 없다.
그냥….
‘얘가 했던대로 하자.’
익숙하지 않은 일이니. 정하얀이 했던 그대로 행동하자.
조금은 느닷없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1하얀을 꽉 껴안는다.
“어… 어?”
그녀의 몸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는다. 머리까지 손이 닿지는 않았지만….
“괜, 괜찮아요.”
“…….”
“괜찮아질 거예요.”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반응이 있는지 반응이 없는지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가 않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전부 다 괜찮아요. 정하얀 님 잘 못이 아니니까요.”
‘상투적이지만 뻔한 말이 잘 먹히지.’
뻔한 말을 내뱉자 천천히 어깨가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직후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화들짝 놀란 이후에 다시 반대쪽으로 뛰어가려고 했을 때.
“내… 내일도 뵐 수 있죠?!”
라는 목소리를 크게 외치자.
“네… 네!”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은 그녀를 잡을 명분도, 그녀와 함께 있을 명분도 없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으니까.
“…….”
“…….”
망원경으로 정하얀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어느덧 자신의 방에 도착해 서둘러 방문을 닫는 그녀의 모습이 비쳐왔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방금과 다르지 않다. 마치 쓰레기장처럼 보이는 방 안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정하얀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아까부터 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기색이 보이지가 않는다.
슬퍼서 울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별것 아닌 위로에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아 울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후에는 여러 가지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양손으로 눈물을 닦고 쓰레기장에서 푹 하고 눕는다든지, 품에 있는 편지를 읽는다든지, 종이비행기를 접어 천장 위로 날린다든지 하는 일들이었다.
몇 번을 뒹굴거리던 그녀가 서랍을 연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이후, 그곳에 길다란 로프가 자리해 있었다.
손가락으로 로프를 가리키자 혼자 공중에 두둥실 떠오른 것이 스스로 매듭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치 장난을 치는 것처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로프를 바라보며 정하얀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째서 저런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인지, 왜 그녀가 자꾸만 극단적인 선택에 무게를 두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위로가 되지 않았던 걸까.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한 게 아닐까. 트리거를 자극할 만한 일이 있었을까. 그냥 삶에 별다른 미련이 없는 걸까.
얘는 도대체 시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시바.’
정하얀이 조용히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마법으로 묶은 로프를 그대로 손에 쥐어 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이라도 방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하나 고민했을 때.
그녀가 조용히 로프를 다시 땅바닥에 내려놓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리고….
-언니. 언니 있어요? 저 아영이에요.
-어… 어? 아영이?
-문 좀 열어주세요. 언니.
-아… 아!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요. 오랜만에.
조심스레 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민 정하얀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는 김아영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막았다.”
-들어가도 돼요?
-안… 아니….
-그럼 빨리 나와요. 오랜만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언니.
-으… 으응….
정하얀의 죽음을 막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