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68화
뜻밖의 데뷔(3)
‘만나기만 하면 돼.’
물론 김현성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도회에 모이는 인원도 인원이거니와 진 군사가 물어온 허접한 몰락 귀족의 신분으로는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현성 백작과 접점을 만드는 데 무리가 있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 신분으로는 최하층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결국 사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분이나, 가문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었으니까.
각 왕실의 공주들이나 왕자들, 공녀들도 떼거리로 나올 것이고, 명망 높은 가문의 귀족 자제들의 눈에도 김현성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잘생겼자너.’
그 제국에서 대놓고 밀어주고 있는 인재라는 것, 가지고 있는 무력도 무력이거니와 파란 길드라는 집단을 뒷배에 두고 있다는 것도 플러스 요인이다.
그 무엇보다 잘생겼다. 나이 처먹고 어린 여자에게 눈독 들이는 배불뚝이 귀족들과 풋사과같이 풋풋한 1현성과의 차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귀족이라는 놈들이 자신의 가문의 이익을 위해 팔려가듯 결혼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족속들이라고는 하지만 영애들도 눈이 있고 안구가 있고 망막이 있다.
아무리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머리 빠진 배불뚝이와 만나는 순간을 꿈꾸며 데뷔탕트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영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기준안에 있는 공주님과 왕자님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으니, 김현성은 그들의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솔직히 조건도 나쁜 편은 아니야.’
일단 작위가 있다.
‘것도 세습 가능한 작위지.’
승계권이 없는 귀족들, 이를테면 가문의 둘째나 셋째, 넷째, 심지어 다섯째들도 우글우글한 상황에서 온전한 작위를 갖추고 있다는 매물이 나왔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것도 제국 작위라고.’
그나마 근본 없는 모험가 출신이라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이미 한참 전부터 모험가들을 대륙의 주민들로 받아들인 이들이었으니 호의적인 시선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뭣보다 숨길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아. 이 새끼가 지구에서도 귀하게 커왔구나 하는 상류층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아우라.
실제로 김현성은 교양 교육을 받지 않은 천연이었지만 본래 얼굴이 잘생기고 능력만 있으면 사소한 결점조차 개성으로 다가오는 법. 김현성에게 있어서 무지는 치욕이 아닌 매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들었어? 이번에 제국에서 김현성 백작님이 오신다고 하던데?”
“뭐… 뭐? 정말인가요?”
“응. 확실해. 김현성 백작님이 제국 사절단과 함께 왕성으로 들어오는 걸 확인했대.”
“어떻다고 하는데요? 너무 소문만 무성하신 분이라… 혹시 막 우락부락하게 생긴 산적 같은 사람이면 어떻게 하죠?”
“엄청 잘생겼다고 하던데?”
‘발 없는 얼굴이 천 리 가자너.’
“네?”
“엄청 잘생겼다고 하더라고. 키도 크시고, 체격도 있으시고, 머리숱도 많으시고… 또 그 야인 특유의 분위기가 있잖아.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날카로운 분위기. 북부인도 아닌데 북부인처럼 차가운 느낌이 있었다고 했어.”
“그, 그런데 그 사람 모험가 출신이잖아요. 어쩌면 조금… 야만적이지 않을까요.”
“그게 뭐 어때서? 그래? 요즘 같은 시대에 모험가 출신인 게 뭐 흠이 된다고. 오히려 능력 있어서 더 좋지 않나? 그리고, 야만적이면 또 뭐 어때. 밤에는 더 좋을지도 모르지.”
“꺄아아악!”
“꺄항항!”
‘아주 지들끼리 신났자너.’
그야 데뷔하는 이들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저런 리액션도 이해가 가기야 했다. 보통 사교계의 데뷔는 가문의 재량에 따르거나 영애나 영식이 준비되었다고 판단할 때 내놓는 게 상식이었지만 일반적으로 18세 정도에 데뷔하는 게 정석이었으니까.
지구에서야 저 나이에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이기는 했지만 이 미개한 대륙인들이 그런 걸 신경 쓸 리 만무하지 않은가.
“또 요주의 인물들이 있나요?”
“많지. 마도왕국의 4왕자도 이번에 데뷔한다고 했고… 아직까지 혼처를 못 찾은 유력가문들도 많잖아. 엔피스터 자작님도 아직 신붓감을 찾는 중이고… 아이라이트 공작가의 2남도 올 시즌에는 한 번 들른다 하셨다고 들었거든.”
“정말요?”
“네. 저도 그렇다고 들었어요. 물론 또 다른 의미로 주의해야 할 사람들도 있지만요. 핑크레인 공작님도….”
“뭐어? 그 돼지가?”
“쉬잇… 누가 듣겠어요.”
“그 사람 이미 결혼했잖아.”
“소식 못 들으셨나요? 몇 달 전에 사별했다고….”
“몇 달 전에 사별한 사람이 어떻게 벌써부터 무도회에 얼굴을 비춰? 그것도 데뷔탕트 무도회에?”
“그냥 제국 사절단이 온다고 하니까 인사차 얼굴을 비춘 거 아닐까 싶어요.”
“그 사람이 언제부터 외교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안 봐도 뻔해. 또 이제 막 데뷔하는 영애들한테 껄떡거리고 다니겠지. 으휴. 소름 끼치는 인간.”
“쉬잇. 체통을 지키세요.”
“체통은 개뿔. 그 인간이 먼저 지켜야 하는 게 체통이야. 아내와 사별한 뒤에 평생을 혼자 지내는 신사들도 있는데. 몇 년도 아니고 고작 몇 달도 안 돼서 새 부인을 들이려고 그래? 아무리 공작가라고 해도, 그런 사람의 아내로 들어가는 건 사양이라고. 소문에는 핑크레인 공작이 직접 죽였다는….”
“그런 소리 하면 안 돼요. 파스텔 영애. 핑크레인 공작가의 명예를….”
“명예는… 칫. 애초에 핑크레인 공작가에 명예가 어디 있다고. 그리고 어차피 여기에는 우리들밖에 없잖아.”
‘이쪽 지역도 가십 거리가 참 많구나.’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로 재잘재잘 끊임없이 떠들고 있는 모습,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들이 업데이트된다.
어떤 왕국에 누가 저떤 왕국의 누구랑 비밀 연애를 하고 있었다느니, 둘이 은밀한 만남을 즐기다 시종들에게 발각되었다느니, 이번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유도 그런 불명예를 얻었기 때문이라느니, 대부분이 쓸모없는 대화였지만 도움이 되는 대화도 분명히 존재했다.
일단 이 무도회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도 말이다.
“근데 어차피 우리랑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 아닌가요. 핑크레인 공작가나… 김현성 백작이나, 마도왕국 3왕자나… 전부 신분이 높거나 명망 높으신 분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우리 살롱을 찾으실 리가 없잖아요.”
“아니야.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핑크레인 공작가면 찾을 수도 있어. 왜. 어떤 영애가 그 돼지공작한테 시집가고 싶겠어? 본인도 본인 주제를 알고 있을 테니까. 하급 귀족들이 머무르는 살롱에나 들락날락거리면서 침 흘리겠지. 그렇지 않아?”
“제발 여기는 오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핑크레인 공작만은 제발….”
‘끼리끼리 논다는 거구나.’
아무래도 무도회에 참가하는 인원이 인원일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꽤 합리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수준 비슷한 애들끼리 묶어놨네. 그러니까 동기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과연 친목질을 장려하는 행사다웠다.
아무래도 이 살롱 같은 경우에는 몰락 귀족이나, 사교계의 골칫덩이들, 준남작 가문의 영애나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이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살롱도 넘나 별로야.’
귀족 영애들이 모여 있는 장소치고는 방이 무척 단출하다. 살짝 비좁은 느낌이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혹시나 살롱을 방문할 다른 귀족들과 대화할 테이블을 제외하면 고급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
심지어 이 살롱에 함께 자리한 동기들 역시 마찬가지, 드레스와 장신구들의 수준을 보아하니, 가문에 돈이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 악물고 가문에서 비상금을 끌어모아 어떻게든 구색만 맞춘 듯한 느낌, 어쩐지 귀족 영애치고는 걸걸한 입담을 가지고 있나 했다.
‘시바. 이거 진짜… 김현성이랑 만날 수 있나?’
만나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이거 만날 수 있나?
물론 자신감이야 있었지만 불안감이 차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살롱뿐만이 아니라 무도회도 구역별로 나누어져 있을 게 뻔했고, 애초에 이렇게 끼리끼리 노는 걸 장려해 놨으니 풋내기 영식들이나 늙어빠진 새끼들만 만나다 시즌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자면 단체 과팅이나 미팅마냥 살롱끼리의 만남을 추진하는 것도 일상다반사인지라 그렇지 않아도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많이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
당연히 녀석에게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군사님 시바 아무리 그래도… 기본은 해야죠? 이게 뭐예요?
-빠른 시일 내에 준비하라고 말 한 건 네놈이었다. 아무리 왕국연합의 체계가 엉망이라고 한들, 그래도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행사다. 가짜 신분으로 그런 곳에 들어가는 게 쉬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니, 정도가 있어야죠. 시바. 이럴 거면 영애로 안 왔죠.
-게다가 네놈의 말대로라면 배경 없이 충분히 이목을 끌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잘난 재능과 노력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아니.
-왜. 자신 없나? 헛소리 지껄인 것은 네놈이었다. 이기영.
‘이 새끼 진짜 재수 없네.’
-아 됐어요. 시바. 시킨 일이나 잘하시고… 모니터링이나 잘해요.
-푸… 푸흣….
‘이 새끼 지금 웃참 한 거임?’
주먹을 꽉 쥐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파스텔 영애. 그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무슨 이야기?”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페넬로티 자작 가문의 영애들이 참가한다고 하더라고요.”
‘어?’
우리 가문 이야기였다.
“페넬로티 자작가라면… 그… 저주받은… 불길한… 분명히 가문의 3녀가….”
‘아니, 시바 이젠 하다 하다 저주까지 받았어? 이 소문은 시바 도대체 어떻게 퍼뜨린 거야?’
아무리 저주받은, 불길 어쩌구 하는 게 근본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정말로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
“분명히 페넬로티 자작님의 광증이 시도 때도 없이… 누가 그런 가문과 연을 맺고 싶겠어요? 올해는 무슨 일이 있길래 나온 걸까요?”
“저번 시즌이 워낙 성공적이었으니까요. 페넬로티 가문에서도 어떻게든 그 골칫덩어리들을 어떻게든 치워버리고 싶은 거겠죠. 3녀도 포함해서요.”
하다 하다 페넬로티 자작은 미쳐 있단다.
“페넬로티 가문의 영애들도 큰일이네요. 3녀가 함께 나왔으니 힘든 시즌이 될 것 같아요… 불쌍해라….”
구석에 있던 한 영애가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 저주받았다느니 불길하다느니 그런 소리 함부로 떠드는 거 아니에요.”
“네?”
“갑작스럽게 데뷔탕트 무도회에 떠밀려 나와서… 그렇지 않아도 본인이 가장 힘들 텐데… 많은 영식들이 벌써부터 페넬로티 가문의 3녀가 있는 살롱이 어디냐느니 거기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늘어놓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우리들만이라도 페넬로티 영애를 응원해야죠. 사실… 같은 처지잖아요? 저희?”
“앗….”
“파스텔 영애. 당신은 15세 생일 파티 때 빌터 후작가의 장남의 머리를 와인병으로 후려치지 않았나요? 그 이후로 빌터 후작가는 파스텔 영지 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죠?”
“그… 그건 그 새끼가 먼저….”
“브러쉬 영애는 왕국연합에서 금지된 불온서적을 읽다 발각되셨잖아요. 먹고 기도하고 혁명하라. 라고 했나요. 감옥에 가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세요?”
“그… 반성하고… 있답니다. 어릴 적 치기로….”
“팔레트 영애도 있었네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아직도 연초는 끊지 못하셨나 봐요. 아무리 향수를 뿌리셔도 냄새가 배어 있답니다. 같은 살롱을 쓰는 동기들을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여기 살롱 상태 왜 이래. 시바 수어사이드 스쿼드야 뭐야. 이거 조별 과제라는 말 안 했잖아.’
“그리고 당신은….”
‘난 왜.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한 마디도 안 했는데.’
“당신은 누구… 신가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제야 4명의 시선이 내 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한다.
“…….”
“…….”
슬그머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치운 것은 당연지사.
네 명의 영애의 눈이 동그래졌다.
기품 그 자체, 교양의 상징.
살아 움직이는 품위.
아름다운 미모.
“…….”
“…….”
“처음 뵐게요. 페텔로티 자작가의 3녀 아이나 페넬로티라고 합니다.”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만 믿어봐. 얘들아. 확실하게 캐리해 줄 테니까.’
그리고….
“영애님들 준비되셨습니까? 잠시 후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데뷔탕트 무도회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