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34화
1하얀(17)
그녀를 지금 이 순간까지 살린 것은 바로 나였다.
‘시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미래는 변하지 않는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었고, 그걸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아니, 불가능하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불안감이 현실이 된 것이다. 아직까지는 상황을 지켜보자고, 정하얀을 계속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행동들이 크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정하얀은 스스로 목을 매다는 것을 멈추고 있었고, 마치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녀는….
정하얀은 마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혀 있던 그녀가 마탑의 밖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그녀를 둘러싼 상황은 격정적인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린델에까지 전쟁의 여파가 닿지 않고 있었지만 날개가 달린 천사들과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김현성이나 차희라같이 대륙에 내로라하는 네임드들과 중대형 길드들, 심지어 소년병까지 차출하는 일이 잦아졌고, 정하얀은 매번 그들과 함께 원정을 떠나 몇 주가 지난 이후에 되돌아오기도 했다.
매일같이 패전 혹은 승전보가 울려 퍼졌고, 여기저기에서는 인류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마탑의 수습 마법사들은 정하얀의 보호 아래에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텅 빈 마탑을 보는 것은 이제는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린델의 거주지역에서는 매번 사망자들을 알리고, 그걸 지켜보며 무너지는 가족들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고, 그에 비례해 전쟁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명백하게도 정하얀을 마지막으로 내몰고 있었다.
전쟁은 모두에게 잔인하지만 특히나 정하얀에게는 더욱더 잔인했다.
“…….”
“…….”
‘뭐… 사실 힘든 게 정하얀뿐만은 아니지만….’
당연하지만 빅보이 일행도 전쟁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는 상황이 나았지만 말이다.
“절대로, 절대로 형들은 가지 마세요.”
“…….”
“…….”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린델 방위군으로 편성됐다고 그러네. 뭐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여기저기서 난리야.”
“이번에 린델 방위군도 새로 편성한다고 그랬잖아요. 괜히 이상한 곳에 들어가는 거 지원하지 말라고요.”
“우리가 널 두고 어디로 가겠냐. 응? 우리도 우리 목숨 챙길 줄 아는 사람들이야.”
“그럼 왕국연합 원정은 또 뭐예요?!”
“별것 아닌 임무였지 뭐. 그냥 보급품 옮기는 거… 그쪽이 지금 난리니까. 인원이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 여기 가만히 있는 것도 눈치가 보인다니까. 네 또래 꼬맹이들도 싸운다고 나가는 마당에… 너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원래 칼밥 먹고 사는 놈들은.”
“그놈의 칼밥! 칼밥 이야기 좀 그만 좀 해요.”
“아… 그, 그러니까.”
“꼬맹이 말이 맞아. 빅보이. 그때 날개 달린 놈들 봤잖아? 그놈들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니까.”
“마주쳤었어요?”
“어? 그… 그게….”
“마주쳤었냐고요!”
“마, 마주치기는 무슨 먼발치에서 보기만 했지. 신창이 그놈들 후다닥 썰어 재끼는 거 말이야. 원래 보급 임무 중에는 이런저런 위험이 따를 수 있는 거라고. 우리는 그놈들이랑 칼 맞댈 생각 없으니까 안심해. 적어도 선봉으로 돌격하는 멍청한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
‘시바 어떻게 안심을 해?’
왕국연합이면…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 안 걸린다는 건데.
“우리야 배신자 놈들 처리하는 것밖에 없어. 그 날개 달린 놈들은 영웅 등급 판정을 받은 모험가가 아니면 손도 댈 수가 없고.”
전쟁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조혜진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뭐라고 말하기 애매한 상황에 있었다.
정하얀이 대공방어마법을 빠르게 보급해 놈들의 이동 경로가 제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도가 느리다.
아마도 1기영이 내부에서 권력을 쥐어 잡고 있는 중이라 생각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녀석들은 쓸데없는 탁상공론을 좋아했으니 전쟁을 진행하면서도 인류를 어떻게 요리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겠지.
개체 수를 얼마나 줄이는 것이 좋을지, 정말로 그런 것들이 옳은지….
물론 그런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지혜 누나의 말이 뼈저리게 느껴질 정도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당연히 여기저기에서 소문들이 들려온다.
“뒈졌단다.”
“누가?”
“로나프의 싸움꾼, 발렌틴 알렉산드로.”
“공화국 오호대장군? 그 괴물이?”
“뭐, 상대가 더 괴물이었다는 거지. 푸른 머리에 낫을 달고 있는 천사였는데…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머리가 날아갔다고 하더라고. 그쪽 네임드라는 거 아니겠어?”
‘케루빔.’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팽팽했던 전선이 기울어진 것은 당연지사. 항상 패전만 들려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린델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실제로 망원경으로 전선을 들여다보면, 북부를 중심으로 점점 대륙 연합군이 밀려 나가고 있었고, 기울어진 전선만큼 녀석들이 인류의 구원자라고 말하는 놈들이 많아졌다.
인류를 배신한 놈들이 단체로 궐기해 수장의 목을 바치는가 하면, 그들이 정말로 천사이며, 더럽혀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구세주라고 주장하는 놈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대륙은 이미 감당할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든 지 오래다.
‘완전 개판이자너.’
보이지 않는 위협으로 녀석들을 홍보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중심으로 뭉쳤던 2회 차와는 다르다. 1회 차와 2회 차는 출발선만 다른 것이 아니다.
전선에서 탈영한 병사들은 보기 흔하다.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굶주리는 이들도 존재한다.
여기저기에서 나돌아다니는 음모론에 휩쓸리는 이들과 천사들을 알타누스의 심판이라 말하는 사교도까지 생겨났다.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던 대륙이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이 대륙의 기둥들 때문이었다.
김현성, 정하얀, 조혜진, 차희라 그 외에도 각 국가와 집단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놈들은 패전 속에서도 조금씩 승전보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인기가 없었던 김현성의 귀환을 환영해 주는 린델 놈들의 모습이 보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고맙다!”
“수고했어!!”
“넌 영웅이야, 김현성!”
“믿고 있었다고 젠장!”
“어서 와라!”
‘이 졸렬한 새끼들 진짜.’
제국의 개라고 죽일 것마냥 욕할 때는 언제고….
지금에 와서는 영웅이란다.
정말로 오랜만에 귀환한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온다.
온몸에 피를 흠뻑 젖히고 돌아온 녀석의 눈은 피로함 이외에 다른 감정은 없다.
분명 승전 후의 귀환이라 들었지만 행색은 마치 후퇴한 것처럼 보인다. 여기저기에 상처들이 눈에 띄었고….
‘얼굴도 많이 상했자너.’
그래도 잘생기기는 했자너.
무엇보다 지쳐 있는 것만 같다. 그나마 눈에 띄는 성과는 차희라와 완전히 화해했다는 것 정도밖에 없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녀석이 애써 웃음을 보이고 있다. 환호해 주는 린델의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차피 또 며칠 뒤에 나갈 것 같은데 뭐. 뭔 또 승전식까지….’
지금의 김현성에게는 그냥 귀찮은 일정일 뿐이다. 군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나쁘지 않은 개수작이었지만 말이다.
시간은 흐른다.
김현성이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만큼 정하얀 역시 괴로운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진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자너.’
왕국연합 전선이 완전히 밀려난 이후에 마탑으로 귀환한 것이다.
그동안의 정하얀의 활약이야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 김현성도 김현성이었지만 정하얀은 이 연합군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을 정도였다.
명백하게 그녀는 외신전의 기둥이었으며, 신화였고,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그녀 스스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점점 추앙받았으며,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로 변태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정하얀 님.”
“네.”
“요… 요즘은 좀 어떠신가요?”
“괜… 괜찮아요.”
‘괜찮기는 개뿔….’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습관성 마력탈진으로 인해, 머리의 일부분이 탈색되어 있다.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것들을 뽑아낸 탓에 머리숱이 평소보다 적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좋지 않은 것은 그녀의 표정이었다. 표정이 죽어 있다. 이런 표현이 가장 어울릴 정도로 그녀의 얼굴에는 생기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많은 죽음을 봐왔겠지, 적군 아군 가릴 것 없이 본인이 시전한 마법에 휩쓸린 것들이 보였을 테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꼬마 수습 마법사에게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언, 언제 또 나가시나요?”
“글쎄요… 지, 지금은 왕국연합에서 유지하고 있었던 북부 전선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라… 다시 전선을 재구축하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도 소규모 전투가 전부고… 적군 측에서도… 이 전선을 유지하고 싶은 것 같았어요. 아… 이,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구나. 전, 전쟁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고… 공부를 더 열, 열심히 해야죠.”
“헤… 헤헤….”
“정말… 수습 마법사들은 전쟁에 관심을 가지면 안 된다고요.”
‘그래도… 힘들어 보이네.’
“…….”
“…….”
“오, 오늘은 뭘 보여주실 건가요? 그동안의 연구는 어땠나요?”
“이것 좀 보세요. 저번에 말씀해 주신 대로… 균열박물관에서 나온 아티팩트를 가지고 나왔다는 사람들을 수소문했어요! 전쟁 중이라 쉽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고대물품들을 가지고 올 수 있었어요.”
“정, 정말인가요?”
“네! 이, 이것 좀 보세요. 이 동력장치를 보시면….”
“아… 아아….”
‘이제는… 별로 흥미도 없어 보이네.’
얼마나 남았지.
얘가 죽기 전까지 도대체 얼마나 남은 거지.
더 이상 회귀할 수도 없거니와, 더 이상 그녀를 구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 오래,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놔주는 게 더 좋을지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그녀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녀를 놓아주는 게 더 옳은 선택이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혼자 있을 때, 그녀는 우는 시간이 잦아졌다.
“일단, 이것 좀 드셔보시겠어요? 제가 연구한 포션인데….”
“네….”
“정, 정하얀 님께 도착한 편지에요. 많은 사람들이 감사하다고….”
“아아… 네. 그렇네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처럼 비쳤다. 자신의 손으로 생명을 빼앗는다는 죄책감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고.
‘내통도 하고 있었던 시기였을 테니까.’
정확히 어떤 지령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몇 가지 더 큰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이제 그 시간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졌다.
“…….”
“…….”
기에나 할머니가 작전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로운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던 정하얀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빈 껍데기 같자너.’
내 눈에 보이는 정하얀의 모습이 딱 그 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