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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44화 (1,34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44화

귀환(4)

“저는 오빠가 다녀온 1회 차가 진짜가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일지도 모른다고 봐요.”

“…….”

“시스템이 준비한 더미월드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해 보자고요.”

“차라리 우리가 통속의 뇌라고 말하지 그래. 누나?”

“…….”

“…….”

조금 웃음 짓는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애초에 모든 게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 어때요? 적어도 1회 차에 간 사람들이 통속의 뇌 같은 상황을 갇힌 거라고 가정하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누나.”

“누가 알겠어요? 오빠나 라파엘 파티, 혜진이가 1회 차로 간 게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 공간으로 트립 된 것일지, 그곳에서 환상을 보고 있다고 가정하면 통속의 뇌 가설도 훌륭하게 들어맞지 않아요?”

“무슨….”

“저는 농담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꽤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거라니까요? 두더지 성녀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시간 역설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아요. 현시점에서 1회 차는 아예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세계라고요. 이번 이벤트를 위해 단기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일지 누가 알겠어요?”

“첫 번째로 나는 과거로 트립 한 게 아니야. 누나. 다른 회차로 트립 된 거라고, 타임 패러독스 음모론이니 더미월드 음모론이니 하는 것들은 구태여 등장할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어, 시간 역설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영향을 받을 사람이 김현성 하나이기 때문이야. 회귀는 이미 일어난 사실이고, 이 대륙을 관통하는 커다란 구멍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고.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거지.”

“흐음….”

“대륙의 시스템은 2회 차를 바꾸고 싶은 게 아니야. 우리가 이미 관리자로서 승인을 받았으니까. 지금 이 과정은 구멍이 난 개연성을 메워가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 개연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구태여 진짜일 필요가 있냐는 거죠. 시스템이 설계한 대륙이 아니라고 진짜로 단정 지을 수 있어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하는 게 맞지 않아요?”

“…….”

“오빠가 베니고어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알고 있지만 벨리알이나 베니고어의 말이 정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초월자들이지만 그들도 완전하지는 않으니까요. 애초에 이번 일이 유례 없는 일이라잖아요. 다른 사례가 있으면 몰라도… 다른 차원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인 것 같고… 참고할 수 있는 표본이 없다는 거죠.”

‘이 누나 진짜.’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자너.

아마 이쪽이 1회 차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한 모양인 것 같았다.

1회 차가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화두를 던져 과몰입하는 것을 방지하려고 하는 생각인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가설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

“…….”

“뭐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 못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야.”

“우리가 장난처럼 만든 더미월드와는 달라요. 시스템이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더욱더요. 저는 오빠를 믿고 좋아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오빠가 속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겠어요?”

아니면 그저 화두를 던지고 싶을 뿐일 수도 있다. 애초에 그녀도 정답이 뭔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녀의 음모론은 그럴듯하고, 또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기는 하지만 1회 차가 존재하는 세계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으니 말이다.

‘오시맨.’

1회 차에서 주워온 돼지 새끼. 현재 파란 길드의 가장 안쪽 감옥에 처박혀 있는 돼지가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누나 가설이 맞다고 치자. 오시맨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글쎄요? 적어도 통속의 뇌는 아니라는 거겠죠. 그래도 걔 하나로는 근거가 부족해요. 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나요.”

“이미 전부 조사했어. 누나. 적어도 호문클루스는 아니야.”

“…….”

“…….”

“오빠도 의구심을 품고 있기는 했다는 거네요?”

“생각할 만한 거리이기는 하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논란의 여지는 없어. 누나. 대륙이나 차원에 일어나고 있는 이상현상들은 본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야. 누나 말대로 오시맨조차 시스템이 만들어낸 인간일 수도 있겠지만 시스템 입장에서도 그게 수지맞는 장사는 아닐 거야. 게다가 차원을 관장하는 힘이 개수작을 부렸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현실이라고 부르는 게 맞아.”

“어느 정도는 동의할 수 있겠네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추가로 아까의 말을 이어서 하자면… 시간 역설이 일어나지 않는 결정적인 이유는… 나와 시스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봐.”

“…….”

“…….”

“급하게 나를 역소환시킨 것만 봐도 그래.”

“애색기영이 너무 구멍을 더 넓혀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네요.”

“나는 차원의 균형 어쩌구 쥐뿔도 관심이 없지만 우리가 영원한 을은 아니라는 거지. 시스템은 사고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얘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겠지만 얘도 원하는 게 있는 건 확실해.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지만… 난 이번에 1회 차로 가서 역소환 돼서 돌아온 과정이 그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는 과정이었다고 봐.”

“흥미롭네요. 사고할지도 모르고 단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뿐인 것과 협상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요.”

“물론 확실하지는 않아. 뭐, 누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그 돼지 새끼도 그냥 내가 1회 차를 진짜라고 믿기 위한 장치일지 어떻게 알겠어? 시스템이라는 게 단순한 법칙이 아니라 사고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면 누나 가설에도 힘이 실리겠네. 근데 나는 그렇게 보지는 않거든. 시스템은 그냥 존재할 뿐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법칙은 그냥 법칙이니까. 단지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과몰입하지 말라 이거 아니야?”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오빠 말대로라면 뭐가 진짜 중요한지 알고 있는 걸 오빠만 모르고 있는 꼴이니까요. 오빠가 아까 자기 입으로 직접 이야기했잖아요. 시스템이 원하는 건 1회 차로 인해 2회 차가 영향을 받고 뒤바뀌는 게 아니라고, 단지 관리자로서의 개연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고요.”

“…….”

“이번 1회 차는 단지 수단이라고요. 2회 차를 위한 수단. 시스템도 알고, 저도 아는 걸 오빠 혼자 모르고 있었네요. 심지어 가장 잘 이해하고 있으면서 말이에요.”

천천히 빌드업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빌드업 한 거야?”

“아니요. 노린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들어왔네요.”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살살 웃음 짓고 있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노린 게 아니긴….’

적어도 대화의 방향을 이끌었다는 것은 맞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굳이 빙빙 돌려서 말한 것도 그렇고… 말이야.’

예상했던 것처럼 방금의 대화는 아마 그녀 나름대로 내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알고도 당할 수밖에 없자너.’

내가 겪었던 일들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는 생각하기는 싫었으니까 말이다.

어찌 됐건 간에 이기영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더미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녀석들은 분명히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는 거다.

“원래 우리 이런 이야기 하면서 시간 보내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실제로 괜찮기도 하고.’

간만에 괜찮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주제가 무겁고 쓸데없기는 했지만 지혜 누나와 잡담을 하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그냥 카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나, 논란거리가 될 만한 이야기나, 일 이야기도, 아무 의미 없이 토론할 만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즐겁다.

누나가 상대방에게 잘 맞춰주는 화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잘 통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진짜 통속의 뇌는….”

“그만해 누나. 대충 알아들었으니까.”

“아니, 뭐가요. 저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그나저나 배고프지 않아요? 슬슬 자리 옮길래요?”

물론 이 누나의 이벤트가 이걸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먼저 몸을 일으키는 이지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아마 준비한 게 있기는 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게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누나.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어디긴 어디에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지.”

“…….”

“…….”

슬쩍 손을 끌어당기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평소답지 않은 걸음걸이로 꽤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고 있었기 때문에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문제가 있었다면….

‘별로 분위기… 좋아 보이지는 않자너.’

그다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

평소의 지혜 누나가 좋아하는 장소와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조용하고 분위기 있고 고급스러운 장소가 아니라 마치 시장바닥 같은 골목길이었다.

대부분이 노점이다. 여기저기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힙하다면 힙하다고 할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적어도 누나나 내가 드나들 곳은 아니었다.

‘여기 린델이 맞기는 한가?’

이런 골목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도 없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덜 개발 된 것처럼 보인다.

어느 도시에나 명과 암은 있었지만 아직 자본이 들어선 장소는 아닌 모양, 아마 개발 계획의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장소일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술에 취한 시정잡배들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여기 한 잔 더!”

“이 개새끼야!”

“야야야야야! 이 새끼들아! 이리로 와봐! 여기 좀 와보라고!”

“여기 주문 좀 빨리 받아! 뭐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우웨에에에엑….”

“여기 럼주 두 잔만 더 가져다줘!”

“…….”

“…….”

‘이 누나 정신이 나갔나?’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말을 걸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지혜 님.”

“…….”

“네.”

“그리고… 명, 명예추기경님….”

자주 본 얼굴은 아니었지만 꽤 낯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자기소개를 해오는 남자가 보였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감찰단에 소속되어 있는 알렉스라고 합니다. 이,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기,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알렉스.’

지나치게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온몸이 덜덜덜 떨리고 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전에 만났을 때도 분명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 심지어 1회 차에서도 녀석의 얼굴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

“…….”

‘이 누나가 진짜… 쓸데없는 짓거리를….’

“아… 알렉스 님이시군요. 오랜만입니다.”

당연하지만…

어째서 누나가 나를 이 거지 같은 장소로 데리고 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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