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71화
뜻밖의 데뷔(6)
내가 바라보고 있는 녀석은 2군사가 아닌 1군사였다.
‘이 새끼… 여긴 도대체 왜 있는 거야?’
겉모습을 바꾸고 참가한 것을 보면 초대를 받고 온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 행사는 어디까지나 왕국연합과 소수의 제국 귀족을 위한 행사였으니까.
당연히 모종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공화국의 오호대장군이나 되는 인사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정체를 숨기고 이곳을 찾지는 않았을 테니까.
‘뭔가 있기는 한 거자너.’
육망성 게이트가 지금 현시점으로 우리들을 떨궈 놓은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단순히 파티를 즐기라고 떨구어 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지.
데뷔탕트 무도회의 끝에 무언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또 대비도 하고 있었지만 정체를 숨긴 1군사의 모습을 보자 이쪽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녀석뿐만이 아니다. 파티에 참가하는 인원들 중에 공화국의 인사가 섞여 있다. 조심스레 2군사를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
-뭐… 예상 가는 거라도 있어요? 군사님? 단순히 제국과 연합을 견제하기 위해서 찾아왔다기에는 전력이 과한 것 같은데.
-네놈이 생각하는 대로겠지.
-작전이 있을 거라고요?
-글쎄. 확답을 내리고 싶지는 않군… 물론 제국과 연합이 혈맹으로 맺어지는 걸 반가워할 리는 없겠지만… 나 역시 직접 무도회를 찾은 것 이해가 가지 않아.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물론 신경 쓰이기야 하겠죠… 근데 겨우 그것 때문에 엉덩이 무거운 군사님이 여기 찾아왔다는 건 조금… 하기사 예전에도 라이오스에 직접 찾아오기는 했었지만… 암만 생각해도 뭐 한 건 터뜨리려고 온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군사님 전쟁 좋아하잖아요. 이 시기에 공화국은 어떻게든 싸우고 싶어서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 같던데 제 말 맞죠?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암튼 창렬이한테 뒤 좀 캐달라고 말씀해 주세요. 갤러리들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
‘마침 쟤도 나 보고 있으니까.’
꼭 김창렬만 뒤를 캐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잘됐어.’
어차피 흑장미 살롱의 랭크를 올리려고 하던 타이밍이었고, 데뷔탕트 무도회의 상류 파티에 이를 악물고 진입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녀석이 무슨 신분으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1군사가 기점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여전히 호기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녀석, 사실 녀석뿐만이 아니라 모든 갤러리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전 신청을 받은 저 얼간이 놈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거… 아무래도 페넬로티 영애가 체스에 조예가 있으셨나 봅니다.”
“하하하하하핫!”
“푸하하하하하하핫!”
‘와… 진짜 이 새끼들 개 노답이네.’
“그럼 간단하게 룰에 대해서 설명을….”
“전부 다 알아요!”
‘그럼 내가 시바 하는 법도 모르고 니네한테 두자고 했겠냐고. 이 설명충 새끼들아.’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것보다 내기는 어떻게….”
“하하하. 네. 내기가 걸려 있었군요.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만약 제가 이긴다면… 이곳에 계신 신사분들 모두에게 페넬로티 영애와 춤을 함께하는 영광을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만… 이 정도면 딱 적당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심한데?’
“잠깐만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아니나 다를까 페인트 영애가 끼어들어 온다. 저 못생기고 재수 없는 것들과 춤을 추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있는 귀족 놈들이 한두 명도 아니었으니 만약 저 조건을 이행한다면 데뷔탕트 무도회에 절반을 저 찌질이들에게 할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선 것이다.
조건을 제시한 새끼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만무, 아마 방금 전에 에둘러 까였던 것에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이리라.
‘진짜 찌질하다. 시바. 찌질해. 왕국연합의 미래가 어둡다.’
심지어 이쪽이 직접 거절한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걸 계속해서 마음속에 담아두는 있었던 모양, 파스텔 영애가 조심스럽게 와인병을 들어 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지만 순수하고 착한 페넬로티 영애는 녀석들의 질이 나쁜 보복을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페넬로티 영애. 이, 이건 아니에요. 갑자기 이런… 악의적인 조건이라고요. 페넬로티 영애는 잘 모르시겠지만… 만약 저 조건을 받아들이신다면….”
“괜찮아요. 페인트 영애! 저… 체스 잘 두거든요.”
“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저들이!”
“…….”
“그렇다면… 페넬로티 영애의 조건을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저는… 아! 혹시 시합이 끝나고 나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사실 조건으로 뭘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네. 그렇게 하시지요. 하하하핫!”
“흐… 흐하하하하하하하. 페넬로티 영애가 이렇게 농을 잘 던지시는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이거 기대가 되는군요. 잘 어울려 드리겠습니다.”
“제가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남작님?”
‘꼴에 남작이었어?’
“이런 재미있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제가 직접 하도록 하겠습니다.”
할 일이 없는 심심한 귀족 놈들은 당연히 이런 이벤트를 좋아한다. 무도회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매일매일 떠들어 대고 있으니 딱히 흠이 잡힐 만한 이슈가 아니라면 본인들의 이야기가 나돌아다니는 것을 즐길 수밖에 없다.
‘이 명예도 모르는 새끼들 진짜.’
이번 일이 놈들의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여러 가지 소문이 퍼지지 않을까. 물론 엄청나게 각색을 거친 채로 말이다.
주제도 모르고 건방을 떨던 페넬로티 영애를 혼내 줬다느니, 함께 회장을 이용하는 신사들을 무시한 대가로 벌을 내렸다느니 하는 전형적인 참교육형 스토리가 무도회장에 퍼져 나갈 것이다. 지들끼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어마어마한 뒷담화가 양산되겠지.
결국에는 그 모든 결과가 저 남작에게 이롭게 돌아올 거라는 걸 장담할 수 있다.
애초에 페넬로티 영애는 가진 것 없는 자작가의 3녀, 것도 저주받은 영애에 불과하기도 했으니… 모르긴 몰라도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외모와 기품만 믿고 설치는 망나니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저 남작에게는 그만한 인맥과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주변에 있는 놈들도 충분히 쓰레기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1군사가 표정을 찡그리고 있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명예라고는 진짜 손톱만큼도 없는 놈들이자너.’
그나마 정상적인 1군사는 누가 봐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남작 일행을 바라보고 있는 중, 물론 이 새끼도 그다지 명예롭지는 않다.
괜히 흑기사 롤을 자처하기보다는 갑작스레 시작된 이 내기와 페넬로티 영애에 대한 흥미가 더 우선순위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주섬주섬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가린 것은 당연지사. 손수건을 질끈 묶고 있는 와중에도 이죽거리는 소리와 비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푸…흐…흣… 흐하하하하하하! 그렇게 꼭 눈을 가릴 필요는 없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저는 이렇게 해야 집중이 잘 돼서요.”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렇게 해야지 더 집중이 잘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남작님.”
“하기사 눈을 가려야 더 집중이 잘 되기는 합니다만… 하… 하하하핫. 페넬로티 영애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었군요.”
‘이건 퍼포먼스야 이 새끼들아.’
“그렇다면… 준비가 되는 대로 페넬로티 영애부터 시작하시지요.”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놈들의 그 비웃음. 환호성으로 만들어줄 거자너.’
갤러리들이 잘 알아볼 수 있게 알아서 전황판까지 만들어주는 고마운 새끼들.
알아서 발리러 와준 따뜻한 새끼들.
하지만 재수 없는 새끼들.
슬그머니 손을 앞으로 뻗으며 입을 열었다.
“E2을 E4로.”
“…….”
“C7을, C5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보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흐릿한 것들이 점점 형태를 갖추고, 스스로 움직인다.
녀석이 입을 열 때마다 머릿속에 있는 기물이 움직인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이 교육 아닌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기본은 하네.’
하기사 아예 체스를 둘 줄 모르는 놈들이었다면 블라인드 폴드가 가능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느 정도 조예가 있고, 대가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아니나 다를까 대륙에서 유행하고 있는 오프닝을 그대로 따라 들어오고 있는 중, 관심이 있으니 공부를 했겠지.
“나이트 D4.”
“…….”
“나이트 D3.”
“…….”
“폰 C4.”
물론 대국을 이어나가면 나갈수록, 아니, 정확히는 오프닝이 끝나고 수 싸움이 시작된 순간 이 새끼가 속 빈 강정이라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와. 시바 무슨 자신감이었지?’
이 새끼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깝치고 다녔던 거지?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린다. 지들끼리 뭉쳐 웃고 떠들고 있길래 숨겨둔 한 수라고 있는 줄 알았는데 숨겨둔 한 수는 개뿔 아무것도 없는 개털이었다.
심지어 이게 익숙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조금 압박했을 뿐인데 겨우겨우 수를 따라오고 있는 모습.
수에 2초 이상 허비하지 않으니 머릿속으로 보드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한계인지 계속계속 시간이 지체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아름답고 지성 있는 페넬로티 영애는 막힘없이 대국을 진행하는 중. 점점 주변이 조용해지기 시작한다.
떠들썩하고 이쪽을 비웃기 바빴던 놈들이 이제는 아가리를 다물고 있다. 끊임없이 떠들던 입들이 뭐라도 물은 것마냥 움직이지 않는다.
“허….”
“뭐야… 이게….”
마법사가 만들어낸 상황판에서도 아마 현 대국의 상황이 비치고 있을 터였다. 이 남작이 쪽도 못 쓰고 개 털리고 있는 것이 말이다.
이미 한참 전에 대국을 포기했어야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는 중, 결국에는….
“체크메이트.”
“…….”
“제가… 이긴 거 맞나요?”
“…….”
“…….”
심지어 대답도 들리지 않는다. 무언으로 긍정한 것이다. 곧바로 손수건을 멋들어지게 벗을 수밖에 없는 상황, 물론 건방진 표정이나 도발하는 표정은 금물이다.
어디까지나 이 승부가 재미있었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띠는 것이 옳다.
‘보아라. 우민들아. 이게 아이나 페넬로티다.’
“우와아아아아아앗! 페넬로티!”
“꺄아아악! 페넬로티 영애!”
“대… 대단해요. 페넬로티 영애.”
가장 먼저 이쪽에 달라붙은 것은 파스텔 영애, 그리고 연초 냄새가 진동하는 팔레트 영애.
‘아 팔레트 영애는 좀 떨어져.’
“혁명적이었어요! 페넬로티 영애! 혁명적이었다고요!”
‘아니, 그 혁명 소리 좀 그만해. 너는. 잡혀갈까 무섭다.’
당연히 상대 진영의 분위기는 초상집이었다.
“이… 이게 무슨….”
그 와중에도 자존심은 챙기고 싶은지….
“하하하핫… 제… 제법이로군요. 페넬로티 영애. 제가… 제가 졌습니다.”
마치 자신이 일부러 져준 척하는 꼴은 추하다 못해 불쌍하다.
“하… 하핫… 남작님께서… 아무래도 페넬로티 영애가 안쓰러우셨나 봅니다.”
“하…하지만 페넬로티 영애도 제법이더군요.”
“대단….”
‘지랄들 하세요. 진짜.’
“그, 그럼 내기에서는 제가 진 것으로 하겠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원하는 게 있으시다면….”
“한 번 더 두고 싶어요!”
“네?”
“한 번 더 두고 싶은데 안 될까요? 그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데….”
“…….”
“이번에는 여러분들이랑 모두와 동시에 두고 싶어요.”
“저, 저 잠깐 페넬로티 영애… 저희가 조금….”
‘다섯 명?’
껌이자너.
“보드를 가지고 오셔도 돼요. 저는 괜찮으니까요.”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다시 한번 손수건으로 눈을 가린다.
“…….”
그리고.
“체크메이트.”
“…….”
“체크메이트.”
“…….”
“체크메이트.”
“…….”
“잃어버리셨어요.”
“…….”
“체크메이트.”
그렇게 다시금 손수건을 벗겨내며 정면을 바라보자.
놈들의 뒤에서 재미있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1군사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까지 한다.
“재미있군….”
‘너 지금… 재미있다고 말한 거 맞니?’
“흥미로워.”
“…….”
“…….”
‘흥미…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