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64화
우정의 도피(2)
“미안해요. 오빠.”
“…….”
“제 잘못이었네요. 좀 더 확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
“…….”
“…….”
“아니, 이거 누나 잘못 아니야.”
그녀를 두둔하기 위해서 위로의 말을 꺼낸 것이 아니다. 아마 지혜 누나가 아니라 내가 그들의 뒷조사를 했다 하더라도 결과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내 눈을 속일 수 있는 놈들이다. 애초에 내가 이 저택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사라진 여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혜 누나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쪽은 준비되어 있었고, 이쪽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을 뿐이었다.
무표정으로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는 지혜 누나의 모습이 비친 것은 당연지사.
‘지혜 누나 화 많이 나셨네.’
자존심이 상한 것이 분명했다. 새삼스레 본인이 놀아나고 있었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거겠지.
단순한 뒷조사이기는 했지만 지혜 누나가 일을 허투루 했을 리 만무, 내게 그들의 보고서가 올라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을 사용했을지 예상도 가지 않는다.
그녀는 결코 일을 대충 처리하는 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지혜 누나는 그들이 초월자라는 것 역시 상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심혈을 기울인 조사가 끝난 이후에 올라간 보고서가 자신이 농락당했다는 증거가 되어버렸으니, 그녀의 성격상 이번 일을 앉아서 받아들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꽤 수다스러웠던 이전과는 반대로 그저 입술을 꽉 깨물기 여념이 없다.
본인이 결론을 내린 결과물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었던 여유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모든 게 휴짓조각이라는 것을 깨달은 지금 그녀의 모습은 사람이라도 잡을 것마냥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이가 없네… 하….”
“…….”
“…….”
“어이가 없어.”
이윽고 천천히 빈방으로 들어간 그녀가 물건들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녀를 말리기 위해 하연수가 이지혜를 따라 들어갔지만 진정을 하지 못하겠는지 한참 동안이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라도 진정해야겠자너.’
물론 이쪽 역시 진정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긴 머리를 하고 있었던 조수부터, 함께 실종된 박사까지. 정황상 이미 현 상황이 평범함의 범주를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가 문제인 거지?’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여자가 미켈레 박사의 종인 건지, 아니면 그녀가 미켈레 박사를 부리고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두 놈 모두 이쪽을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가 빌런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시점에 그걸 어떻게 전부 파악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김현성이 그들과 함께 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현실 하나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 방문 밖으로 나온 지혜 누나가 입을 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위쪽에서 한 번 더 알아보라고 할게요. 진 군사도 넣어서요.”
“응. 그게 맞을 것 같네.”
“그리고… 방금 막스한테 메시지 받았는데 균열이나 던전화 때문에 일어난 현상은 아닌 것 같다고 하네요. 균열 박물관에는 이상이 없대요.”
“우리 차원으로 넘어와서 정착한 놈들은 확인이 되고?”
“그게 확인이 안 돼요. 물론 공식적인 기록은 없어요. 적어도 이상현상을 일으킬 만한 존재는요. 만약 그런 게 대륙으로 들어왔다면 베니고어나 벨리알이 모를 리가 없겠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문은 계속 닫혀 있는 상태니까요. 유일한 가능성은 오빠가 로헨에서 돌아왔을 당시에요. 그때 여기저기에 구멍이 많이 나 있었으니까요. 밀입국하기에는 절호의 타이밍이라는 거죠.”
“놈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가정하면 말이지?”
“고민할 게 있어요? 둘 중에 한 놈은 무조건 인간이 아니에요.”
‘맞지.’
“아니, 둘 다 인간이 아닐 수도 있고요. 개인적으로는 조수 쪽이 의심스럽네요. 아무리 그래도 생활한 흔적까지 지워져 있다는 건 이상하니까요. 미켈레 박사는 그냥 끄나풀이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세뇌당한 인간일 수도 있고요. 그것도 아니라면….”
나와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같다.
“만들어진 인간일 수도 있겠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정보가 조작되어 있었던 거예요. 단순히 가짜 신분을 만든 게 아니라, 없는 사실을 진실로 만든 거라고요. 위쪽에서 활동하는 놈이 아니면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차원 전쟁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위쪽 놈들이거나, 아직도 우리 대륙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악마 새끼들 짓 아니겠어요?”
“비슷한 권능을 가진 악마가 있나 봐?”
“그것도 알아봐야죠. 로노베.”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김현성이 타 차원으로 갔을 확률도 무시할 수는 없겠죠.”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살짝 고개를 젓자 지혜 누나가 다시 말을 이어왔다.
“물론 확률이야 낮죠.”
“낮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해. 로헨에서 여기로 왔을 당시에야 유야무야 들어왔다고는 해도… 우리 쪽 관리자들도 바보는 아니야. 애초에 차원 간 이동에 잡아먹는 신성이 얼마나 되는데, 그 많은 신성이 움직이는데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잖아. 들어오는 건 쉬워도 나가는 건 그렇지 않아. 누나.”
“그게 정론이지만… 저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네요.”
‘차라리 1회 차로 갔다는 게 신빙성이 있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상황이었다.
“…….”
“…….”
“창렬 씨.”
“네.”
“저택 내부에서 마법진 발견되면 말씀해 주세요. 아니, 저택뿐만이 아니라 이 근방 근처, 전부 통제해서요.”
“네.”
“…….”
“…….”
“오빠는 그럼… 그쪽으로 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확률이 낮지는 않아. 지금 같은 상황이면 더욱더.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사건은 없어 누나. 지금 대륙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억지로 끼워 맞춰보는 게 맞아.”
“그게 맞춰질까요?”
누나의 의문도 일리는 있다. 김현성이 1회 차로 떠났다고 확답을 내리기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었으니 말이다.
김현성이 1회 차로 갔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쪽이 쌓아온 데이터와 공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당장 육망성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적어도 저택이나 오두막, 이 근처 부지에서는 육망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결정적이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는 이미 육망성 전체를 확인하고 통제하는 중이다. 만약에 김현성이 육망성을 이용하고자 했다면 분명히 꼬리가 밟혔을 것이다.
그사이에 새로운 게이트가 생겨났다는 보고 역시 받은 적이 없다.
만약 녀석이 새로운 게이트를 통해 이동했다고 가정해도 마찬가지다.
게이트는 한 번 다녀온 이후에야 사라진다. 김현성이 만약 게이트를 탔다고 가정한다면 녀석이 이용한 게이트의 흔적만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시간 배율 문제는 어떠한가. 1회 차에서의 하루는 이곳에서의 찰나다. 물론 게이트마다 배율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회 차가 더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경험으로 인해 습득한 사실이었다.
물론 아직 모든 문제에 확답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데이터가 쌓인 것은 아니다. 고작 10번도 안 되는 사례를 가지고 내 가설이 맞다고 확정 지을 수는 없었고, 연구도 지지부진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선 사례를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는 게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전의 데이터들이 전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네요.”
“왜? 그 두 놈이 지금 이 사태와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고, 육망성 없이 1회 차를 이동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김현성이 1회 차로 갔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누나 파란 유소년 교육센터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나?”
“진 군사 운 거요?”
“아니, 그거 말고… 왜 그쪽에서도 한 명 있었잖아. 육망성 목걸이를 걸고 있었던 새끼, 우리 감시카메라에 잡혔던 놈.”
“아. 기억나요.”
“걔도 마찬가지야.”
“…….”
“…….”
“그 녀석도 흔적 하나 없이 사라졌어. 심지어 유소년 교육센터 안을 들락날락거리던 놈이었는데, 아직도 그 새끼 그림자도 못 밟아봤다고… 하얀이가 걔 잡으려고 아네모네의 눈을 대륙 전체에 풀었는데도 아직 끄나풀도 못 잡았다니까? 레인저들이 무능한 게 아니야. 어쩌면 그 새끼들, 그러니까, 여기에 있었던 여자, 미켈레 박사, 그리고 파란 유소년 교육 시설에 들어온 적이 있었던 목걸이 놈. 세 놈 전부 다 차원을 이동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대충 들어맞아. 그놈들이 육망성을 찍고 다니는 놈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문어 촉수 괴물들을 소환하는 새끼들일지도 모르지.”
“미켈레 박사는 그냥 얼떨결에 휘말린 민간인 아닐까요? 딱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던데….”
“아니야. 그 새끼도 육망성 패거리가 맞아.”
“납득할 수 있게 설명 좀 해줘요.”
“아니. 그냥 맞아. 걔 육망성 패거리야.”
“…….”
“아무튼 그 돌팔이도 육망성이야.”
“네. 미켈레 박사도 육망성 패거리라고 해요. 그럼 오빠 말은 그 세 명이 시스템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네요?”
“…….”
“베니고어랑 벨리알이 그랬잖아요. 이 현상은 시스템에 의한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게 맞다고. 그걸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고, 애초에 그 차원이 만들어진 이유가 우리 대륙의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 아니었어요? 그 가설이 맞다면 앞서 말한 세 명은 도대체 뭐예요? 시스템은 단지 시스템일 뿐이잖아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요.”
“그건 나도 몰라. 누나. 어떻게 알겠어? 나도 베니벨리 말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자연적인 현상이 아닐 가능성도 존재해. 시스템이 녀석들을 통해 우리에게 서사를 부여하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놈들과 시스템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일시적인 권한을 얻은 것일 수도 있고….”
“시스템이 그놈들한테 하청을 줬다는 거네요.”
“딱 그 표현이 맞아. 인신공양이나 하는 이교도들이나 문어 촉수 괴물들도 그 영향인 거고….”
“오빠 가설이 맞다면 김현성이… 자취를 감춘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손을 턱에 가져다 대는 지혜 누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곰곰이 고민하는 모습.
“오빠가 행복회로 때문에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물론 김현성이 이 대륙에 이미 없다고 가정해야 오빠 가설이 들어맞는 거겠지만… 적어도 우정의 도피 같은 터무니없는 이유보다는 나아요.”
‘맞아. 우정의 도피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김현성이 놈들과 함께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그쪽에서 김현성에게 다른 거래를 걸어왔을 수도 있고요, 그 거래 내용이야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스스로 1회 차에 갈 이유는 충분해요. 본인에게 있는 문제도 문제거니와 매번 이곳 때문에 개고생하는 오빠를 보고 있기가 힘들어서… 결국 이번에는 혼자 떠안고 싶었을 수도 있겠고요. 육망성 놈들도 대충은 김현성 성향에 대해 알고 있었을 테고….”
‘참… 이 새끼도 쓸데없는 짓 하자너.’
“결국 이 모든 게 오빠를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예요?”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하겠냐구.’
“너무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오빠 지금 제정신 맞죠? 좀… 이성 잃은 상태는 아니죠?”
“…….”
“오빠 가설이 터무니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몇몇 가지는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오빠 말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단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가설에 너무 빠진 것은 아닌가 해서… 사실 저도 오빠 말에 동의하기는 해요. 뭐, 경각심 차원에서 말씀드린 거라고요.”
어쩐지 김현성 이 새끼가 버릇이 없나 했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김현성이 1회 차로 향했다는 상황이 반갑지는 않다. 단순히 육망성으로 향한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수단으로, 내가 모르는 방법으로, 내가 모르는 시대로 떨어졌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놈이 지금까지 했던 병신 짓거리를 생각해 보면,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는 가설만큼 개연성을 부여해 주는 이유는 없다.
분명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있어야만 했다.
“…….”
“…….”
“그럼 다음은 어떻게 할 거예요?”
“뭘 어떻게 해. 데려와야지.”
“…….”
“최대한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