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57화
면회(7)
다시 한번 천천히 돌팔이 박사 놈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까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이다.
녀석뿐만이 아니라, 주변, 저택, 그리고 소품 같은 것들을 모조리 눈에 담는다.
어떻게 보면 쓸데없는 행동처럼 비춰지기는 했지만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답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발악이었다.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나? 아니면… 시스템이 개입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그간 너무 마음의 눈에 많은 의지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눈이 만능은 아니다. 당장 육망성 역시 마음의 눈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없지 않았던가.
대륙, 아니, 차원은 넓었고, 마음의 눈을 상쇄시킬 수 있는 특성이나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맞다.
“혹시나… 명예추기경님 역시 현성 씨와 비슷한 증상을 겪고 있으신 것은 아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자고 판단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쩌면 이 모든 행동이 현재의 상황을 부정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머릿속으로는 박사가 정론을 펼치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약에 내가 틀린 거라면.’
가정하는 게 굳이 의미가 있을까. 김현성의 상태가 좋아지고 있다는 것은 나도 김현성 자신도 느끼고 있을 테니 말이다.
만약 이 치료가 계속된다고 가정한다면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가가 너무 커.’
그 대가가 회귀자 사용설명서, 즉 김현성과 내 유대감이라고 한다면 다시 언급할 가치도 없다.
애초에 나는 내 걸 놓아줄 정도로 이성적인 인간이 아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유대감과 김현성 개인의 고통을 저울질한다면 전자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거다.
‘재고할 가치도 없자너.’
“…….”
“…….”
이 새끼는 위험하다. 정말로 녀석이 김현성을 쥐고 흔들었는지에 대한 여부와는 관계없이 미켈레 박사는 내게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운이 좋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맡게 된 환자가 김현성이었을 뿐이었지만 김현성이 녀석을 믿고 따른다면 틀림없이 이쪽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고 할 만했다.
녀석은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부정하는 게 치료의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녀석이 없어지는 게 가장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혔다. 더 이상 함께 있을 가치가 없는 것 같아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자 조금 당황한 듯한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대화를 나누는 건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네요.”
“…….”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는 것 같으니까요. 지금까지 고생해 주셨습니다. 미켈레 박사. 덕분에 현성 씨가 편히 쉬다가 가네요. 추후에 사람을 보내 적잖이 사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와인도 한 병 같이 보내드리고요.”
“저… 명예추기경님. 잠깐 조금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박사님. 그 알량한 학구열 때문인지, 직업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현성이를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해요. 미켈레 박사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따지고 보면 단순 환자와 의사의 관계고… 구태여 목을 맬 필요도 없고요.”
“…….”
“어차피 골드 벌어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혹시 돈 걱정 때문에 이걸 붙잡고 있는 거라면 안심하셔도 돼요. 미켈라 박사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건 사실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저도, 파란도, 은혜를 잊지 않거든요. 아니면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가?”
“…….”
“무슨 다른 불순한 목적이 있으셔서 접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단순히 돈이나 골드가 아니라… 더 좋은 걸 노리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모든 건 현성 씨가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웃기네. 여기 들어와서 치료나 하고 있는 놈이 자의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어요? 제가 그 새끼 보호자예요. 박사님. 내 보호자는 그 새끼고. 무슨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싶으셔서 여기서 이렇게 비비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적당한 타이밍에 손 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는 소리예요. 먹고 살 만하잖아요?”
“소문과는 많이 다르시군요. 그게 아니라면….”
“같잖은 장난질 치지 말고 그냥 사라지라고.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살기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정말로 녀석이 일반인이라면 이미 이것만으로도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초월자로 추앙받는 이의 분노를 마주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의연한 태도와 흔들림 없는 눈, 어째서 녀석이 이렇게 짜증 나는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 진짜 하나도 안 망가졌구나.’
“…….”
“…….”
진짜 이런 새끼가 있었구나.
정말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고, 그냥 순수하게 김현성을 도와주고 싶은 거구나.
물론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잠깐 본 것만으로 녀석을 전부 파악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녀석은 올곧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부류였다.
김현성은 나보다 저걸 먼저 봤기 때문에 저 돌팔이에게 기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종류는 달랐지만 녀석은 내가 연기했던 빛기영과 유사했으니 말이다. 남을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억압이나 힘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 말이다.
아까와는 다르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돌팔이 박사 놈의 손은 떨리고 있다.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낯짝도 시야에 비친다.
그제야 녀석이 나를 희생과 부활의 성자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 인간 이기영으로 맞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여야 돼. 이 새끼는 무조건 죽여야 돼.’
“언제든지….”
“…….”
“언제든지 이야기하러 오셔도 됩니다. 명예추기경님.”
곧바로 문을 박차고 나가자 멀뚱멀뚱 서 있는 멍청한 녀석이 눈에 비치기 시작.
“현성 씨 따라와요.”
“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갈 거니까.”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씀.”
“기분 나쁜 곳이에요. 기분 나쁜 사람이고… 저도 현성 씨 생각을 존중해 드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일단은 여기서 나가는 걸로 해요. 예감이 좋지 않아요. 어쩌면 악….”
“저는 나가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좀 전에….”
“이번에는 제 말 들어요. 의사라면 다른 사람을 구해줄 수도 있고, 현성 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알겠으니까.”
녀석의 손을 붙잡고 끌고 나가려고 해봤지만 당최 끌리지가 않는다.
“저는… 아직….”
‘아 이 새끼 답답하네 진짜.’
“논의할 건 나중에 논의하더라도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 나누는 게 좋겠어요.”
“가지 않을 겁니다.”
“네?”
“아직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가….”
“아… 진짜. 좀 오라면 오라고요!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하지만….”
‘아 진짜 답답해가지고.’
“도대체 뭐가 문제예요? 집으로 가자는 게? 치료도 받게 해주고, 다른 사람도 구해준다는데 뭐가 그렇게 싫어서 자꾸 버팅기고 있어요?”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걸 누가 신경 쓴다고. 저도 이미 신경 안 쓴다고 말씀드렸어요. 다 괜찮으니까 일단은 가자고요. 정말로 상관없으니까.”
“제가 상관있습니다.”
“아… 진짜.”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한데… 그 기억을 어떻게 지울 수가 있겠어요. 저는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하고 있습니다. 검에 느껴지는 감촉도, 손을 타고 흘러내리던 피도, 그리고 누워 있었던 기영 씨의 모습도, 머릿속에 있었던 차마 말로 하기 힘든 생각들… 그리고 타오르는 듯한 증오도… 기억나지 않는 게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라고 해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아니, 분명히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전부 끝났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계속해서 제자리로 되돌아올 뿐입니다. 제가 지금 불안정하다는 건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
점점 이 새끼의 온도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야 막 한 발자국을 내디뎠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딱 한 발자국이요. 여기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영원히 제자리에 멈춰 있을 게 분명해요. 기영 씨는 매번 괜찮다고, 그런 건 상관없다고 말씀하시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괜찮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는 망가진 사람이에요. 기영 씨와는 다르단 말입니다.”
‘아니, 너 안 망가졌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요.”
“그러니까 그건….”
‘시바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자너.’
아무래도 로헨 때의 일로 인해 배때지 사건의 트라우마가 다시금 떠오른 모양이다.
“자꾸만… 자꾸만 당신을… 죽이는 꿈을 꾼다고요.”
‘그건 좀 무서운데. 그런 건 고백 하지 마.’
아무래도 진실한 위로가 필요해질 수밖에 없었던 타이밍. 이제야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힌다. 적당히 어깨 좀 두드려주고 포옹 좀 해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면….
“현성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건….”
녀석의 톤이 조금 올라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매번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면… 그렇게 심한 꼴을 당하고도 어떻게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겁니까!”
‘아 이 새끼 급발진한다.’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냐고! 제길!”
오히려 계속해서 녀석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던 게 녀석의 버튼이 되어 있었던 모양, 순간적으로 실수했다는 생각에 말을 정정하려고 했지만 녀석의 목소리가 한층 더 커다랗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만 생각하는 게 정말로 정상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기영 씨는 저한테 한 번 죽었었어요. 그것도 끔찍하고 처참하게 죽었었다고요. 로헨에서도… 분명히 죽을 뻔했단 말입니다. 이게 지금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십니까? 이게 정말로 제 잘못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
“기영 씨가 매번 괜찮다고, 잘못이 없다고 말하니까. 제가 더 망가지는 것 같단 말입니다. 정말로 아무런 문제 없다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나는 정말로… 정말로 전부 다 괜찮은 줄 알잖아. 당신은 정말로…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보듬어 주지 말라고! 제기랄! 차라리 정상이 아니라고! 위험하다고 욕을 하란 말입니다. 어차피 또 상관없다고 할 거잖아! 어차피 또 전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전부 떠안을 거잖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병신처럼….”
거리가 너무 가깝다.
‘이건 안 좋은데.’
또 상황이 이상하게 되어버린다. 김현성 녀석은 또 실수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 녀석의 얼굴이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체격 차이가 심하게 나다 보니 본인이 나를 위협하고 있다는 모양새가 되었다는 걸 깨닫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급발진한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해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이 정도는 뭐 괜찮지 않나.’
라고 생각했지만 당황스럽게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조용히 내 배때지의 손을 가져다 대는 김현성 때문이었다.
괜찮다고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지만.
‘몸은 시바 솔직하자너.’
혼에 새겨진 상처에는 몸이 먼저 반응하고 만다. 물론 순식간에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녀석이 캐치하지 못할 리 만무했다.
울음기 섞인,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녀석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
“늦었습니다. 이만 돌아가세요.”
“네… 뭐요?”
“기영 씨가 어떤 생각을 하든, 무슨 설득을 하든 간에 제 생각이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
“돌아가라고.”
‘너 이 새끼 목소리가 왜 이렇게 차가워?’
“…….”
‘왜 여기 안 쳐다봐?’
정말로 결심을 굳힌 것 같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당연지사.
‘왜 아무 말도 안 해?’
결국에는 나도 이를 악물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거 알아요?”
“…….”
“눈동자. 흐릿해지고 있다는 거.”
직후,
조용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그런 게… 기영 씨의 안전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겨우?’
“…….”
‘겨우?’
“돌아가세요. 이제 그만.”
‘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