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69화
뜻밖의 데뷔(4)
“저… 방금 전은 죄송해요. 페넬로티 영애.”
“미… 미안해.”
‘얘들이 아직 어려서 그런지 착하기는 하네.’
“그냥 소문만 듣고… 함부로 판단하고 뒷이야기를 해서… 이런 말씀 드리기 염치없다는 건 알지만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죄송합니다. 페넬로티 영애. 오늘 받으신 상처는 꼭 보상을 해드릴 수 있도록 약조드릴게요. 단순히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가문 차원에서 사과를 받고 싶으시다고 하셔도 그에 따르겠습니다.”
살롱을 나와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그 순간까지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고 있는 영애들이 눈에 띄었다.
‘확실히 아직 순수하기는 해.’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아니야. 뭐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할 수 있는데.’
물론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게 중요하기는 했다. 단순히 이쪽만 흉을 본 것이 아니라 페넬로티 가문과 자작을 싸잡아 욕했으니, 명예를 중시하는 얘네들 특성상 이후 발생할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페넬로티 가문이 몰락하고, 입지가 좁아졌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자작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영애들의 경우에는 내게 한 뒷담이 더욱더 마음이 걸리는 모양,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들 역시 가문 내에서 골칫덩이로 취급받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신경이 쓰였던 것 같았다.
중간에 페인트 영애가 한 쓴소리가 영애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닐까.
‘뭔 와인병으로 뚝배기를 깨니 마니 하고 있었으니까.’
다른 영애였다면 분명히 이 문제를 공론화하며 절대 그녀들을 용서하지 않았겠지만 아이나 페넬로티 영애의 설정상 이 정도는 용서해 줌이 옳다.
계속 자작가의 저택에 갇혀 지냈으니 친구고 뭐고 있을 리 만무, 오히려 자작가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신에게 사과를 보내고 있는 영애들에게 호감을 느낄 지경이었다.
사실 내가 욕을 얻어먹은 것도 아니었으니 사실 별생각도 없다.
“괜찮아요. 영애들 신경 쓰지 마세요.”
“용서하실 수 없으시겠지… 예?”
“괜찮아요. 브러쉬 영애. 사실… 틀린 말도 아니고요.”
“그… 그런….”
“오히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고 싶은걸요. 이렇게 선뜻 다가와 주시고, 또 허물없이 대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화… 내시지 않는 건가요?”
“사실을 말하셨을 뿐이니까요. 헤헤….”
“페… 페넬로티 영애.”
“…….”
“…….”
‘얘네들 감동한 거 봐.’
4영애가 뭐 이렇게 착한 사람이 다 있을까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실 약간의 동정심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허물없이 대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대사가 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리라.
모르긴 몰라도 각자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지 않을까. 친구 하나 없이 지냈던 자작가의 3녀, 매일매일 감옥 같은 곳에 갇혀 외로운 시간을 보내는 저주받은 영애.
그녀들의 상상력을 충족시키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보다 정말 기대되지 않나요? 저, 사실 이런 장소에 오는 것은 처음이라… 사실 다른 영애들과 이렇게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처…음이에요. 모, 모든 게 처음이고 신기한 것투성이라… 여러분들과도 잘… 지낼 수 있을지.”
“…….”
“…….”
대충 봐도 이쪽을 동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 바로 그거야. 기다릴게. 기다릴게.’
아니나 다를까 파스텔 영애가 행동에 나서왔다.
“그… 친… 친구 할까?”
“네?”
브러쉬 영애도 갑작스레 내 손을 꽉 잡는다. 저세상 텐션이었다.
“우리… 친구 하죠! 페넬로티 영애!”
“네? 네?… 네? 네?”
‘에에에에에 토모다치?!’
이럴 때는 원래 크게 당황해 줘야 한다.
‘나야 환영이자너.’
본래 홀로 동 떨어진 여주인공의 곁에도 언제나 듬직한 친구 몇 명은 존재하게 마련이다. 아니, 거의 법칙이나 다름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해주고 부둥부둥 해줄 수 있는 친구들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하다.
‘4명은 좀 많기는 한데….’
그게 와인병으로 뚝배기를 깨는 종류의 친구들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행동대장 불량아 파스텔 영애, 살짝 음침하고 무서운 속성을 담당하는 애연가 팔레트 영애, 혁명적인 브러쉬 영애와 다소 냉정한 면이 있지만 속은 따뜻한 페인트 영애까지.
본래 페인트 영애 같은 캐릭터와는 갈등을 겪다가 친해지는 것이 국룰 아닌 국룰이었지만 시간관계상 그런 서사를 부여해 줄 여력이 없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라고 부를 만한 문제아 집단이기는 했지만 벌써 든든함이 차오른다.
“친, 친… 친구요? 그건… 그건 어떻게 하는 건가요?”
‘친구는 어떻게 하는 거냐고! 젠장!’
“그냥 같이 놀고, 같이 파이팅하고! 같… 같이 전부 다 하는 거지.”
“네? 네?”
“우리 어머니가 어차피 살롱 동기들이랑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했어. 아니, 친하게 지낼 수밖에 없다고!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인데. 우리 전부 친구 하자. 괜찮지? 브러쉬, 팔레트, 페인트.”
“저… 저는… 여, 여러분들에게 폐가 되지는 않을지….”
“세간에서 하는 말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페넬로티 영애. 물론 방금 전에 페넬로티 영애를 욕보인 제가 드릴 말은 아니지만… 영애의 모습을 보니 제가 얼마나 식견이 좁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거든요. 그리고 파스텔 영애 말대로, 우리는 살롱 동기잖아요.”
“저희 어머니께서도 아직도 살롱 동기들과는 연락하고 계세요.”
“제 어머니도요.”
“우리 엄마도… 남편이고 나발이고 남는 건 살롱 동기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의기투합하는 거 좋아.’
“우리… 모두… 친구 하죠.”
“…….”
어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모두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친해지는 속도가 빠르다. 척척척 손을 모으는 영애들, 어서 빨리 손을 주라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4영애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슬그머니 그녀들과 손을 포갠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힘내죠. 비록 아무도 우리 살롱을 찾지 않더라도… 똘똘 뭉쳐서…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를 혁명적으로 헤쳐나가요.”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영애님들… 슬슬 입장하셔야 합니다.”
“네! 혹시 할당된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흑장미 살롱 여러분들께서는 총 두 시간을 머무르실 수 있습니다.”
“겨… 겨우 두 시간이요? 지금 시간도… 애매한 시간인데… 7시잖아요. 유력 가문은 다들 식사하시러 들어가실 시간인데….”
“죄송합니다. 스케줄이 조정이 안 되는지라.”
‘역시나 찬밥 신세자너.’
무도회장을 쓸 수 있는 인원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겠지만 무척이나 악의적인 편성이었다.
떨거지들은 떨거지들끼리 놀라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는 밥도 9시에나 처먹으라는 거 아니냐구.’
뜨거운 감자들은 이미 점심 식사를 마친 뒤에 한참 동안이나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겠지. 그 치들이 슬슬 저녁 먹을 시간대가 되고 무도회장을 비워주고 나서야 흑장미 살롱이 무도회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연히 상대들도 형편없는 놈들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무도회를 즐기고 싶은 몇몇은 더 남아 있고 싶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살롱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시간도 신경을 써야 하는 만큼 그럴 확률은 희박하다.
‘지금 들어가 봤자 거지 같은 놈들 밖에 없겠는데.’
머리 빠진 배불뚝이들이나 결혼할 시기를 놓친 중년들이나 와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진짜 문제아들 말이다.
의기투합한 영애들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색이 창백하다. 파스텔 영애가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그냥 들어가지 말까. 짜증 나는데….”
“그, 그래도 들어가기는 해야죠. 파스텔 영애. 이번에 보이콧 하면 다음에는 더 취급이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번 무도회장에서 잘 보이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페넬로티 영애를 생각하면….”
“그, 그렇지….”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페넬로티 영애. 아마 실망스럽겠지만… 그리고 나이든 귀족이 먼저 춤을 신청해도, 절대로 받아주지 마시고요. 무슨 변명을 하든지 상관없으니 일단은 거절하셔야 해요. 가문에서 뭐라고 하는지는 상관없어요. 페넬로티 영애는 소중해요. 제가 무슨 말 하는지 잘 알고 계시죠?”
“네? 아… 네. 고마워요. 브러쉬 영애.”
“영애님들….”
“…….”
“…….”
“아! 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조금 발걸음을 옮기자 흑장미 살롱뿐만이 아니라, 다른 살롱에서 온 이들도 암막 커튼을 앞에 두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집단에서도 흑장미 살롱의 계급은 최하위인 것인지, 입장하는 순서도 가장 마지막이다.
“먼저 흰백합 살롱 여러분들 입장하시겠습니다~”
흰백합 살롱의 영애들이 크게 숨을 들이마신 이후에 암막 커튼을 걷는다.
안에서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중, 어느 어느 영애가 입장한다고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도 울려 퍼진다.
“저… 갑자기 너, 너무 긴장되는데….”
“긴장하지 마세요. 브러쉬 영애. 우리가 있잖아요.”
“하, 하지만 너무 긴장이 돼서 숨을 못 쉬겠어요.”
“숨 크게 들이마시세요. 후… 하! 후… 하!”
“후… 하! 후… 하!”
그 뒤로도 계속해서 타 살롱의 영애들이 한 명씩 입장하고 있다. 당연히 우리 순서가 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흑장미 살롱 여러분들 입장하시겠습니다~”
“나 먼저 갈게.”
“네. 힘내세요! 파스텔 영애!”
처음은 파스텔, 이후에는 브러쉬, 그 다음은 팔레트, 그리고, 페인트까지 입장하고 나서야 내 차례가 온다.
‘후우….’
그리고.
“흑장미 살롱, 페넬로티 자작가의 3녀, 아이나 페넬로티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암막 커튼이 열린다.
꽤 호화스러운 무도회장이 한눈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진다. 계속해서 잔잔하게 음악을 켜고 있던 악단들에게는 짧은 퀘스트를 보낸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냥 이쪽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악단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끼이이이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음악이 멈춘다.
‘연출 좋구요. 악단도 넋이 나갔죠?’
넓은 무도회장에 정적이 가라앉았다. 들리는 것은 또각또각 소리밖에 없다.
허리를 쭉 펴고 정면을 똑바로 쳐다본 이후에는 계속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조촐하지도 않은 보라색 벨 라인 드레스, 반 묶음 머리, 장신구에도 힘을 주지 않았지만 애초 힘 따위 주지 않아도 충분하다.
다른 이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하다면 평범한 착장이었지만 옷걸이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내가 바로 시바 아이나 페넬로티다.’
분위기로 먹고 들어가자.
귀족들은 배우지 않는 것이 없다. 걷는 법 역시 마찬가지. 어깨는 흔들리지 않게, 똑바로 정확하게 앞 만 바라보며 적절하고 기품 있는 보폭으로, 옷감이 스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앞서 설명했던 대로 신발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 외에는 모든 것이 침묵이다.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자신의 소음이 죄악이라도 된 양, 조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등장 씬이 어느 정도 이목을 끌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흑장미 살롱 동기들조차 입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봐줘. 시바. 봐줘. 날 봐.’
“…….”
“…….”
‘날 봐.’
“…….”
‘바라봐줘!’
싱긋 입꼬리를 올린다.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순간.
“…….”
“앗….”
악단이 화들짝 놀라 다시금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이었어.’
절대적인 품위와 기품 앞에, 한낱 저주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는 새끼들의 모습이 눈에 비쳐왔다.
“저… 페넬로티 영애?”
“페넬로티 영애.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페넬로티 영애.”
“페넬로티… 페넬로티 영애!”
문제가 있다면….
평소라면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할 루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
“…….”
“…….”
‘와 이딴 놈들 쳐내려고 입장에 힘 줬던 건데… 시바 암만 저주받았다고 해도, 이런 주제도 모르고 거울도 안 보는 새끼들이 다 달라붙네.’
다른 게 폭력이 아니다. 이런 새끼들이 누군가에게 춤을 권하는 게 바로 폭력이다.
‘저거 봐.’
저 멀리서 춤을 권유받은 영애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졌는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지 않은가.
“…….”
“…….”
‘흑장미 살롱 레벨을 올려야 돼.’
데뷔탕트 무도회는 짝짓기 프로그램이 아니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