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75화
뜻밖의 데뷔(10)
네가 진짜 시바 기영이 미치는 꼴을 보고 싶구나.
‘핸들이 고장 난 페넬로티 영애를 보고 싶은 거지?’
그걸 원하고 있는 거지?
보드를 세팅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 제니스 후작, 1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저건 연기가 아니다. 오랜만에 호적수와 만나 즐겁게 게임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는 표정, 입꼬리가 느슨해진 채로 보드와 기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녀석이 아이나 페넬로티를 바라보는 눈에는 엄청난 기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천재,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되는 저주받은 3녀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자신의 기대감에 부응할 수 있을지 궁금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자면 2군사가 도망간 것도 이해가 간다. 이번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와는 별개로 녀석은 제니스 후작과 아이나 페넬로티가 엮이는 것에 경기를 일으키고 있었으니까.
만약 본인이 직접 게임을 하다가 제니스 후작이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더욱더 큰 호기심을 가지기라도 한다면 개 같은 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야말로 이기영을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근데 네가 빠진다고 시바 몰아치는 급물살이 갑자기 잠잠해지겠냐고.’
문제는 그게 의미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
‘아이나 페넬로티는 한 번 승객을 태우면 시바 정차고 나발이고 없다고.’
제니스 후작이 기차로 발을 올리는 순간, 아이나 페넬로티는 뿌우 뿌우 경적을 올리며 멈출 수 없는 철로를 질주한다는 거다.
물론 진 군사가 비협조적인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단순히 진 군사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심력을 소비한다는 것도 웃긴 이야기였지만 이기영의 부탁을 거절한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시바. 진짜로 못 볼 꼴을 봐야지. 정신을 차릴 거냐고….’
다시금 1군사를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이 새끼한테 작업 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이 새끼가 누군가에게 쉽사리 이성적인 호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인물에게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미 녀석은 페넬로티라는 인물을 가지고 싶어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제니스 후작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내 이해관계와도 일치한다.
‘역시 괜한 오버하지 말고… 그냥 던져놓고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고 있는 와중에 1군사가 다시금 말을 이어왔다. 여전히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 채였다.
“그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에요.”
‘네 도움 안 받아도 충분하거든요. 시바.’
이 게임의 고인물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한 과업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때의 이기영과 지금의 페넬로티는 다르다.
스탯으로 인한 지능의 차이도, 전쟁을 직접적으로 겪으며 쌓아온 경험도, 이 게임에 대한 이해도도 말이다.
무엇보다 페넬로티는 이 게임을 처음 해본 만큼 약간의 가능성만 보여주더라도 좋아 죽을 터였다.
“흐음….”
“…….”
가장 중요한 것은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 냉철 모드, 천재 모먼트, 게임이 시작된 이후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로 보드에 집중한다.
체스에서 보여줬던 그녀의 폭력성과 비정함 또한 마음껏 선보여주는 것이 맞다.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이용한다. 던질 수 있는 병력들은 과감하게 던지고, 보급을 담당하는 말 역시 전쟁터로 내던진다.
전의 경험이 없었던 이기영이 모든 걸 버리고 도망쳤었지만, 아이나 페넬로티는 모든 걸 버리고 오직 왕의 목을 취하기 위해 덤벼들고 있었다.
이 전쟁 안에서 아이나 페넬로티는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자비 없고, 잔인하고, 순수하게 폭력적이다. 1군사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이나 페넬로티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한 본성의 편린을 엿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에게도 기죽지 않고 달려들고 있는 이 영애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까.
‘괴물이군.’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녀가 숨기고 있는 성정, 아직 개화하지 못한 재능, 아이나 페넬로티 안에는 괴물이 숨겨져 있다는 설정이었고, 나는 그걸 완벽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진심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이 사회 부적응자는 찐따마냥 게임으로 진심 어린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상인의 범주에 들어가 있는 나야 놈이 어떻게 이걸로 대화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녀석은 지금 아이나 페넬로티와 대화를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터였다.
애초에 대화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선택한 이기영과는 엄연히 다른 행보였다.
‘여리고 순수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시바 어마어마한 게 숨어 있다고.’
물론 단순한 천재, 괴물 모먼트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아이나 페넬로티가 커다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표현해 내야 했다.
어느 장르나 히로인의 포지션에 있다면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국룰이 아니었던가. 모르긴 몰라도 제니스 후작이라면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을 것이다.
페넬로티가 어째서 블라인드 체스에 익숙한 것인지, 그녀가 어떻게 머릿속에 다섯 개의 보드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인지, 어째서 이 게임을 하는 내내 그녀가 이리 독선적이고 파괴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
페넬로티가 언제나 혼자였기 때문에라는 해답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주변에는 그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주받은 3녀로서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고, 그 누구도 가까이에 두지 않았던 그녀의 마음은, 겉모습과는 다르게 썩어 문드러져 있다.
아이나 페넬로티가 대화를 하는 방식은 무척이나 서투르다. 실제로 하는 대화뿐만이 아니라 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커왔다. 깜깜한 방 안에서 자기 자신과 머릿속으로 체스를 둬왔을 것이다.
이 영애는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법밖에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서투르다. 상대방을 읽으며 다음 수와 그다음 수를 예상하며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의 목을 물어뜯는 것을 더욱더 선호한다.
이 영애는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투르다. 그녀가 기물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발톱을 밀어넣는 것은, 그녀가 스스로를 가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 하하하….”
제니스 후작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있다. 녀석의 손등에 소름이 돋은 것이 보인다. 이 영애가 성장했을 때, 이 괴물이 자신의 본성을 꺼내고 세상 밖으로 자신을 드러냈을 때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흥미로운 사람이군요. 페넬로티 영애는….”
“네? 그… 그런가요? 저는 잘… 계속 제가 밀리고 있는 것 같은데….”
“당연할 겁니다. 페넬로티 영애는 이 게임을 접한 게 처음이니 말입니다.”
‘이 개새끼. 내가 쳐 발릴 때는 그렇게 지랄을 하드만.’
“네… 네?”
“참… 재미있군요.”
‘그게 뭔데. 이 새끼야. 도대체 뭐가 재미있는데 이 찐따 새끼야.’
“페넬로티 영애의 눈에는 제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갑자기 그걸 왜 묻는 건데?’
“네? 친절하시고….”
“아니… 그걸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어떤 걸 느끼셨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글… 글쎄요.”
“…….”
“제니스 후작님은…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하신 분 같아요. 생각하는 걸 멈추지 않고, 모든 걸 통제하시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지고 계신다고 느꼈어요. 무엇보다 변수를 싫어하신다고 느꼈어요! 지금도 제 말이 제니스 후작님의 계획에서 벗어나자, 다시 판을 재구성하셨잖아요. 제니스 후작님께서 유리한 상황이신데도 말이에요.”
“…….”
“그리고….”
“네?”
“그리고….”
“…….”
“이,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좀 그렇지만….”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페넬로티 영애.”
‘큰 거 한 방 간다. 시바.’
“조금… 조금은 외로우신 것처럼 보였어요. 물, 물론 제 착각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제니스 후작님이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이… 쓸쓸하게 느껴져서….”
“…….”
“…….”
입을 다물고 있는 제니스 후작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물…론 제니스 후작님 같으신 분이 그럴 리는 없겠죠. 헤… 잊, 잊어주세요. 변명하자면… 사, 사실은 제가 외롭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몰라요. 저는 쭈욱… 혼자였거든요. 그… 그래서 이렇게 찾아와주시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시는 것도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
‘이 새끼 정곡 찔렸나 보자너.’
“하지만 역시… 저 같은 사람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지, 지루하시겠죠. 즐겁지 않으실 테고요.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제가 이런 데는 서툴러서… 제니스 후작님을 지루하게 만들었을 거예요. 이, 이런 쓸데없는 말이나 하고 있고….”
“…….”
“제. 제니스 후작님이 보내주신 호의는 너무 감사해요. 또… 저를 좋게 평가해 주시는 것도 너무… 영광이고요. 하, 하지만 저는 제니스 후작님의 생각처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제니스 후작님을 즐겁게 할 수 없어요. 그럴 자격도 없고… 방법도… 잘 몰라요. 혼자인 게… 익숙하거든요. 제니스 후작님도 아시다시피… 저… 저주….”
허둥지둥 기영로티!
“앗… 제, 제가 무슨 소리를.”
얼굴 붉게 붉히기!
“…….”
침울한 페넬로티!
하지만 제니스 후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조금 더 자세히 아이나 페넬로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임을 계속하자는 듯이 말없이 묵묵하게 기물을 옮기고 있다.
고개를 푹 숙인 페넬로티 역시 녀석과의 게임을 이어나간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페인트, 파스텔, 브러쉬, 팔레트 4총사는 쇼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지들끼리 꽉 껴안고 체온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와. 시바 해가 뜨고 있네. 이거 괜찮나? 이 새끼 이거 도장 찍으려고 일부러 11시에 기어들어 와서 지금 이 시간까지 처박혀 있나?’
1군사 역시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본인도 이 정도까지 흑장미 살롱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던 모양, 심지어 게임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물론, 승패는 대충 기울어져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1군사 성격이 한 번 두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던지라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인다.
‘그래서. 시바 안 나갈 거야?’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낸다면 나중에는 살롱을 나가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다. 누가 녀석이 아침에 흑장미 살롱을 나가는 것을 본다면 페넬로티 영애가 추문에 휩싸일 수도 있는 상황.
물론 소문을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다. 무도회장 내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겠지만, 인정하는 것과 숨기려고 노력을 하는 것을 또 다른 문제였다.
‘시바 이 새끼. 내보내야 돼.’
김현성에게 닿기도 전에 엉뚱한 새끼한테 발목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해… 해가 뜨고 있어요. 제니스 후작님.”
게임을 하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발코니로 달려나가야 했다. 점점 밝아지는 하늘, 주황색으로 변하고 있는 세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쯤 되면 녀석도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리 만무, 애초에 저 게임을 마무리 짓자고 오늘 하루를 통으로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이 멍청한 녀석도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는 만큼 할 일이 있을 것이고 더 이상 페넬로티에게 시간을 쏟을 수는 없을 것이다.
“…….”
“…….”
“잠깐 발코니에 있어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저, 아침노을 피는 하늘을 정말로 좋… 좋아하거든요.”
“저 역시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주황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보여서 말입니다.”
“아… 네. 그, 그렇죠. 하지만요. 후작님! 물론 하늘도 아름답기는 하지만….”
“네.”
“아침노을이 피면 그…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하잖아요.”
“아….”
“저는 그게 좋아요.”
“…….”
“제가 머무르는 저택은 항상 어두웠거든요. 밤이 되면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저, 저는 언제나 혼자였어서… 이런 말 드리기는 부끄럽지만… 그림자가 있으면… 왠… 왠지!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이 들어서….”
살짝 감정이 고조된 페넬로티!
“그래서… 그래서 아침노을이 피는 순간을 좋아해요!”
상큼한 미소의 페넬로티!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귀엽고 급발진 하는 페넬로티!
물론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
‘내, 내가 왜 그랬지? 미쳤나 봐, 페넬로티. 너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아직 제니스 후작과는 이렇게 가깝지도 않다. 그림자가 좋다느니 아침 노을이 좋다느니, 혼자여서 외로웠다느니, 저택이 어두웠다느니 같은 소리를 지껄인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발언인지는 아이나 페넬로티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어쩌자고 오늘 막 인사를 나눈 타인에게 이런 소리를 쏟아냈단 말인가.
부끄러움과 괜한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화악 붉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설정상 아이나 페넬로티의 행동이 부자연스러운 행동은 아니다.
제니스 후작 역시 이상함을 느끼지는 않을 터였다.
말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밤이 새도록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제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
“조… 조금… 부… 부끄럽네요….”
‘촛… 촛토… 하… 하즈카시이….’
아이나 페넬로티에게도 그 시간은, 그와의 거리감이 더 가까워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는 거다.
아침노을이 얼굴을 비치고 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얼굴이 더 붉은 것만 같은 페넬로티 영애에게 제니스 후작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페넬로티 영애.”
“…….”
“…….”
“…….”
“오늘…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아….”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명대사 아닌 명대사.
“…….”
“…….”
이… 이 새끼… 시바 따뜻한데?
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