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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79화 (1,37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79화

뜻밖의 데뷔(14)

영화 속 한 장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계속해서 들려오던 잔잔한 음악소리가 어느 순간 끊긴 것은 당연지사.

각자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귀족들 역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떠들썩했던 무도회장에 어느새 침묵이 가라앉은 것이다.

가십에 환장 아닌 환장을 하는 놈들이었으니 당연히 이목이 집중될 만했지만 평소보다 더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

본래 젊은 혈기에 취한 놈들과 허세 가득한 놈들이 모이는 장소인 만큼 매일매일 사건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회장이었지만 이번 사건은 평범하게 웃어넘길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다.

최근에 가장 뜨거운 감자였던 페넬로티 영애가 그중에 있었다는 게 그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제니스 후작과 핑크레인 공작이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어디 시골 촌구석에 있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라,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는 귀족들이다. 귀족들이라면 누구나 다 명예를 생각하기는 하지만 저런 고위 귀족의 경우에는 더욱더 쓸데없는 명예에 집착한다.

‘핑크레인은 그런 명예 없는 것 같기는 하던데.’

저 새끼는 전형적인 쓰레기였으므로 논외, 아무튼 추문, 가십이나 사건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역시 불명예라고 생각하는 만큼, 서로서로 몸을 사리는 것이 관례였다는 거다.

특히나 저렇게 고위 귀족과 고위 귀족이 부딪치는 경우에는 더욱더 그랬다.

알량한 권위만 믿고 설치는 하급 귀족이 아니라 작위와 영지를 가지고 있는 진짜 고위 귀족들의 가슴이 웅장해지는 마찰. 순식간에 갤러리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아 시바 이 새끼 왜 쓸데없이 간지나게 등장하고 난리야. 진짜.’

“…….”

“…….”

“무, 무슨 일이죠?”

“저도 잘… 제니스 후작님과 핑크레인 공작님이에요. 아무래도 페넬로티 영애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 같은데.”

“핑크레인 공작님…인가요? 혹시나….”

“춤을 권했다 거절당한 게 화가 나셔서 그런 건가 봐요.”

“설마요. 설마 그렇겠어요?”

‘네. 그 설마가 맞았습니다. 시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시겠죠. 참… 저번 무도회도 그렇고… 페넬로티 영애는 사건을 몰고 다니시나 보네요. 쯧. 이쯤 되면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지….”

“설… 설마요.”

‘네. 그 설마도 맞았습니다.’

웅성웅성거리는 갤러리들, 아직도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핑크레인 공작, 조용히 나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제니스 후작, 그리고 시바 몇 발자국 뒤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김현성까지.

모든 게 그림으로 그린 듯했다.

‘아니, 진짜 애초에 이 새끼는 왜 튀어나온 거야.’

그렇게 가지고 싶었을까.

‘참 대단하시네요. 대단하셔.’

적당히 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조금 어울려줬더니 지랑 내가 진짜 친구인 줄 아는 찐따의 모습이라 할 만했다.

물론 갑작스러운 천재의 등장에 욕심이 날 만도 하겠지만 이런 진 군사답지 않은 행동을 하면서까지 나를 두둔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 이 새끼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잖아.’

무도회장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치정 싸움? 단언하건대 이 새끼 그런 거에 질색하는 스타일이다.

페넬로티 영애를 자신에게 반하게 하고 말겠다는 사악한 음모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그림 같은 타이밍에 등장할 수 있을까.

‘진짜 폭스 새끼자너.’

“괜찮으십니까. 페넬로티 영애.”

“네? 아… 네. 저… 저는… 괜찮아요. 제니스 후작님. 그보다… 제니스 후작님께서는….”

“저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내가 아니라 이 새끼가 설계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다섯 발자국 뒤에 김현성이 있는데도 지 얼굴이 먹힐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억지로 잘생긴 척하는 모습은 봐주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로 페넬로티 영애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과 눈빛, 이렇게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자처해서라도 페넬로티를 얻고야 말겠다는 기백이 전해져 온다.

제니스 후작이 핑크레인 공작을 향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핑크레인 공작.”

“무례라니요? 제가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

“오히려 페넬로티 영애와 제 대화에 갑자기 끼어든 것은 제니스 후작이 아닙니까?”

‘시치미 떼시겠다 이거죠? 정치판은 허투루 구른 게 아니라 그거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작위의 무게감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핑크돼지 공작이 페넬로티에게 뭐라고 말했던 것과는 관계없이 본인이 가진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다고 여긴 것이 분명하리라.

실제로 들었던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미 얼굴에 철면피 깔기로 작정했죠? 저러면 답 없죠?’

“제가 눈과 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핑크레인 공작. 춤 신청을 거절당했다고 그녀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제니스 후작께서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만… 이보게 보헨.”

“네. 핑크레인 공작님.”

“혹시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

“없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공작님.”

‘와. 진짜 쓰레기자너.’

“칼하이라츠.”

“네. 핑크레인 공작님.”

“제니스 후작은 내가 페넬로티 영애를 모욕했다고 하는데….”

“들, 들은 적 없습니다. 공작님.”

‘진짜 치졸하자너.’

“어떻습니까? 근처에 있는 다른 귀족들은 제가 그런 폭언을 한 것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모든 게 오해입니다. 제니스 후작. 저는 그냥… 어른이 된 입장에서 페넬로티 영애에게 조언을 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조언?”

“조금 더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말입니다. 이를테면 전에 있었던 쓸데없는 소문에 대한 이야기였지요. 앞날이 창창한 영애가 쓸데없는 추문에 휘말려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영 보기 힘들었던 터라. 왜 소문의 당사자이신 제니스 후작이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콧대가 높아 다른 이들과는 춤 한 번 추지 않은 영애가… 낯선 이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는 추문이 여기저기서 퍼지고 있는데… 어른 된 입장으로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와. 진짜 이 새끼는 여러모로 역대급이네.’

게다가 제법이기까지 하다.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물타기 하는 것까지 완벽해. 아주. 의외로 이성적이기까지 해서 더 재수 없어.’

순식간에 제니스 후작이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에 몰려 있다.

‘그러게 왜 시바 네가 걍 튀어나와?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하고 튀어나온 거지? 시바.’

“그렇지 않아도 페넬로티 영애는 이제야 막 사교계에서 이름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쓸데없는 추문에 휘말리는 것만큼 안 좋은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핑크레인 공작. 그날 흑장미 살롱에서 페넬로티 영애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을 제 명예를 걸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시바. 부정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아하. 그렇습니까? 부정하지 않으신 겁니까?”

‘아 1군사 이 음흉한 새끼 시바.’

아무래도 페넬로티 영애를 구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시바 잿밥에 더 관심이 있었던 모양.

아니나 다를까 웅성거리는 소리가 더욱더 거세진다.

어마어마한 스캔들이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흑장미 살롱의 다른 영애분들도 함께 자리해 있는 자리였고, 제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페넬로티 영애에게는 폐를 끼친 것뿐입니다. 페넬로티 영애의 명예를 더럽힐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그녀가 언제나처럼 고결하다는 것은 제가, 제니스의 이름으로 직접 보증하겠습니다.”

‘너 제니스 아니잖아. 이 새끼야.’

“하하하. 제니스 후작님께서 어지간히도 페넬로티 영애를 아끼시나 봅니다. 그리 직접 보증하신다면야… 제가 무어라 할 말은 없겠습니다만….”

“아니,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핑크레인 공작. 페넬로티 영애에게 할 말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무슨 말을?”

“페넬로티 영애에게 사과하십시오.”

“제가? 사과를 말입니까?”

“그녀에게 행했던 무례한 행동들 말입니다.”

“이미 그건 말이 끝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니스 후작님께서 잘못 들으신 것 같다고 말입니다.”

“아직 페넬로티 영애의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다만.”

“하!”

“어떻습니까. 페넬로티 영애.”

제니스 후작의 시바 부드러운 눈빛이 페넬로티를 시바 감싸고 있는 중, 대인관계에 자신감이 없고, 이런 상황에 면역이 없는 설정에 있는 만큼 조금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페넬로티는 바보가 아니다.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구별할 수 있었고, 여기서 제니스 후작을 곤란하게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제니스 후작 역시 내가 한 발자국을 더 내딛기를 원하고 있었던 터라 한 발자국을 슬쩍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핑크레인 공작님께서… 제게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으셨어요. 제게 추문을 조심하라거나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조언하셨던 적은 없어요. 거… 거짓말이에요.”

‘용기를 낸 페넬로티!’

“하….”

‘대중들 앞에서도 당당한 페넬로티!’

“그렇다고 하시는데 어떠십니까? 핑크레인 공작.”

“들을 가치도 없습니다. 거짓이죠. 그녀가 거짓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제니스 후작! 제 단정치 못한 행실이 밝혀질까 억지로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게지! 제니스의 이름을 걸었다고 했나?! 그럼 나는 핑크레인의 명예와 이름을 걸지! 그녀의 말은 거짓입니다! 내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신께 맹세하건대! 나는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한 적이 없습니다!”

“…….”

“네 이년!”

‘꾸짖을 갈!’

“어서 바른대로 말하지 못할까!”

‘윽박지르기 나왔죠?’

“네년의 방금 그 언사에! 네년의 가문의 이름과 명예를 걸 수 있겠느냐! 아니, 건다고 한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변경의 가문의 명예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누가 네년의 말을 믿어주겠냐 이 말이다!”

“…….”

“…….”

‘아니죠? 현성이도 들었죠? 우리 현성이가 옹호해 줄 타이밍 나왔죠? 다른 귀족들 다 지레 한 발자국 물러나 있어도, 김현성 백작은 튀어나올 만하죠?’

현성이 등장씬이 더 간지 날 것 같자너. 결정적인 순간에 딱 분위기 휘어잡아 줄 거자너.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제가 믿습니다.”

‘아. 시바. 그만 좀 해. 진짜.’

“제가 그녀를 믿습니다. 핑크레인 공작.”

‘아 감동모먼트 만들지 마. 그런다고 반할 것 같냐고 시바 진짜.’

“뭐… 뭣?”

“핑크레인 공작이 뭐라고 떠들든 간에, 이곳에 있는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제가 그녀를 믿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혹시 제니스 후작 이 새끼가 핑크레인 공작을 섭외한 것은 아닐까?’

“그녀에게 사과하십시오. 일전에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은 것과 더불어, 쓸데없는 추문을 입에 담아 그녀의 명예를 더럽히려 시도한 것 또한 사과하십시오.”

“제… 제니스 후… 후작님….”

‘오그라들어요. 시바 제니스 후작님.’

“흥!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은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니스 후작! 그리고 뭐. 명예를 더럽혀? 제니스 후작 그대야말로 페넬로티 영애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린 장본인이 아닌가! 연놈들이 밤새도록 붙어먹더니 어처구니없는 말로 나를 모함하는군! 참으로 대화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 아닌가!”

“그런 더러운 말을 입에 담지 말라는 겁니다. 핑크레인 공작!”

‘아 좀 꺼져! 진짜! 이 새끼가 핑크레인 공작 섭외한 거 맞아. 시바.’

“그… 그만하세요! 제니스 후작님!”

‘시바 더 이상 날 엿 되게 만들지 마세요. 제니스 후작님!’

결투라도 벌일 것 같은 분위기였다. 1군사 이 새끼도 묘하게 텐션이 올랐는지 이 잘 짜여진 각본에 언성을 높이는 중.

누가 보면 시바 영애를 위해 불의를 참지 않은 정의로운 후작처럼 보였겠지만 이 새끼의 검은 속내를 생각해 보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 남몰래 이 상황을 힐끔힐끔 지켜보고 있을 진 군사도 놈의 뚝배기를 부숴 버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지 않을까.

단언하건대 지금 이 순간이 2군사와 나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순간일 것이다.

‘머릿속은 팽팽 돌아가고 있을 거야.’

이번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빌드업을 할지, 어떻게 아이나 페넬로티를 공화국으로 데려갈지까지 모두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온도가 뜨겁게 올라간 핑크레인도 핑크레인이지만 쉽게 예열되지 않는 진 군사가 달아오른 걸 보고 있노라면 저건 무조건 연기일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나서는 게 오히려 더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이미 물타기 다 됐자너.’

핑크레인과 제니스의 마찰도 마찰이었지만 아마 이 싸움이 끝난 이후, 가장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할 만한 가십은 ‘페넬로티 영애와 제니스 후작 그날 밤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일 것이라 장담할 수 있다.

지금 당장 귓속말을 나누고 있는 이들도 모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까.

물론 제니스 후작이 자신의 명예를 직접 걸고 소문을 처리해 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띈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아이나 페넬로티?”

“…….”

“…….”

눈앞에 자리한 인물은 마리나 페넬로티와 카리나 페넬로티. 배다른 자매 설정을 가지고 있는 알프스와 벨리에였다.

“언… 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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