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36화
1하얀(19)
1기영은 내가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시바.’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2회 차에서도 이 비둘기들은 자신들이 회귀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멍청한 시스템 새끼.’
이걸 정상적인 회귀라고 볼 수 있을지, 정상적인 회차로 분류할 수 있는 회귀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녀석들이 위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녀석들이 위화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1기영에게 벨리알이 붙어 있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 한 번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정하얀을 살려내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되돌리지 않았던가.
병신이 아니라면 눈치채고 싶지 않아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덤기영조차 계속된 리셋을 눈치챈 전적이 있었는데, 오리지널인 녀석이라고 이번 사태를 눈치채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내 안일함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 멍청한 시스템 새끼가 사고를 친 것이다.
‘이런 건 시바 알아서 보정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설마.
이것도 조각을 맞추는 데에 필요한 일인가.
1기영이 회귀에 대해서 깨달은 것이 지금 이 시점이라면, 녀석이 나로 인해 회귀에 대해서 깨닫고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은 거라면, 어린 죽음이 녀석에게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사람이라면….
순간적이었지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정을 하게 된다.
너무 여러 가지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온 탓에 정신이 없다고 느껴질 지경.
4대 천사들은 정말로 회귀에 대해서 눈치챈 것이 맞는지.
‘아니야. 세라핌은 그냥 변수라고 이야기했어.’
1기영은 어린 죽음의 존재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내가 2회차 미래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계속된 회귀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눈치챘는지, 녀석이 지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여러 가지 걱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제 막 정신을 차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을 미처 챙길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어지럽다.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당장 눈앞에 있는 위협보다는 저 멀리 있는 것들이 더 위험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생각과는 다르게 온몸은 경고를 내보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지켜보자고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지만 눈앞에 있는 적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시바.’
눈앞에 있는 것은 4명의 비둘기 중에서도 가장 재수 없었던 그 세라핌이었으니까.
지금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게 느껴진다.
천천히 다시금 세라핌을 올려다본 것은 당연지사. 2회 차의 가면쓰레기를 카피했던 세라핌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이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눈앞에 있는 것은 마치 어린 세라가 성장한 모습만 같다.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얼굴, 한껏 움츠러든 몸,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뭔가를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모자란 놈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나는 녀석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기가 죽은 얼굴에는 어떠한 악의도 보이지 않는다. 녀석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인류와 대륙을 위해서라고 믿고 있었다. 경험상 이런 녀석들은 대개 또라이 속성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미안해요.”
“…….”
“얌… 얌전히 죽어주시는 건… 조금… 힘드시겠죠?”
‘진짜 2회 차랑 너무 다른 거 아니냐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듯이 망설임이 보이고 있었지만 아직 이쪽은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꽉 껴안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쳐온다.
“오, 오빠.”
‘시바 나 네 오빠 아니야.’
“정하얀 님.”
“오, 오빠가 와줬어. 오, 오빠가… 흐윽… 끄윽… 와줬어. 와… 와줬다고….”
세라핌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가 자신을 찾아온 게 기쁜 모양,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정하얀이 보였지만 여러 가지를 설명할 시간이 없다.
“오, 오빠가… 흐윽… 고마워요. 미안해요. 이제부터는….”
“…….”
“흐윽….”
결국에는 참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더 내 몸을 꽉 껴안는다.
몸이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세라핌 녀석을 지켜보는 것이 먼저, 혹시나 기습을 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는 반대로 놈은 나와 정하얀의 짧은 해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퍽이나 친절하자너.’
“…….”
“…….”
뭔가 망설이는 듯한 모양새. 결국에는 세라핌이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저… 제가 보이시나요?”
“…….”
“저기요….”
“…….”
“저… 저기… 저는 세라핌이라고 합니다.”
‘알아 이 병신 새끼야.’
이런 녀석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국룰이었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다. 계속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던 정하얀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기 시작했으니까.
“아,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
“그러니까… 이제 끝나신 거 맞으시죠?”
“…….”
“정하얀 님 일단….”
“아….”
“꼭… 꼭 기억할게요. 두 분의 모습…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저도 사정이 있어서… 죄송해요.”
“…….”
“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아무래도 여러분들은 죽어주셔야 될 것 같아요.”
“…….”
“제, 목소리… 들리시는 거 맞으시죠?”
“…….”
“상… 상관없으려나… 그… 그럼 이만 죽어주세요.”
순간, 세라핌의 몸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저 빛은 명백하게 정하얀과 나를 배제하기 위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정하얀이 곧바로 손을 위로 올리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진다.
환한 빛이 마법진과 부딪치며 콰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으로 인해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사방으로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하얀의 방 안에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 같다. 방어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하얀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저항하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지랄.’
“오, 오빠… 오빠?”
“설명은 나중에!”
“제… 제가 구해드릴게요! 피하세요!”
‘나 네 오빠 아니야. 빌어먹을 네 오빠가 저 괴물을 시바 여기로 보낸 거라고.’
콰아아아아아아!
콰드드드드드드드득!
마탑은 이미 그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두 힘의 부딪치는 순간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쓸려나간다.
정하얀이 다시금 주문을 외우자 거대한 원소들이 공중에서 소환되어 세라핌에게 쏟아지고 세라핌은 손을 휘두르며 그것들을 막아내기 시작한다.
초월자들의 싸움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방이 순식간에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지?’
어차피 미래는 바뀌었다. 이후의 일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곧바로 폼을 전환하려고 했지만….
‘시발 억제력?’
“이 개 같은 시스템!”
지금 이 순간, 차원을 관장하는 시스템은 1회 차에 또 다른 신을 강림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막대한 신성을 소모하면서 색욕과 영면의 군주를 강림하려는 시도는 곧바로 무위로 되돌아간다.
지금은 정하얀과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도망치기 바쁜 저 마법사들이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빛이 쏟아지고, 이를 악문 정하얀이 나를 껴안은 채로 하늘로 손을 뻗는다.
콰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다시 한번 마탑을 두들긴다.
‘차희라는 있나? 김현성은 지금 뭐 하고 있지? 다른 곳에 있나.’
“제발… 저항하지 말아주세요. 대륙을… 대륙을 구하기 위한 일이에요.”
‘지랄 좀 하지 마 제발.’
“이익!”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무의미한 희생이….”
퍼어어어어어어어엉!
“제…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오빠!”
‘떨어질 수 있겠냐고. 시바. 애초에 네가 붙잡고 있잖아.’
“으… 으으윽!”
“일단 도망쳐요. 정하얀 님!”
“안,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이….”
‘시바.’
“알타누스! 알타누스! 시바! 뭐 하고 있어!”
“네?”
“알타누스!”
‘이것도 안 되나?’
아니. 원군이 올 거야.
곧바로 망원경으로 김현성 쪽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정하얀이 자살했었던 당시, 김현성은 분명히 도시에 체류하고 있을 터였다. 정하얀이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후우….
망원경 속에 비친 것은 쓰로누스와 검을 든 채로 마주하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었다.
‘이미 묶였나?’
차희라는?
낫을 든 케루빔을 내려다보며 웃음 짓고 있는 차희라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적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한 얼굴이다.
‘전부 다 끌고 왔어.’
내가 계획을 변경한 것처럼 1기영 역시 어린 죽음의 존재를 깨닫고 모든 계획을 바꾸었다.
외신 3마리를 린델에 투입시켰다. 지금의 린델의 전력으로 놈들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곧바로 망원경을 확대한 이후에 모든 전장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하늘에서는 천사들이 내려오고 있는 중,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린델은 안전할 거라고 믿었던 대륙민들은 세상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모험가들은 곧바로 방어구와 무기를 챙기고 밖으로 나선다.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대형 길드의 모험가들이야 곧바로 놈들에게 대항할 수 있었지만, 중 소규모의 버러지 놈들은 그렇지 않다.
‘아주 난리 났자너. 시바. 퀘스트라도 떨궈야 되나.’
뭐가 어찌 됐건 간에 일단은 이 비둘기 새끼들을 밀어내는 것이 먼저였다. 전력의 차가 있기는 하지만 놈들과의 싸움에 익숙해진 모험가들의 전력도 결코 부족하지는 않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목소리에 당황하는 놈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는 했지만….
‘이 새끼들 말 하나는 잘 듣자너.’
퀘스트라고 하면 귀신같이 말 잘 들어.
인류는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어.’
일단은 지금 위기를 넘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뭐야. 퀘스트? 갑자기?
-일단 밀어내! 빌어먹을 비둘기 새끼들! 대공마법 쏟아부어!
-움직여! 빨리! 제기랄! 일단 마탑으로 이동해.
‘린델은 정리가 돼도 여기가 문제야.’
정하얀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회 차의 정하얀은 전투에 익숙하지 않다. 전투력이 곧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이라고 알고 있었던 2하얀과는 다르게 1하얀은 순수 마법사에 더 가깝다. 그녀 정도 위치에 오른 마법사에게는 보호해 줘야 할 전위가 필요하지 않지만 그것도 경험이 많은 마법사였을 때의 이야기다. 그녀는 백업을 필요로 한다.
다행히도.
“이 개 같은 비둘기 새끼! 언니!”
허겁지겁 이쪽으로 뛰어오는 김아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명… 명예추기경님?”
그녀의 뒤를 뒤따라오고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뭐야… 이 새끼들 여기 왜 있어?’
차원의 틈새에 가장 처음 유기된 녀석들,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들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정… 정말로… 명예추기경님이….”
‘기적의 사제 마리엔?’
“이건… 예상외로군….”
‘사냥개 이주혁?’
그 외 떨거지들 역시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이곳에서 있다.
라파엘 없는 라파엘 파티가 절묘한 타이밍에 이곳으로 당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