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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69화 (1,36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70화

뜻밖의 데뷔(5)

춤을 권하는 데 자격이나 제한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데뷔탕트 무도회에 입장하는 순간, 누구나 상대방에게 춤을 권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물론 권리만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암묵적인 룰이 존재한다.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백도 없는 가문의 늙은 귀족이 왕녀나 공녀에게 춤을 권할 수는 없지는 않은가. 실제로 권하지도 않을뿐더러 권한 역사조차 없다.

암묵적인 룰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주제를 파악하는 것.’

특히 정략혼이 일상화되는 귀족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했다.

“…….”

욕심 많은 귀족들도 용기와 만용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 가문의 위세든, 겉모습이든, 개인의 스펙이든 간에 상대방과 본인이 수준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인지하면 감히 비비지 않는다.

춤을 거절당했을 때의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거니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개인과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이었으니 말이다.

유치하지만 어디 공작가의 영식이, 몰락 귀족의 영애에게 춤을 권하다 까인다면 영식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는 거다.

이토록 단순하게 춤을 권하는 것에도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생각해야 할 게 많다.

그렇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종류의 무도회장에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지금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영애 역시 그럴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온 무도회장에서 뭔 개떡 같은 놈이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으니 현타가 올 만하겠지.

내가 저런 놈이랑 춤을 추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열심히 교양을 쌓고 미모를 가꾼 것인지, 생각에 빠지는 순간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시바 네가 이 새끼들 수준이 된 게 아니야. 그냥 이놈들이 주제를 모르는 거야.’

아이나 페넬로티 역시 그러한 경우였다.

‘방금 등장씬 못 봤냐고. 몸에 흐르는 기품과 교양 못 봤냐고.’

너네랑 내가 같이 춤추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가냐고.

이 새끼들이 내부적으로는 이미 판단을 마치고 있다는 것이 더욱더 당황스러운 상황, 외모의 격차야 두말할 필요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자신감들이 엿보인다.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든, 뭐 검술이 됐든, 마법이 됐든 간에 자신들이 아이나 페넬로티를 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얼굴들이었다.

살롱에서 함께 무도회장을 배정해 주기도 했고… 몰락 수순을 밟고 있는 가문의 저주받은 3녀라는 타이틀이 이 새끼들의 자신감을 키워준 것이겠지만….

‘기본은 하고 오라고 좀….’

이 새끼들은 자격 미달이었다.

‘영애들은 잘생긴 사람 좋아한다고. 시바.’

아니, 사람이면 당연히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고….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벨린왕국 검술대회에서 5위를 수상한….”

‘아니, 시바 그딴 코딱지만 한 왕국 검술대회 5위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고. 영애들은 잘생긴 사람 좋아한다고….’

“저희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상단이….”

‘상단이 돈을 잘 벌든 말든 상관없다고… 영애들도 잘생긴 사람 좋아한다고….’

물론 이 결혼 시장에서 외모가 최우선 조건은 아니다. 엄연히 개성과 호감 있는 얼굴로 승부를 보는 놈들도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회색 비둘기처럼 최소한의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어도 호감을 살 수 있다. 거기에 능력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극단적으로 박덕구도 어마어마한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에게 김현성의 얼굴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현성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건 시바 너무 잔인하니까.

‘노력 좀 하라고….’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벌 떼처럼 내게 달려든 놈들이 바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놈들이었다. 심지어 능력도 어중간하다. 이기영 가라사대 무능력한 놈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지만 이 새끼들은 생리적으로 쳐다볼 수가 없는 놈들이었다.

“네? 네? 네… 네?”

아이나 페넬로티의 첫 댄스를 이런 놈들에게 줄 수는 없다. 여기서 한 번 수락하면, 그다음 놈들도 수락해야 한다. 이 무도회가 끝나기 전까지 이 새끼들이랑만 춤만 추다가 끝날 것이다.

‘영애들아. 시바 포기하지 말자.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스스로 지키자.’

그저 계속해서 당황스러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

“페넬로티 영애!”

“페넬로티 영애! 저희 가문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페넬로티 영애?!”

구원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신사분들 죄송해요. 페넬로티 영애가 이런 장소는 처음이라 너무 긴장한 것 같네요. 잠깐 빌려 가겠습니다.”

파스텔 영애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구하러 왔구나!’

“아… 파, 파스텔 영애….”

“빨리 와. 괜히 저런 사람들이랑 엮이지 말고.”

“아? 아… 네? 그, 그래도 춤을 신청해 주신 분들인데….”

“저런 사람들이랑 춤추지 마. 페넬로티. 전부 다 음흉하고 머리 나쁜 사람들이니까. 심지어 올해 데뷔한 사람들도 아니야. 하루 종일 무도회만 기웃거리고 껄떡거리는 못난 사람들이라고… 저 사람들 명단도 영애들 사이에 돌고 있다니까. 최소한 올해 데뷔한 영식이나… 아니면 저기 저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랑 첫 댄스를 추는 게 나을 거야.”

“그래도 모처럼 용기 내서 신청해 주신 분들….”

“이번만큼은 내 말 들어 아이나 페넬로티. 친구로서 해주는 말이니까. 응?”

“아… 네.”

자연스럽게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수군거리기보다는 대놓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외모와 인성이 비례한다는 이론을 명확하게 증명해 주는 모습, 과연 끝까지 찌질했다.

“칫… 몰락가문의 3녀 주제에 더럽게 비싼 척하는군.”

“그것도 저주받은 3녀라며… 모처럼 구해주려고 했더니만 자기 복을 자기가 차고 있네. 어디 잘 되나 보자고.”

“…….”

“…….”

‘누가 누굴 구해줘? 뭔… 이 주제도 모르는 새끼들이.’

“와… 와인병 내려놓으세요. 파스텔 영애.”

“어? 아니, 이건….”

“와인병 내려놓으셔야 돼요. 저… 페인트 영애한테 들었어요… 그러니까….”

“하… 하하하… 나도 모르게. 아. 이… 이건 집어 던지려고 한 게 아니라… 한, 한 잔 마시려고….”

‘그거 집어 던지거나 내려치면 우리 살롱은 여기까지야. 그래도 심정은 이해 하자너….’

“그럼 여기서 기다려. 저기 울고 있는 영애도 데리고 올 테니까. 누가 춤을 권해도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네… 네.”

‘조금 급진적이기는 하지만 든든하다. 파스텔 영애.’

아무래도 저놈들의 마수에서 영애들을 구출하는 게 그녀의 임무인 모양인 것 같았다.

물론 이미 받아들인 이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내가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피해자가 많이 발생하지는 않은 편, 사실상 저놈들은 없다고 생각해야 편했다.

파스텔 영애의 말처럼 춤을 출 거라면 올해 데뷔한 영식들이나 저쪽에 모여 따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이상적이다.

물론 저 녀석들마저도 아이나 페넬로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무조건 아이나 페넬로티의 첫 댄스는 김현성과 하기로 결정이 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거기서 뭐 하세요? 페넬로티 영애?”

“페인트 영애?”

“…….”

“파스텔 영애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셔서… 뭘, 뭘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요. 당분간은 누군가가 춤을 신청해도 받아주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그렇다 보니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아. 그러고 보니 이런 무도회가 아예 처음이라고 하셨죠?”

“네.”

“사실 크게 고민할 것도 없어요. 할 게 없으시면 핑거푸드나 와인을 드셔도 되고… 다른 영애들이 춤을 추는 걸 구경해도 되고요. 저기 보이는 영식이나 신사분들과 대화를 나누어도 상관없어요.”

“아….”

“딱히 뭘 해야 한다고 정해진 게 없으니까요. 페넬로티 영애의 하고 싶으신 대로 그냥 무도회장을 즐기시면 돼요. 처음에는 그걸로 충분해요. 괜히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신경 쓰는 것보다는….”

“그, 그렇군요!”

“아무튼 당분간은 저랑 같이 다니죠.”

“네?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에요.”

무표정으로 팔짱을 껴오는 페인트 영애의 모습이 비친다. 마치 이쪽을 에스코트 해주는 모양새, 무도회장을 거닐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춤 신청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을 보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오기는 한 모양.

몇몇 영식들과도 친분이 있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페인트 영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별것 아닌 행동이기는 했지만 설정상 페넬로티 영애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새롭다. 페인트 영애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조금 부끄럽다는 듯이 괜스레 시선을 피하는 페인트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너도 알고 있지?’

우리 이대로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

페인트 영애도 꽤 필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야 대놓고 흑장미 살롱이 무시당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최소한 제대로 된 시간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 아니었던가. 계속 이대로라면 저 루저들과 첫 댄스를 춰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에게도 있을 것이다.

‘근데 얘는 무슨 잘못을 했길래. 여기에 있지.’

계속해서 무도회장을 돌아다니며 친분을 다지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모두 흑장미 살롱의 랭크업을 위한 행동이었다. 객관적으로도 금발의 페인트 영애는 아름답고 교양 있었으니 본인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홍보가 될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구태여 나를 끌고 다닌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근데 이 정도로는 안 돼.’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버린 상황이다. 아직까지도 흑장미 살롱 파티원들은 춤 한 번 추지 않은 상황, 이대로라면 내일도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 자명했다.

‘차라리 파스텔 영애가 쟤네들 뚝배기를 깨 버리는 게 화제성 면에서는 더 좋겠는데.’

구석에서 선 채로 와인을 연거푸 들이마시고 있는 파스텔 영애의 모습이 눈에 띈다.

브러쉬 영애는 아직까지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든지 후아 후아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고, 연초가 땡겼던 팔레트 영애는 무도회장에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온몸에 잔뜩 연초 냄새를 묻힌 뒤에 재등장하지 않을까.

저 구석에서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는 집단이 눈에 띈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와인을 한 잔씩 들어 올린 채로 폼을 잡고 있는 새끼들. 누가 봐도 본인들이 알파메일인 줄 아는 놈들.

여유 있는 척, 자신들은 남들과는 다른 척, 주제파악 하지 못하고 무도회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집단이었다.

‘블라인드 폴드?’

놈들은 체스 기물과 보드를 보지 않고, 기보를 입으로 말하며 체스를 두고 있었다.

저 치들도 아직 댄스를 신청하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하거나 간을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 와중에 내게 춤을 권하기 위해 달려온 놈들도 눈에 띈다. 파스텔 영애가 나를 데려가자 황급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는 했지만 분명 저 새끼들의 눈빛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너희가 쟤네보다는 낫다.’

그나마 깔끔하게 생기기도 했고, 능력도, 야심도 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주제에 잘난 척하는 꼴이 살짝 재수 없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랭크 상승을 위한 교두보로 삼기에는 딱 적당한 놈들이었다.

‘말을 걸어보는 거야. 아이나 페넬로티!’

“…….”

‘페넬로티! 넌 할 수 있어!’

설정상 먼저 말을 거는 것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때마침 페인트 영애에게 용기를 받은 타이밍.

자신의 방식대로 무도회를 즐기라는 찐친의 조언은 이미 페넬로티 영애의 가슴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었다.

“저… 저기!”

‘아… 아노!’

“당신은… 페넬…로티 영애? ‘

“저… 저도 끼워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저도… 저도 체스 좋아하거든요!”

“…….”

“…….”

“…….”

“푸하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핫!”

‘뭐야. 니네 왜 빵 터진 거야.’

“아. 죄송합니다. 페넬로티 영애. 지금 저희는 평범한 체스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눈 있어. 너네 노는 것도 봤고… 뭐 시바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이야?’

“저도 알고 있어요. 저, 저도 할 수 있는데….”

“흐음… 그렇다면… 가볍게 한번 둬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큼… 큼… 그냥 두기는 심심하니 내기를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내기요?”

“네.”

“…….”

“…….”

“물론이에요!”

당연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이런 멍청한 새끼들이 나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 그래.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갤러리들 빨리 모이라고.’

녀석들의 비웃음 소리가 어그로를 끌어주기는 했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갤러리들 사이에….

‘뭐야….’

“…….”

‘이 새끼 왜 여기로 왔어?’

변장 아닌 변장을 한 진 군사가 시야에 비쳐왔다.

‘아 이 양반 또 내기한다니까 못 참고 내려온 거야?’

도박중독치료센터에 전화라도 넣어야 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

-아니, 뭐 해요? 여기서? 현장감 중요시하는 건 알겠는데 진 군사님은 진 군사님 할 일이나 해요.

-또 시답지 않은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아니, 올라가라고요. 여기서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구.

-네놈,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건가?

눈앞에 보이고 있는 녀석이 2군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식간.

“어….”

-어….

“…….”

“어?”

-어?

내가 바라보고 있는 녀석은 2군사가 아닌 1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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