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40화
1하얀(23)
“사…랑…한다.”
“…….”
“…….”
“…….”
“…….”
계속해서 들려오던 소음들이 멎은 것은 몇 분이 지난 직후,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굳이 망원경으로 녀석들의 모습을 확인하지 않아도 이미 놈들이 숨을 거뒀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병신 새끼들.’
어차피 빅보이, 칼턴, 유진과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이 새끼들이 뒈질 거라는 건 본래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으니까.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1회 차는 결국 버려져야 하는 세계였다. 템플러로 만들어 2회 차로 데려간다는 선택지도 있기는 했지만 모두가 그 돼지처럼 운이 좋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놈들이었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고기 방패로서 놈들은 꽤 멋지게 퇴장해 준 셈이었다. 아름답고 드라마틱하게 말이다.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쓸모는 있었자너.’
박수를 보내는 게 옳은 최후였다.
‘착하기도 했고….’
햄비어 고기가 조금 짜증 나기는 했지만 녀석들은 나름대로 이상적인 보호자였다.
조혜진이 올 때까지 내 신변을 지켜주기도 했고, 그 외에도 여러 부분에서도 큰 도움이 됐었으니까.
부족함 없이 1회 차를 즐길 수 있었을 정도는 되었다는 거다. 물론 방은 더럽고, 위생 관념은 에바였고, 씻지도 않는지 냄새나는 놈들이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체취가 딱히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않았다.
오히려 이 새끼들이 나름 유쾌한 덕분인지 불편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는 거다.
아마 이 새끼들이 아니었다면 자리를 잡는 데 조금 더 긴 시간이 걸렸겠지.
마탑에서 나와 신분을 얻는 것부터가 문제였을 것이다. 1회 차에서 그냥 꼬맹이의 몸으로 살아남기에는 조금 힘들었을 테니 말이다.
편견 없는 놈들이었고, 정 많은 새끼들이었다.
노예 낙인이 찍힌 꼬맹이를 보고서도 그냥 넘어갈 줄 모르는 인간성 넘치는 놈들이었다. 본인들에게 피해가 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자너.’
정하얀이 살아 있다.
검이 몇 개 꽂혔는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는 있었지만 녀석들이 정하얀과 나를 살린 것이다.
삼류 엑스트라 느낌의 놈들이 이 정도의 활약을 해주고 떠나갔는데 슬퍼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참 대단한 새끼들이야.’
별것도 아닌 놈들이 말이야. 무려 대마법사와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목숨을 구한 거라고.
어차피 큰 전쟁에 휩쓸려 파리 목숨마냥 날아갈 생명이 이렇게라도 쓰였으니 내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호재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빅보이 형.”
“…….”
“빅보이 형?”
“…….”
“빅보이 이 새끼야. 죽었냐?”
물론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더 좋은 데 쓸 수도 있었을 거야. 아마.’
놈들이 이렇게 돌발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 거지 같은 비둘기 놈들이 지금 이 시기에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놈들을 더 좋은 데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어들어 가는 정하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 빠… 오… 빠….”
정하얀은 조용히 나를 찾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웅크린 채로 나를 막고 있는 정하얀은 몸에 몇 자루의 검이 꽂혀 있었지만 다행히도 살아남은 것처럼 보였다.
서둘러 그녀의 몸에 포션을 뿌리고 입가에 포션을 먹여준 이후에 주변을 바라본다.
“괜찮아. 하얀아.”
“오… 오빠… 오빠… 괜찮….”
“응. 괜찮아.”
빅보이 유진, 칼턴은 여전히 셋이서 나와 정하얀을 감싸 안고 있었다. 빠져나가는 것으로도 힘들 정도로 말이다.
질식하기 전에 엉금엉금 기어 나간 것은 당연지사. 무거운 손을 들어 올린 이후에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아까 망원경으로 봤던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김현성 때와 같다. 놈들의 등이 마치 고슴도치처럼 되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빅보이.”
“…….”
“칼턴?”
“…….”
“유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놈들의 등에 꽂힌 검을 뽑아보기는 했지만 여전히 미동이 없는 모습이 눈에 띈다. 라파엘 파티나 김아영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에이징커브가 온 늙은이가 목숨을 바쳐 방어 마법을 외운 것일까. 아쉽게도 마법사는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세라핌과 도미니온스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이 정도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쪽이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세라핌… 세라핌….’
슬프지 않다. 단지 짜증 나는 금발 비둘기가 구역질 날 뿐이다.
패가 버려졌다고 슬퍼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또 어디 있을까.
김현성 때와는 다르다. 그때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많이 혼란스러워했고, 흥분했다고 느껴졌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고 또 차분하다.
‘그냥 적당히 쓰다 버릴 놈들이 큰 활약을 해줬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자너. 우리 현성이처럼 뭐 투자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애지중지 키운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수지 맞는 장사지.’
그냥 아무렇지도 않자너.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지?’
그래도….
내가….
‘시바.’
내가 썼어야 했는데.
싸늘하게 식은 놈들의 몸을 볼 때마다 다시 한번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 끝난 일인데 말이다.
‘저건 내 거였는데.’
보낼 때는 보내더라도 내가 썼어야 됐었는데.
이 멍청한 놈들의 자의적인 판단이기도 했지만 이 상황을 설계한 것은 타인이었다.
꽃기영이 노전사를 미국으로 보내버려 파티의 각성을 촉구했던 것처럼, 어쩌면 현재 이 상황을 컨트롤한 것은 1기영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자신의 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정하얀을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쳐낸 이유도 당연히 납득이 간다.
평소에 내가 했던 짓거리와 같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회귀자였고, 녀석이 사용자였다는 것뿐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안다. 놈은 회귀에 대해서 깨달았고, 대적자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 대적자로 나를 선택한 거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아귀가 들어맞는다.
인류 진영과 외신 진영이 계속해서 치고받는 상황을 만들고,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없는 노을빛 세계를 만들고 싶어 했던 거라면 말이다.
1기영의 입장에서 정체불명의 애새끼는 함께 대립하며 대륙을 깎아 먹기에 가장 완벽한 패였다.
내가 봐도 답이 없어 보이는 인류 진영을 외신들과 대립할 수 있게 만드는 존재로 보였을 것이고, 뒤틀린 자신의 계획에 정점을 찍어줄 수 있는 인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근데 그거 알아?’
나는 딱히 네가 남아 있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1기영을 살려서 끝까지 데려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면 돼.’
1기영을 치워 버리고, 그 자리에 내가 있으면 되지. 꼭 녀석이 회귀를 진행시켜야 할 이유가 있나? 내가 1기영의 역할을 대신하는 게 맞지 않나? 2회 차의 조혜진이 1회 차 조혜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나라고 못 할 게 있나?
‘꼭 불가능한 것도 아니자너.’
어차피 미래는 바뀌었는데 말이야.
‘너도 그걸 바란 거지? 적어도 내가 인류 진영에 서서 대륙에 중심에 서서 너랑 대적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
아마 확실할 것이다.
‘슬픈 생각 해야 되자너.’
기왕 이렇게 된 거 각성 한 번 하는 게 맞는 것 같자너. 그게 이 새끼들이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주는 게 맞는 것 같자너.
“빅보이… 살아 있어?”
“…….”
“빅보이 형?”
“…….”
어떻게 생각해도 억즙이라도 짜내야 될 타이밍이었다.
역시 추억을 떠올리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싶다.
햄비어 고기를 처먹인 일부터 시작해서….
‘감정 잡자. 기영아.’
아니지. 이 새끼랑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기도 해야지.
‘너도 용감했어. 응? 내가 네 나이였으면 바로 도망쳤을 거다. 오줌도 지리고 꼴사나운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는 했지만… 꽤 멋있었다고… 조금 더 자부심을 가져라.’
“…….”
‘자… 저것 봐라.’
“…….”
‘어때? 멋지지 않냐? 멋진 하늘이지?’
선 하늘 제시 뭐였는데 진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그래도 눈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아직까지는 감정이 잘 잡히지 않는다.
‘어이 꼬맹이 좀 먹이게 여기 햄비어 꼬치 좀 가지고 와줘!’
왜 기억나는 게 햄비어 처먹은 것밖에 없냐고. 진짜.
‘우리 꼬맹이도 환장을 하고 먹드만… 그래도 오늘은 햄비어로 달라고 하자고… 무려 파란 길드에서 나온 햄비어니까. 분명히 뭔가 다를걸.’
아니, 시바 왜 햄비어만 자꾸 생각나는 거냐고.
‘이 꼬맹이 새끼 이거 자면서 침 흘리는 것 봐라. 끅끅끅. 햄비어라는 말에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꼴 보라고.’
아니, 햄비어 뭔데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참이다.
“빅보이… 칼턴… 유진… 일어나 이 새끼야.”
“…….”
감동적인 대사랑 멋있는 마지막 말 같은 거 없냐고. 행복해라. 사랑한다. 이런 거는 죽기 전에 들었으니까. 우리 뭐 추억 같은 거. 멋진 이야기 같은 거 없냐구. 시바. 감정이 제대로 안 살자너.
사실 말보다도 다른 것들이 더욱더 기억에 남는다.
이를테면 녀석들의 체취 같은 것 말이다.
정확히는 냄새라고 표현해야 하겠지만, 꼬맹이를 꽉 안아주던 가슴이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 같은 게 더 기억에 남는다.
웃음소리 같은 것들이나, 밥 먹을 때 등을 두드려 주는 것들, 별 의미도 없는 행동들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감정이 잡힌다.
‘좋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지만 여전히 눈물은 잘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씩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동이 퍼지고 나간다. 곧 그 잔잔함이 순식간에 파도가 되어 아래에 있는 깊숙한 무언가를 건드린다.
‘원래 엑스트라들의 죽음은 주연의 각성의 촉진제자너.’
너도 그걸 바랬지.
‘네가 어떤 걸 적으로 만들었는지 봐.’
시스템은 여전히 초월적인 존재가 강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내게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불가능하다고, 허락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의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 느끼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억제력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엑스트라를 잃은 주연은 본래 이런 상황에서 각성하는 법이었다.
[색욕과 영면의 군주가….]
피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번에 한 번 느꼈었던 것처럼 공중으로 몸이 천천히 떠오른다.
이미 옷은 다 찢어진 것 같았지만 대신 뱀이 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에 있는 뱀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외관이 변했다는 것을 확인할 여유가 없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은 노예 낙인이 눈에 보인다.
‘일단은 그냥 냅두지 뭐.’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말이야.
“…….”
“…….”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보인다. 저번과 같다. 전투를 벌이고 있는 천사들도, 그런 천사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모험가들도, 모두가 이쪽을 바라본다.
아마 1기영 역시 이곳을 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네가 뭘 적으로 만들었는지 알겠어?’
[색욕과 영면의 군주가 강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